<공동체가 양생이다> 7회 무진장, 우리들의 '돈' 이야기

기린
2021-03-22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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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돈’ 이야기

 

중학교 2학년 봄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어머니는 여행가서 쓸 용돈으로 만 원을 주셨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천 원 정도 생각했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기념품 같은 거 선물이랍시고 사오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속으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꼭 사와야지 생각했다. 또래들과 가는 첫 여행,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용돈도 두둑 하겠다 맛있는 군것질거리들에 자꾸만 손이 갔다. 야금야금 쓰다 보니 이틀도 되기 전에 바닥이 보였다. 받을 때 이렇게 많이 라는 놀라움이 애걔 이렇게 쓸게 없다니 로 바뀌었다. 기념품 사오겠다고 큰소리 안 쳤던 게 다행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써보니 순식간이더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셨다. 그 때 알았다. 돈 쓰기 참 쉬웠다.

 

 

 

스무 살에 서울로 상경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전봇대에 붙은 판촉직을 구한다는 문어발 광고를 보고 전화를 해서 취직을 했다.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에 퇴직금도 받을 수 있었던, 지금처럼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구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2년 쯤 일했는데, 매달 월급을 받는 재미 빼면 낙이 없었다. 회사에 판촉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 두겠다고 했다. 경리 언니가 퇴직금을 정산해주면서 이제 뭘 먹고 살거냐 한 걱정을 했다. 그 후 가족들에게 빌붙어서 그럭저럭 살았다. 대부분 쪼들렸고 직장인일 때 만들었던 신용카드로 돌려막기 결제를 하면서 이십대를 보냈다. 삼십대 이후 학원 강사로 일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만족도가 낮은 일이었다. 수업 시간만큼 월급을 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수업이 줄어 받는 돈도 줄었다. 그래도 돈 쓰기는 여전히 쉬웠으니 경제사정으로 보자면 내 인생은 늘 ‘마이너스’ 였다.

 

공동체에서 마을 경제라는 주제로 공부를 계속했던 친구들이 ‘무진장’을 만들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밝힌 자본주의체제를 심화시키는 사적 소유를 흔들어보자는 실험이라고 했다. 몇몇 친구들은 포럼을 열고 자료를 뒤지면서 회칙과 강령을 만들었고, 뭐든 같이 해야지 라는 친구들까지 그렇게 모인 인원이 총 24명이었다. 각자 50만원을 추렴해서 종자돈을 만들었는데, 나는 다른 친구가 내 몫까지 부담해줘서 합류했다. 정식 출범 전에 시범적으로 무진장을 운영하면서 매달 회의가 열렸다. 무진장에서 돈을 꺼내 쓰는 행위를 대출-상환으로 명명할 것이냐 입금-출금으로 할 것이냐 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회의를 거듭한 끝에 무진장을 “단순한 구휼자금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공동생활기금”이라고 규정하면서 입금-출금으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내 통장은 마이너스인데 무진장의 통장에는 돈이 두둑한 현실, 나는 그 돈을 ‘내 돈’처럼 출금해서 쓸 수 있을까. 시범 기간을 끝내고 무진장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던 2017년 4월 나는 새로운 실험을 하겠다고 나섰다.

 

 

   2. 입금과 출금, 그 속사정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활동으로 매달 버는 수입은 대부분 백만 원에 못 미쳤다. 그렇다고 살림살이가 쪼들리지도 않았지만 마이너스 통장을 없앨 수도 없는 딱 그만한 수준이었다. 나는 활동 수입 전체를 무진장으로 입금하고 매달 백만 원씩 출금해서 써 보겠다고 했다. 당시 오십 만 원정도 벌었으니 배를 출금하는 규모였다. 이 차액을 빚이라는 부담감 없이 쓸 수 있을까. 당장의 부담은 확실히 줄었다. 그 자리에 매달 내 통장 잔고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안정감이 채워졌다. 또박또박 들어오는 월급의 효과였다. 몇 달이 지났을 때 강사료가 제법 되는 도서관 강의를 할 신청자를 찾는다는 운영회원 톡이 올라왔다. 예전 같으면 선뜻 나설 엄두를 못 냈을 텐데 보자마자 번쩍 손을 들었다. 돈을 벌겠다는 의지가 이렇게 강렬하게 발동하다니 내심 좀 놀랐다. 그 해 말 도서관 강의로 번 강사료를 무진장에 넣었고 입금과 출금 사이 차액이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 후련하기까지 했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에 의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물질이 교환될 때 물질에 담겨있는 ‘영혼’까지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영혼의 이동으로 서로간의 신뢰나 명예, 우정 등의 인격적인 유대가 발생하는 증여적인 사회였다고 한다. 반면 우리가 돈을 지불하고 상품을 등가 교환하는 자본주의체제에서는 어떤 유대도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치는 증여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진장을 통해 출금하는 행위는 분명 등가교환은 아니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사이 우정에 수반된 증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한편으로 여전히 ‘빚’이기도 했다. 돈으로 진 빚은 돈으로 갚아야 한다는 등가교환 감각 또한 지극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차액을 갚고 나서야 체면이 선 것 같았고 마음까지 후련했던 것이다. 돈이 교환가치로써 발휘하는 위력은 그만큼 착각을 일으키기 쉬웠다. 매달 백만 원을 출금하던 실험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해를 넘겨도 대부분의 친구들은 입금도 출금도 하지 않는 회원에 머물렀다. 운영회의를 거쳐 새로운 실험들이 제안되었다. 그 결과 각자 1년 프로그램의 학비를 출금하기도 했고, 공동체 안에서 쓰는 돈을 무진장에서 출금하는 ‘조아’를 실험했다. 자누리 비누를 사고 공동밥상에서 먹는 밥값을 내기 위한 소소한 출금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부담도 느껴졌다. 입금에도 출금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친구들은 무진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실제로 몇몇 친구들은 무진장의 활동에서 한계를 느낀다며 탈퇴하기도 했다.

 

  3. 우리의 ‘돈’ 이야기

 

한 달에 두 번씩 운영회의를 할 때마다 회원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활동을 기획했다. 그 중 하나로 무진장에 대한 친구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인터뷰도 있었다. 인터뷰를 해보니 무진장과 가족 경제의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고충을 밝히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나처럼 공동체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집집마다 돈을 쓰는 용법이 다른 가족 경제 상황을 밝히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적 소유를 흔들어 보자거나 비자본주의라는 말들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형편은 다른데 단일한 척도로 그 형편을 재단해야 한다면 스스로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무진장 실험을 함께 할 수 없을까.

 

공동체에서 먹고 사는 나의 형편은 여전했고 무진장에서 출금을 해야 하는 상황도 계속되었다. 매달 백만 원을 출금했을 때는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퉁 쳤는데, 필요할 때 마다 출금하자니 그 명목을 시시콜콜 밝혀야 했다. 게시판에 출금을 요청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돈 얘기를 꺼내기 멋쩍어 봄 날씨 운운하며 연서를 쓰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관절수술 차 우리 집에서 두 달 간 요양을 했을 때였다. 늘어난 생활비를 출금신청하면서 봉양 스트레스에 대해 주절댔다. 내가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 계약을 연장하는데 필요한 보증금 인상분을 신청하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구질구질하게 내 형편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현금 서비스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느라 마음까지 구질구질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나의 출금은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여전히 돈도 없고 하는 일은 술술 풀리지 않아도 무진장도 있고 해서 견딜 만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무진장을 통과할 때 서로 다른 형편 때문에 부담스러운 우리들의 마음도 함께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친구의 형편도 무진장을 통해 알려졌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중인데 그 사이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친구의 형편이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매달 오십 만원씩 일 년 동안 출금하기로 했다. 친구의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물 한 모금이라는 뜻으로 ‘마중물’이라 이름도 정했다. 친구들은 나에게도 먹고 사는 걱정에서 벗어나 좀 더 안정된 상황에서 공부하라며 마중물을 받으라고 권했다. 필요할 때 신청하는 출금 절차 없이 무조건으로 매달 오십 만원이 입금되었다. 나의 형편은 확실히 여유가 있어졌다. 그 여유는 무진장의 돈을 내 돈이다 아니다 라는 분별을 버리는 데도 한 몫을 했다. 언젠가 나의 형편이 나아져서 무진장에 입금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하지만 그마저도 반드시 갚아야한다는 부담보다는 바람에 가깝다. 그 바람에 우리의 무진장 실험도 흔들흔들 흔들리며 굴러가기를 바라면서.

 

 

 

  4. 무진장은 계속 된다

 

해가 바뀌고 또 다른 친구들의 형편이 무진장에 전해지고 마중물을 받는 친구들이 바뀌기도 했다. 매달 마중물로 출금되고 비정기적으로 학비 등을 출금하는 경우도 있고 물품을 구매하는 출금도 된다. 이렇게 매달 출금만 있으면 무진장의 잔고는 금방 바닥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로 오년 째인 무진장의 잔고는 아직까지 바닥을 보인 적이 없다. 무진장은 회원이면 누구나 잔고를 확인할 수 있는 통장을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달 누가 출금을 했고 누가 입금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가끔 들어가 보면 매달 출금이 되는 돈 못지않게 입금되는 돈도 꾸준하다. 출금하는 친구들보다 형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입금한다. 어느 날 실수로 무진장 단체 톡방을 나갔던 친구가 재가입하고 싶다고 다시 오십 만원을 입금해서 우리를 웃겼다. 한 달 동안 금연을 실천하면서 모은 담배 값을 입금한 친구도 있었다. 이렇게 출금만큼이나 입금을 챙기는 친구들의 마음이 무진장을 마르지 않는 창고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년 말 무진장 총회가 열렸다. 한 해 무진장의 여러 실험결과를 점검 평가하고 다음 해의 활동도 기획하는 자리였다. 무진장의 출금과 입금과 관련해서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밝히는 토의 시간도 있었다. 각자의 생각의 차이를 확인했지만 그것이 지금 무진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직접적인 원인일 수는 없다는 의견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내년에도 이런 차이에 대해 지속해서 논의하자는 정도에서 토의가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우리 모두 애면글면 살아냈다는 이야기들이 줌 화면으로나마 흘러 다니면서 마음들이 조금씩 말랑말랑해졌다. 총회가 끝나고 선뜻 나가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다가 나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작년 한 곡 마스터하기 도전으로 6개월 내내 연습했던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을 부르겠다고 했다. 줌 화면을 향해 쌩목을 내지르며 노래를 부르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박장대소에 야유에 어떤 친구는 식구들까지 불러다 같이 들었다고 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진짜 웃기는 코미디였다는 평이 가장 많았다. 친구들이 한바탕 웃어 줘서 좋았고, 이런 순간이 또 언제 올지 몰라 소중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스무 명의 친구와 찐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쫌 행복했다.

 

 

 

 올해 새롭게 마중물을 신청한 친구들이 생겼다. 남편이 퇴직을 하면서 가정 경제에 변화가 생겼으니 마중물로 생활비를 보충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마중물에 의지해 다른 약국에서 하던 알바를 접고, 공동체와 연결된 ‘일리치약국’에서 자립하는 실험에 집중해보겠다고 했다. 주로 입금을 했던 친구가 마중물을 받게 되면서 어떤 경험을 할지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럴 때 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우여곡절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감당하고 있음을 느낀다. 돈이 없으면 불행한 세상이라고 한다. 맞다. 공동체에 오기 전에 나 역시 쓰기는 너무 쉽고 벌기는 너무 어려운 돈 때문에 때때로 불행하기도 했다. 또 받은 만큼 돌려주는 등가교환의 질서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으며 살았다. 하지만 무진장을 실험하며 그 교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증여로 나아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돈이 없어도 불행하지만 돈만 있어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현실의 문턱은 여전히 강고해서 우리는 때때로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구질구질한’ 돈 이야기를 계속 할 것이다. 그러면서 돈도 섞고 마음도 섞으면서 함께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할 것이다. 그게 사적인 소유를 흔드는 일이고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아보기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으면서.

 

댓글 5
  • 2021-03-22 08:41

    오홋! 무진장!

    작년 겨울 총회는 대단했죠!

    이제는 숨길 것 없이, 그렇다고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 같았어요.

    겨울 화톳불 앞에 앉아 조근조근 얘기하듯, 그 분위기에 취해 아무도 줌 나가기를 누를 생각이 없었지요.

    거기까지 가는 동안 기린, 참 애 많이 썼어요 ㅎㅎ

    공동체를 이렇게 절실하게 대하는 친구가 있어서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 2021-03-22 09:42

      저도 일정금액을 입금하는 무진장 회원이 될 수 있나요?

      • 2021-03-22 13:59

        와~~ 연락드릴께요

  • 2021-03-22 17:25

    작년이었던가용 올해였던가요

    제가 벌이에대해 고민을 할때

    흔쾌히 빌려주겠다고 하셨던 기린샘이 떠오르네용

    ㅎㅅㅎ 멋집니다 기린샘

  • 2021-03-23 01:13

    올해도 노래연습해야할듯ㅋㅋ

    나 숨넘어갈 뻔~~

    기대할게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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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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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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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2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4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0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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