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5회] 현장의 잡일하는 아줌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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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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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현장의 잡일하는 아줌마

 

 

처음 목공소에서 독립한 즈음 여덟 평 남짓의 식당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돈은 많지 않지만 멋진 걸 하고 싶다는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난 예산을 맞추겠다며 세 달여의 시간 동안 아등바등 혼자서 가구를 만들고, 페인트를 칠하고, 조명을 설치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일을 한다고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공간을 만드는 일에는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숙달된 노동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전기, 수도배관, 주방설비, 미장, 페인트 칠, 타일, 금속…. 나 혼자서는 평생을 해도 다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현장부터는 다양한 공정을 함께 만들어 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 공정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으면, 이 사람을 통해 다른 공정의 전문가를 소개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혼자서 일을 할 수 없듯이 각 공정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조건이라서, 여기엔 일종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나에겐 마치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해 갈 즈음, 그러니까 네트워크에서 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일을 ‘물어오는’ 사람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할 즈음부터 나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이 네트워크에는 여성이 없을까?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주로 장비를 다루지 않아도 되는 페인트나 타일, 미장 등의 공정에 한정적이었고, 그나마도 이른바 ‘대모도’나 ‘시다’라고 불리는, 숙련공의 일을 돕는 조공이나 잔심부름을 맡아서 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현장에 작업자가 10명이라면, 이 중 여성은 1명이 될까 말까였다.

 

여성 오야가 없는 이유

 

왜 여성이 없을까?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몇 가지 편견들이 아주 강하게 작용한다. 여자는 힘쓰는 일을 못해. 여자는 위험한 일을 못해…. 이런 편견들은 특히 이 업계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리고 이 굳건한 남성들의 네트워크는 그러한 편견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화한다.

 

단적으로 건축회사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건설 직종별 단가표(이것은 대외적으로 공개된 공식 문서다!)의 첫 번째 항목은 ‘일반공(잡부)’이다. 여기엔 2017년 기준 ‘남성 120,000원/ 여성 110,000원’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실제 내 경험으로도 현장에서 인건비를 책정할 때에 페인트 기준 남성은 220,000원, 여성은 싸게는 180,000원까지 낮게 받는다. 인건비가 더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그들을 더 많이 쓰지 않는 것은, 이 네트워크가 ‘오야(작업반장)’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작업자 개인들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반장들로 구성되어있다. 작업반장들의 역할은 일을 배분하고, 적당한 위치에 사람을 배치하고, 예산을 관리하고, 공사가 끝난 뒤에 하자가 생기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가 물으면 대부분이 남성인 ‘오야’들은 “여성들이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라고들 말한다. 여성 작업자들은 이 네트워크를 통해 일을 하지만, 이 네트워크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현장에 사후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러 오는 것은 여성 작업자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모를 여성 작업자들이 공사 후 계절이 바뀌며 페인트가 떨어진다거나, 실리콘이 수축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면 등장한다.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나고 문제가 생겨서 페인트 반장님에게 전화를 하면 반장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잡일이지? 아줌마 하나 보낼게.” 차별이라는 것은, 분명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문제일 거다. 성별분업, 감정노동, 임금격차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낄 때, 그건 아주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힘으로 이 공고한 네트워크를 부수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순 없겠으나, 최소한 내 현장에서 이 불편한 두 단어만큼은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잡일’, 그리고 ‘아줌마’

 

현장에 잡일은 없다

 

현장에는 공사 이후에도 그렇지만, 공사 중에도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이들 여성들은 때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사이기도하다.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는 일, 공구를 정리하고 다음 작업을 위한 밑 작업을 하는 일…여성이 없다면 작업팀의 막내가 인상 찌푸려가며 도맡아 하는 이런 일들은 사실 현장의 흐름을 좌우한다. 감정을 돌보고 작업 외적으로 필요한 것은 없는지를 챙기는 일. 가끔 서로 다른 공정의 작업자들 사이에 기 싸움이 벌어지거나, 자신의 공정에서 더 빠르고 쉽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공정 간에 이견과 갈등이 생길 때(정말 많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를 조율하고 감정을 보살피는 일은 현장을 책임지는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감정이 상한 당사자를 파악하는 이른바 ‘아줌마’들은 다양한 각도와 방식으로 이들을 달래고 어른다. 이건 하루하루가 비용인 공사 현장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하고 있는 이른바 ‘잡일’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잡스러운, 혹은 잡다한 일이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현장에서의 ‘효율’들은 여성들의 신체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편견에 맞서 발명한 장비들, 예컨대 페인트 고소작업을 사다리나 우마에 오르지 않고서도 하기 위해 만든 길이 조절이 가능한 알루미늄 폴대(가볍기까지 하다),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아 허리를 덜 굽히고도 미장을 할 수 있도록 손잡이를 길게 늘인 미장 칼…. 이들은 도구를 발명하고, 그러한 도구를 통해 새로운 요령들을 만든다. 이 요령들은 정말 기상천외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을 한다(실제로 여성들을 위한 작업 공구를 파는 인터넷 쇼핑몰엔 온갖 효율적인 공구들이 넘쳐난다). 내가 도구들과 요령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가 사다리를 못 타서…”라고 부끄러워 하지만, 사실은 작업을 위해 괜히 무거운 사다리를 이고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비해 위험을 감수하고, 힘을 쓰고, 고집을 부리는 남성 작업자들은,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위험을 감수했는지, 얼마나 힘이 세고 ‘쪼’가 있는 사람인지를 자랑하는 남성들은, 때로 바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잡일’이라는 말이 이러한 일들의 우선순위와 가치를 숨긴다. 레베카 솔닛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레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우리가 이를 더 이상 ‘잡일’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현장은 분명 많은 것들이 바뀔 테다.

 

그들은 아줌마가 아니다

 

김경배 사장님은 내가 일을 시작한 초기에 만난 여성 페인트 공이다. 김 사장님은 당신 막내아들이 나와 동갑이라며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셨다. 일을 시작한지는 40년이 넘었고, 처음엔 페인트 가게를 하는 남편을 따라 일을 다니다가 남편은 몸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일을 못하고, 혼자서 일을 하러 다니신다. 40년이면, 일을 잘하냐 못하냐 같은 질문은 사실 쓸데가 없다. 사다리와 우마는 ‘남자의 일’이라며 피하시지만,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가 있을 때는 아무 말 없이 한 손엔 붓을, 다른 손엔 페인트 깡통을 들고 능숙하게 사다리에 올라 칠을 하는 그를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전시장에 놓일 아주 많은 양의 가구를 칠 할 일이 있었는데, 기존에 섭외를 했던 페인트 ‘오야’ 박 반장님과 이야기 되었던 것보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칠해야 할 가구의 양이 늘어났다.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야 하는 박 반장님은 함께 일을 하러온 김경배 사장님에게 뒷일을 주고, “아줌마가 잘 마무리 해주실 거”라며 현장을 떠났다. 혼자서 할 일이 아닌데 급하게 사람을 섭외 할 수 없어 이틀에 걸쳐 내가 김 사장님과 붓을 쥐고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친해졌다. 둘째 날 저녁 아무래도 예정된 시간에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 사장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밤늦게까지 일을 도왔다. 밤늦게 현장에 불을 밝히는 것은 휴일이 없고 야간작업만 허용되는, 백화점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실장, 이거 못 끝내면 어쩔 거야. 돈도 못 벌고 사람도 잃는 거지. 내가 그냥 가면 실장 그러라고 두는 거지” 김 사장님은 나와 클라이언트 관계의 신뢰를 걱정했고, 그것이 본인의 신뢰와도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남성 오야들이 술 먹을 때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신뢰를, 난 김 사장님과 그날 저녁 보낸 시간을 통해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쩐지 나와 함께 신뢰를 가지고 일하는 동료를 ‘아줌마’라고 부른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내가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김 사장님도, 현장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심지어 식사시간에 다른 페인트공이 김경배 사장님을 ‘김 사장~’하며 불렀는데, 모두가 웃었고, 김 사장님은 창피한 얼굴을 했다. 이건 그 날 오전 내가 김경배라는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부른 것을 농 삼는 것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흔한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사장님’, ‘반장님’이라는 호칭은 현장에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표하며, 공적으로 한 사람을 명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공적인 명명이 농거리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레베카 솔닛이 말하는 ‘해방’,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최소한의 존중의 대상도 못 된다는 식이다. 이 어려움이 그들을 ‘아줌마’로 만든다.

 

 

근데 김 실장!

 

“근데 김 실장, 뭐라고 부르는 게 뭐가 중요해~ 내 나이면 할머니라고 안 부르는 게 다행이지 안 그래?” 언젠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페인트 팀 막내가 김 사장님을 “아줌마~”하며 부르는 것을 듣고 내가 김 사장님에게 씩씩거리자 김 사장님이 여유롭게 웃으며 던진 말이다. 솔닛의 말처럼 명명은 분명 해방의 첫 단계지만, 명명이 관계의 전부를 이야기한다고 미리 판단해 버리는 것 역시 곤란하다. 몇 마디 말에 분노하고 과민하게 반응하기보다, 김 사장님이 보여준 것과 같은 신뢰를 다른 작업자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우리 현장에 더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내 ‘쪼’로, 그들을 깎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댓글 12
  • 2021-02-05 09:15

    나도 아줌마라 이 글이 참 좋다^^

  • 2021-02-05 10:00

    술술 읽히는 글이네요 ㅋㅋ
    아침부터 상쾌해집니다

    김실장님!

    • 2021-02-05 13:45

      감사합니다 노사장님

  • 2021-02-05 10:03

    파지사유 리모델링이 진행중이던 어느날 '버럭 반장님'을 만났다.
    목공작업을 하고 있는 그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지원이에게 '버럭 반장님?'이라고 물었다.
    그저 글에서 읽었을 뿐인데도 잘 아는 분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언젠가 김경배사장님이 월든 앞에서 햇살을 받으며 가구에 칠하는 것을 흘낏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나도 그저 '아줌마'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것 같다. 이 뿌리깊은 통념이라니!
    그 작고 여리여리한 뒷모습에 이런 내공이 숨어 있을 줄이야!
    게다가 나보다 10살 이상 더 연배가 높은데도 짱짱한 현역이라니!
    내가 좀 더 부지런했으면 이번 파지사유 리모델링 중에 40년 베테랑 칠 장인 김경배님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 2021-02-05 13:48

      아쉽게도 김사장님은 너무 바쁘셔서, 이번 현장엔 김경배 사장님 친구분이 오셨어요. 물론 연배와 실력은 용호상박!
      버럭반장님을 옆에 두고 요사장님이 '버럭반장님?' 물어보셨을 땐 식겁했습니다. 혹시 또 버럭 하실까봐. ㅎ

  • 2021-02-05 11:10

    '김경배 사장님'을 부르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김지원 실장님의 글이 참 따뜻하고 힘차네요. 그리고 명명이 관계를 전부를 이야기하지 않기에 스스로의 '쪼'를 살피는 데서는 저도 돌이켜집니다. 제 '쪼'를 요즘 괴롭게 보고 있는 중이라서요. ^^ 저도 겸경배 사장님을 뵙고 싶네요.

    • 2021-02-05 17:31

      누구나 '쪼'가 있죠! 임마누엘 칸트 선생님께선 일찍이 인간성이란 뒤틀린 재목(쪼)에서는 올곧은 일이 이룩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답니다. 일본 호류지가의 목공 장인 니시오카 쓰네카즈는 그런 재목의 성깔(쪼)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잘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도 말했어요. 곰도리 샘도 저도 괴롭게, 그치만 즐겁게! 쪼를 잘 다루어 보아요.

  • 2021-02-05 12:19

    명명과 신뢰 사이에서 고민하는 김실장!
    우린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2021-02-05 17:34

      네 둥사장님도 제가 일 안하려고 한다는 편견과 일을 잘 한다는 신뢰 사이에 계시죠💕

  • 2021-02-05 23:18

    잡일이 늘 잡일이 되진 않지요... 잡일이 없으면 마감이 안되니, 그 순간은 더 이상 잡일이 아닌 게 되는 거죠.
    잡일도 움직이는 거네요...더 이상 명명도 필요없는 거 아닌가 ???
    아니, 잡일은 양으로 말하는 건가요 ? 무게로 말하는 걸까요 ??
    ㅋ 늘 잡일을 하면서, 그 게 무슨 일인지, 잡일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일인입니다.

  • 2021-02-06 11:48

    요런게 바로 부뤼꼴레르...아닌가요? 우리 건물 청소하시는 아줌마가 끌고다니는 청소도구수레 보셨어요? 기가 막힙니다. 일을 하는 요령과 일의 가치를 스스로 추구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르는 '꾼'의 경지...어쨌든 자신의 일 속에서 잡일하는 아줌마를 발견해낸 김실장의 글을 읽다보니 공연히 뭉클해지는 이 감정은 뭘까요? 그리고...김실장은 아줌마랑 쉽게 친해지는 뭔가가 있어...ㅎㅎ

  • 2021-02-10 10:48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 글이라는 막연한 소감 밖에 못달다니!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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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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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2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4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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