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5회]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고은
2021-03-03 09:44
661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연애의 딜레마

 

   거의 6년 만에 솔로가 되었다. 간만에 솔로가 되니 ‘이제 연애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 애인과는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연애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 명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연애할 때면 애인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에 휩싸이고, 연인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긴다. 다른 이와 깊은 관계를 맺을 시 그 상대가 나의 성적 지향성에 부합한다면 바람피우는 일이 된다. (나의 경우엔 내 애인의 성별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 사랑하는 내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애매해진다) 물론 다른 관계를 열심히 배타적으로 만들어도 애인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투거나 같은 일에 의견이 갈릴 때면 상대와 합일될 수 없음을 체감하면서 외로움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는 대개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줄 내 편을 찾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시작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시작한 연애가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별을 했다가도 다시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연애를 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연애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 실마리는 내가 경험하는 독점적 연애, 로맨틱한 연애의 ‘ㅇ’자 도 모를 것 같은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仁(인)’에 있었다.

 

▲연애의 딜레마

 

 

 

 

 

 

정체가 묘연한 仁

 

   仁은 공자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오늘날 동양고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오래도록 仁을 이해하지 못했다. 『논어』를 들여다봐도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공자는 어떤 개념도 특정해서 설명해준 적이 없거니와, 仁에 대해서는 더욱 말을 아꼈다고 한다**. 개념을 풀어낸 사전을 찾아보아도 그 뜻이 불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자 사전에 적힌 “어질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중국사상문화사전』(미조구치 유조 외)에 쓰인 “애정 혹은 연민”은 무얼 의미한단 말인가.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며 뒷전으로 미뤄뒀었는데, 연애 딜레마를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자공이 공자에게 仁에 관해 물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子貢曰 :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자공이 말했다. “만일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인이라 할 만합니까?” (6:28)

 

 

▲자공

 

   질문을 주고받는 낌새를 보아하니 자공도 仁을 묘연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는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내가 仁을 훌륭한 성품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공 역시 仁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라 여겼다. 굳이 따지자면 자공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자는 자공의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완벽한 것을 기준으로 잡고 시작하면 도달하지 못할 목표라고 쉽게 포기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아 허황된 꿈을 꿀 위험이 있다. 공자는 자공의 말을 옛날 옛적 훌륭한 임금이라 칭송받는 성인들도 해내지 못할 것이라며 자르고는 자공의 눈높이에 맞는 이야기를 해준다.

 

子曰 :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하다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셨다! 어진 사람[仁者]은 자신이 서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통달하게 한다.” 

 

   공자는 자공에게 성인이 아닌 보통의 인간도 仁을 행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공자의 말도 만만치 않다. 내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도 움직인다는, 다른 존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나부터 움직이라는 말은 나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걸까? 이질적인 존재가 수두룩한 가운데, 한 명뿐인 애인하고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게 나의 현실인데…. 자공은 공자의 이 같은 확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졌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보다 더 높이는 것이 없다. (子曰…好仁者 無以尙之…) …”(4:6)

**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 그리고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子罕言利與命與仁.)”(9:1)

 

 

 

 

 

 

仁도 연애도 순환의 문제

 

   당시 仁은 종종 쓰이던 단어로 시와 의학서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중 옛 의학서에서는 손발이 마비되는 것을 仁하지 못한 것(不仁)이라 표현했다. 손발의 저림은 체했을 때나 급격한 빈혈이 왔을 때처럼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 발생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仁이란 마비나 고립과 거리가 먼, 순환이 잘 되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때 순환이 잘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건강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환은 내 몸 안에서만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몸 안의 세포들부터 외부의 세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니, 나 역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상태일 때야 원활한 순환이 가능하다.

 

   이전에 사용되었던 맥락을 따라 다시 보니 仁에 대한 조금 감이 잡히는 듯했다. 仁은 사람이라면, 아니 생명이라면 누구나 나 이외의 존재들과 연결된 채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게 보면 仁과 연애에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연애도 仁만큼이나 어떤 존재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일이다. 합일을 향한 의지와 다른 관계를 배타적으로 만드는 연애의 과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합일의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들이닥치는 외로움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지 못했다는 절망에 가깝다. 연애의 문제는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仁과 연애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연애가 다른 관계를 차치하고 단둘이서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仁은 만물과 연결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가 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단 주희는 이렇게 설명한다. “仁은 천지만물을 하나로 여겨서 자기가 아님이 없을 뿐이다.”(仁者, 以天下萬物, 爲一體, 莫非己也.) 순환이 정말 잘 되면 온 세상과 통한다. 따라서 仁한 사람은 아무리 독단적으로 보이는 행동이라도 내 한 몸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의 일은 좁게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일이고 더 넓게는 얼굴도 알지 못한 타인과 인간 외 존재의 일이다. 시설에 갇힌 장애인, 가장 음지에 있는 노숙자, 먼 나라 난민,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가축, 기후위기를 맞이한 지구를 자신과 같이 여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연애가 구원처는 아니지만, 현장이 될 수는 있다.

 

   그간 꾸준히 연애를 해왔으면서도 연애를 답답하게 느꼈던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오래도록 연애를 하면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을 거라고, 연애가 관계의 중추라고 생각했다. 몇 번의 연애가 끝나고 20대 후반이 되고 난 뒤에야 연애가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처가 아님을 알게 됐다. 도리어 요즘엔 내 옆에 사랑하는 애인의 자리뿐만 아니라 퇴직한 아빠, 아픈 강아지, 식탁에 오르는 돼지, 거리에서 사라진 장애인과 같은 이들의 자리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답답함은 연애를 근절하고 싶다는 생각이라기보단, 단둘만의 관계로는 세상과 연결된 몸이 될 수 없음을 느꼈던 일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내게 연애를 할까,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아진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연애에 쏠린 고민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공자가 말하는 仁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본다. 어떻게 하면 만물과 연결될 수 있을까?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仁-능력을 기르는 방법을 귀띔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하여 남을 헤아린다면 인(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곧 만물과 같다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대신 만물도 나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은 반추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고, 내가 아프다면 어떤 존재 역시 아플 수 있다. 이때 나의 경험은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를 벗어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 어떤 관계가 누군가와 특별히 밀접하다고 곧 不仁은 아니다. 仁-능력이 내가 가진 단서들로부터 길러진다는 것은 仁이 구체적이고 소소한 일상의 영역에 있음을 의미한다. 仁이란 보이든 일상에서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감하며 동시에 그것을 일상에서 구현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만의 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관계를 통해 반추하고 다른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면 연애 역시 仁-능력을 키울 수 있는 단서가, 仁을 발현하는 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구원처 아닌 현장

 

 

 

 

 

댓글 7
  • 2021-03-04 01:05

    仁이 혹시 사람 인+두 이자의 결합인가요??? 헉.

    • 2021-03-17 13:51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 2021-03-04 19:36

    연애를 저렇게 어렵게 해서야 원 쯧쯧
    仁 따위 집어치우고 연애를 풍선처럼 가볍게~ 감자칩 처럼 바삭하게~ 해 보아요.

    • 2021-03-05 05:35

      봉옥언니 연애의 달인!!!!

    • 2021-03-06 21:24

      ㅋㅋ 네 유념하겠습니다!

  • 2021-03-09 20:41

    연애가 일부일처 혼인관계의 prequel 프리퀄 같은 거군요... 흐음...

  • 2021-03-16 23:32

    仁이랑 연예랑 연결시킨 게 재밌네요.

    연예가 무거워 질 때 仁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암튼 관계에 대한 얘기니깐. 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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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8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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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8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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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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