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3회] 얽거나 짜서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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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12:03
620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얽거나 짜서 만드는 방법

 

개인들을 이런저런 속성이 부착되는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는 원자론적 인간관은

개인적 정체성들과 여러 능력들 그 자체가

여러 가지 점에서 사회적 과정들과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목공 반장님이 타카 핀을 갈아 끼우다가 집어던지면서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이 형, 그렇게 성격대로 할 거면 여기 왜 왔어! 그럴 거면 직접 일 받아 해!”

 

‘이 형’이라는 분도 성격이 만만찮다. “어 알았다 그래!” 하고선 작업벨트를 풀어놓고 현장에서 ‘휙’하고 나가버린다.

 

당황한 내가 이 형을 따라 나가려는데 반장님이 나한테도 버럭 한다. “김 실장! 내버려 둬. 내가 혼자 끝내면 되니까 가는 사람 잡지 마!” 고래 싸움에 기가 눌린 새우 실장은 현장을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혹여 등이 터질까 잠자코 반장님 말을 듣는다.

 

버럭 반장님

 

지난 3년 동안 함께▲버럭 반장님의 몰딩 일하던 목공 반장님이 최근 많이 바빠져서 이번 현장을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 나는 주변 작업자 분들에게 수소문해 새로운 목공 반장님을 소개받았다. 최근에서야 함께 일을 하게 된 이 ‘버럭 반장님’은 보기 드문 목수다. 한옥으로 시작해 가구공장에서도 오랜 기간 일했고, 목공으로 할 수 있는 갖은 일들은 두루 해본 분이다. 나이가 많고 말씀이 많아 처음 만났을 땐 조금 걱정을 했다. ‘속도가 느리진 않을까’, ‘꼼꼼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실력을 확인한 건 바 테이블bar table의 마감몰딩을 만들 때였다.

 

합판으로 만든 테이블의 상판은 절단면이 거칠다. 그래서 절단면을 가리기 위해 원목으로 몰딩을 붙이는데, 나는 이왕 붙일 몰딩에 멋을 좀 부리고 싶었다. 반원 형태로 몰딩을 붙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함께 일했던 목공 반장님은 이런 몰딩을 공장에 주문하고 현장에선 재단과 결합만 했으므로, 난 당연히 주문을 할 채비를 했다. 그런데 옆에서 뭔가 뚝딱뚝딱 하던 버럭 반장님이 나에게 반원 몰딩 샘플을 가지고 왔다. “김 실장, 이거면 되지?” 현장에 있는 톱과 대패만 가지고 금세 몰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몰딩과 몰딩이 이어지는 부분에는 제비촉을 파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을 주셨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냐는 내 걱정에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거 못하면 그게 목수야?”한다. 내가 놀랐던 것은 이런 얄궂은 디테일들을 챙기면서도 목공작업이 내가 생각했던 공기보다 하루가 빨리 끝났다는 것이다. 목수님은 정말 몰딩도, 제비촉도, 이 형의 이탈에 대해서도 깔끔하게 약속을 지켰다. 나는 이 형과 반장님 사이의 일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라 쓰는 게 아니고 고쳐 쓰는 것

 

반장님이 이 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와의 두 번째 일에서였다. 첫 현장에서 반장님이 만드는 제비촉을 눈여겨보았던 나는 가구에 그것을 적용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주문받은 가구에 그것을 실현할 기회가 오자마자 반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장님은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며 실력을 괜히 보여줬다고 투덜거렸지만, 막상 도면을 볼 때는 “김 실장이 그림 그릴 줄 안다”며 싱글벙글했다.

이 형과 함께 일 할 때와 달리 반장님은 새로 온 보조 목수 김 형에게 자잘한 잡일들을 많이 시켰다. 청소를 시키고, 공구를 찾아오라고 하고, 비교적 간단한 목공만을 맡겼다. 난 혹시 그 날의 버럭 때문에 이 형이 아닌 다른 분을 보조로 구해 오셨나 싶어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김 실장, 그럴 리가 있나. 그날 일 끝나고 이 형이랑은 소주 여러 병 했지.”

 

목수님이 김 형을 데려온 것은 일의 성격 때문이었다. 자신이 디테일을 챙기는 동안 진도가 나가야 하는 현장에서는 성격이 세더라도 일을 빠르게 밀고 나갈 이 형과 같은 보조가 필요하다. 현장에서 제비촉을 가능케 했던 것은 사실 이 형의 작업 속도였다. 반장님이 몰딩을 깎고 까다로운 제비촉을 파고 만드는 동안, 빠르게 세워져야 할 벽이나 테이블, 선반과 같은 큼직한 일들을 옆에서 이 형이 차례차례 해결해 나갔다. 반장님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김 실장, 전문가가 왜 이래? 내가 할 일만 딱 남았으니까 이 형한테 맘 놓고 성질부리지, 내가 다 못할 것 같았으면 쥐 죽은 듯이 있어야지!” 아차. 그러고 보면 이 형이 현장을 이탈한 뒤 남은 일은 반장님이 전담하던 제비촉 결합과 현장 정리가 전부였다.

 

반면 가구는 반장님이 온전히 가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옆에서 묵묵히 도와줄 사람이 더 적합하다. 뭔가 하나 제시 할 때마다 한 마디씩 보탰던 이 형과 달리 김 형은 정말 아무 말도 없이 일을 했다. 그래도 버럭 반장님에게 중간 중간 혼나긴 했다. “이런 경우엔 나사를 빗겨 박아라, 여기엔 본드를 넣으면 안 된다, 이때는 사포가 아니라 대패로 다듬어라….” 얼핏 보기엔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김 형 역시 딱 봐도 오랫동안 목수 일을 해온 분 같은데, 어떨 땐 좀 너무한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이렇게 혼을 내시냐는 질문에 버럭 반장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 실장, 사람은 골라 쓰는 게 아니라 고쳐 쓰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반대로 말하지 않나?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라고….

 

우리는 점점 더 골라 쓴다

 

전통 결구법 중, ‘방두산지 장부맞춤’이라 불리는 결구법이 있다. ‘장부맞춤’이란 한쪽 나무에는 홈을 파고, 다른 한쪽 나무에는 촉을 파서 서로 끼워 넣는 맞춤의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나무의 수축을 고려하면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홈은 결과적으로 커지고, 촉은 점점 더 작아진다. 그래서 본드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흔히 볼 수 있듯 오래 사용한 가구는 삐걱대다가 약한 부위에서 부러지거나 빠져버린다. 따라서 원목 가구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이런 관리를 비교적 간편하게 만드는 결구법이 ‘방두산지’, ‘메뚜기 장부’라고 불리는 것이다. 한쪽 나무는 홈을 관통시키고, 반대쪽 나무에는 촉을 길게 빼서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그 구멍을 관통하는 사다리꼴 모양의 촉을 끼워 넣어 망치로 두들기면 홈에 촉이 단단히 들어간다. 나무의 수축이 진행되어 홈은 커지고 촉은 작아지면 마지막에 끼워 넣은 촉을 망치로 두들겨 홈과 촉 사이에 벌어진 틈을 당겨준다.

 

이런 전통 결구법들은 모두 나무의 자연스러운 변화들, 각각의 나무가 가진 성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이 변화를 겪을 것이고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임을 전제로 한다. 억제하지 않으며, 다만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에게 의존함으로써 구조를 유지한다. 여기엔 완성 혹은 완결이 없다.

 

 

본드를 잔뜩 칠하고 나사와 타카를 이용해 만든 가구들은 문제가 생기면 고쳐 쓰기가 쉽지 않다. 나무의 변화하는 성질이 아니라 완성된 물건의 형태를 기준으로, 물건은 고정된 실체라는 관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결된 형태에서 변화가 생기면, 바로잡을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변화하는 것, 각각의 성질들은 가구의 결함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골라 쓴다. 문제가 생기면 완성된 새로운 물건을 고를 뿐이다. 물건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잘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한다.

 

얽거나 짜는 방법

 

우린 사회가 얼마나 똑같은 사람들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하는지를. “사람은 골라 쓰는 게 아니라 고쳐 쓰는 거”라는 반장님의 이 말은 내 입맛에 맞게 고쳐 쓴다는 사용자의 입장과는 다르다. 그러한 입장은 언제든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사람)이 시장에 충분히 있고, 나는 그에 대한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반장님이 “바쁘지 않으면 좀 들르라”고 해서 간 곳은 진돗개 두 마리가 있는 100평 남짓의 작은 고구마 밭이었다. 입구에 떡하니 넓은 평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한쪽엔 공사가 끝나고 남은 목재가 쌓여있고, 다른 한쪽엔 다 마신 막걸리 병이 쌓여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다 먹어야 한다며 잘 익은 호박고구마를 큼직한 봉지에 담아주신다. 이곳은 일이 없는 주말 목공 팀이 다 같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목공 팀을 단순히 고용관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무언가가 여기에 있다. 이 밭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반장님을 고용한 나도, 마냥 사용자가 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이들은 삶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방두산지 가구의 만듦새를 떠올린다. 독자성이 아닌 상호의존성을 기본으로 한다. 각자가 가진 성질이 살아 움직일 만한 곳에 적절히 위치시키고 서로 의존함으로써 집단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 이렇게 보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부재들을 본드로 뭉게 타카로 찍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문제가 쌓인다.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능력. 상대방을 세심이 주시하지 않으면 갖출 수 없는 능력이다.

 

반장님이 이 형에게 소리를 버럭 지른 때, 이 형은 반장님이 제안한 방법을 거부하고 본인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형이 제안한 방법도 일리가 있었지만, 반장님은 며칠 뒤 다른 현장을 또 이 형과 들어가야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때론 맞는 말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기세가 꺾여야 하는 때가 있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게 될 현장에서 모두가 옳은 말 맞는 말을 하면, 현장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엔 세심한 조율이 있다. 반장님에 따르면 “이 형은 성깔이 더러워서 손이 빠른 거”기 때문에, 그의 성정을 완전히 막아선 안 된다. 그렇다면 김 형은? 반장님에 따르면 그는 자기 의견보다는 시킨바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다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보다는 해왔던 방식으로 일하기를 좋아한다. 해왔던 방식들과는 맞지 않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극해 다양한 경우에서 유연한 목수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고쳐 쓴다는 것, 아마도 이것은 장부맞춤의 사전적 정의인 ‘함께 얽히고 짜는’ 것의 다른 말일 것이다. 각각의 성질이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에 기반 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다른 것들이 엮여 존재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조건이다. 이때 골라 쓰는 것은 선택지에 있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렇게 세심하고 역량이 뛰어나신 버럭 반장님이 정치에 있어서 빨간 당을 지지하는 건 어째서일까? 뭐 반장님도 고정불변의 실체는 아니니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댓글 3
  • 2020-10-14 12:49

    현장에 같이 있는 것 같아 재미있네요.

  • 2020-10-14 17:04

    골라 쓰는 세상...무서워요.
    고쳐 쓰는 식으로 가야 할 텐데...
    골라 먹는 재미만 광고를 하니...

  • 2020-10-16 22:00

    음. 멋진 반장님이닷! 일 중심인 듯도 하고 사람 중심인 듯도 하고^^
    저도 20대 직장생활할 때는 동료들과 "성격이 더러운 건 참아도 일 못하는 건 못참는다"고 말할 정도로 청춘이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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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46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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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4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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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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