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4회] 마찰과 저항을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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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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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마찰과 저항을 마주하기

 

 

목공을 시작한 이래로 ‘내가 목공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 할 만 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목공 도구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특정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물론 그것과 관련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 노하우를 익히는 것을 포함하겠지만, 요즘처럼 충분히 정보화된 세상에서 그런 정보는 접근이 매우 쉬워졌다. 이런 정보의 접근성은 때로 전문가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언젠가 클라이언트와 상담을 하던 도중 그가 느닷없이 가구의 구조와 수축 팽창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상담 전 이미 원목 가구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많은 것들을 찾아본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못지않게 클라이언트가 알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내가 더 이상 이 관계에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그의 우위에 설 수 없음을 뜻한다.

 

다만 실제로 만드는 일, 그 중에서도 도구를 다루어 그가 생각하고, 실제로 구현하지는 못하는 그런 일에 있어서는 여전히 내가 그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구를 다루는 일은 정보를 찾는 일에 비하여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것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머리카락 두께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어떤 도구를 활용해야할지, 이 도구를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는지, 그것 또한 물론 ‘정보’에 속하지만, 그것은 영상을 한 번 본다고 해서 곧바로 따라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대패를 예로 들어보자. 대패는 목공 도구 중에서도 악명 높은 도구로, 목수들 사이에 ‘대패를 쓰는 일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많이 든다’는 말이 있다. 대패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기술이 필요한데, 하나는 날을 가는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날을 쓰는 기술이다.

 

이 두 가지 일은 언제나 연동되어 있다. 준비되지 않은 날은 아무리 좋은 쓰는 기술도 의미 없게 만들고, 쓰는 기술이 없으면 그는 목수가 아니라 오히려 칼갈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기술 모두 반복을 통해서 ‘감’을 익혀야 하는 종류의 것이라는 데 있다. 갈 때는 일정한 각도에 맞추어 속도와 힘을 조절하며 갈고, 쓸 때는 날의 두께와 속도, 힘을 고려해 사용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말이나 글로 잘 설명이 안 된다. 날 가르쳐 주신 목수님도 나에게 대패를 사용할 때 날을 ‘머리카락 두께 만큼 빼라’고 말씀해주셨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머리카락 두께라니, 대팻날을 쳐올리면서 한쪽 눈을 감고 날을 올렸다 내렸다 하자면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이 머리카락 두께를 맞추고 대패를 당길 때 대패가 제 역할을 하려면, 그 전에 날이 충분히 날카롭게 갈려 있어야 한다. 우리의 버럭 반장님은 매번 대패를 사용하기 전마다 대패를 꺼내서 간다. 대패를 현장에서 갈기 위해 페트병을 개조해 만든 ‘숫돌 함’도 가지고 계신다. 버럭 반장님은 날을 갈며 늘 중얼중얼 거리시는데, ‘요즘 목수들은 날 갈 줄을 모르지…’하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곤 나를 쳐다보며 “한 번을 제대로 쓰려면 매일 한 시간씩 날을 갈아줘야 해!”라고 비장하게 말한다. 마치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단 한 번의 칼부림을 위해 평생 동안 칼을 가는 아들의 눈빛이다.

 

 

시간과 돈

 

내가 대패를 쓰는 감을 알게 된 것은 목수 일을 한지 3년이나 되었을 때다. 그러나 여전히 날을 가는 데에는 서툴다. 대팻날을 못 갈면 목수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목수라면 매일 대팻날을 갈아야한다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시간을 들일 여유가 이제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정보화를 포함한 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노력의 절대량마저 단축시킨다.

 

최근 들어 보급형 CNC가 많이 생산되며 목재 뿐 아니라 플라스틱, 유리, 철재 등 다양한 재료를 컴퓨터로 입력한 도면에 따라 재단해주는 비용이 엄청나게 싸졌다. CNC는 드릴 날이 공중에 설치된 X, Y축을 따라 움직이며 부재를 재단한다. 큰 가구공장들은 더 이상 최소 숙련 기술자 1인을 함께 고용해야 하는 거대한 원형 톱을 사용하지 않는다. 간단한 프로그램만 다룰 줄 알면 누구나 CNC를 조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인건비 뿐 아니라 재료비를 감축하는 효과도 크다. 기존의 원형 톱은 부재를 한 번 재단할 때 끝까지 잘라야 하지만, CNC는 그러한 제약 없이 원하는 부위를 원하는 크기로 재단할 수 있다. 나 또한 독립 후 목재를 직접 재단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제는 대패를 가는 시간에 도면 한 장이라도 더 치는 것이 돈을 번다.

 

가구를 만들거나 인테리어에 필요한 하드웨어를 구매하기 위해 큰 철물점에 가면 한쪽 코너에 주루룩 대패가 걸려있다. 버럭 반장님에 따르면 옛날과는 다른 풍경이다. 대패는 한 번 사면 평생을 갈고 다듬으며 쓰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수요가 없었다. 이렇게 대패가 많이 걸려 있는 것은 요즘 목수들이 대패를 가는 시간에 새 대패를 사고 버리기 때문이다. 대패 가격은 충분히 낮아졌고, 목수들은 늘 시간에 쫓긴다. 기술이 돈과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 돈과 시간이 기술을 강요한다.

 

마찰과 저항

 

그러나 이것이 꼭 나쁜 일일까? 대패를 가는 목수는 분명 구시대의 산물이다. 때로 이런 특별한 기술들은 전문가의 불평등한, 혹은 불친절한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오늘날 전문가는 특별한 노하우를 가진 장인이 아니며, 일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불평등의 경험을 최소화하며 원한다면 누구나 기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도구와 기술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관심이 많은 철학자 리처드 세넷은 그의 책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것에 있는 악마는 ‘사용자 친화적’ 테크놀로지라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열정을 앗아간다.” 사용하는 사람에게 마찰과 저항을 최소화 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기술, 사용자 친화성은 사용자들에게 정신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한다. “마찰 없음을 지향하는 사조는 복잡한 장소의 특정한 사항들에 집중하는 초점 관심을 사소한 수준에서도 유보한다. 예컨대, 찾아가기 힘든 곳에 있는 어떤 지역 카페에 굳이 가지 않고 그냥 스타벅스에 들어가는 식이다. 더 심각한 예를 들자면, 마찰 없음은 흑인이나 무슬림 같은 타자의 전형성만 알아본다. 그 전형성에 맞지 않는 흑인 남자나 무슬림 여성의 특수성을 식별하려면 감정적 노동뿐 아니라 정신적 노동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버튼을 누르면 켜지고, 또 한 번 버튼을 누르면 저절로 무언가 완성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편리한 기술은 우리 삶을 점점 더 매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매끄러운 세상에 익숙해진 우리는 낯설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났을 때 그것을 들여다보기보다 눈을 감고 그것을 해결해줄만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기다린다. 쉽고 편리해진만큼 더 잘 알게 된 것 같지만, 실상 우리는 버튼을 누르는 행위 외에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질문들

 

오류가 없는 매끄러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면, 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더욱 더 우리를 생각하지 않는 동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기술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기술의 도구가 된다.

 

생각해보면 대패를 갈고, 나무를 깎는 일은 그 자체로 마찰과 저항에 직접 부딪히는 일이다. 세상에 같은 결을 가진 나무는 없으며, 같은 강도를 가진 대팻날도, 숫돌도 없다. 오늘날의 결을 갈아 없애버린 나무 조각들과 간단하게 컴퓨터에 입력만 하면 금세 출력이 되는 기술의 입장에서 이것은 언제나 예외적 상황이다. 세넷은 사용자 친화성이 “열정을 앗아간다.”고 덧붙였다. 열정? 나는 그의 문맥을 살필 때 열정을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같지 않은 결이 대팻날에 ‘턱’ 하고 걸릴 때, 우리는 질문을 가진다. ‘왜 걸릴까?’ 그 답을 찾아가는 매 과정이 우리를 더 많은 경우에서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해결할 능력을 준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지 않은 세상, 단순한 입력=출력의 세상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면 우리는 그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한 채 죽는다. 자본은 이러한 조건을 창출한 뒤, 인공호흡기를 달아주고 목숨 값을 흥정한다. 이때 도구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돕지 않는다.

 

모두가 대패를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처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대패는 언제나 오류를 마주하고, 오류는 우리에게 질문하도록 한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마찰과 저항을 마주하는 질문들만이 기술을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로, 우리를 우리 삶의 주체로 만들 것이다.

댓글 7
  • 2020-11-12 13:12

    대패를 보니 몟날에 농방에서 아재들이 대패 갈던 생각이 나네요 그 대패로 거친나무를 밀면 파마머리처럼 몽글몽글하고 빛나는 종이처럼 얇은 나무... 그걸 한아름 갖고 놀았어요.
    저는 철물점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문방구를 좋아하는 것 처럼요.
    철물점에는 기계가 아닌 도구들이 많이 있지요
    어떤때 필요한 물건인지 호기심 만땅이지요.
    잘읽었습니다

    • 2020-11-15 13:57

      감사합니다?

  • 2020-11-13 13:39

    맞아요. 터럭 걸렸을 때 질문하게 돼요. 왜 걸렸지? 어떻게 하지?
    세넷의 열정을 질문으로 지원이가 바꿔 읽은 게 이 글의 신의 한수인 듯^^

    • 2020-11-15 13:58

      세넷 책 너무 좋아요. 목공인문학의 교과서!!

  • 2020-11-13 13:56

    우리집 부엌칼을 갈 때가 되었는데 미뤄두다가 이 글 읽은 기념으로 마트 가서 칼 가는 거 하나 사야겠어요!

    • 2020-11-13 17:54

      갑자기 切蹉琢磨 가 떠오르네요. ㅋㅋ

    • 2020-11-15 14:01

      저도 글쓰고 오랜만에 대팻날을 갈아보았답니다. 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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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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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8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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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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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6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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