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1회] 프롤로그 :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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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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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프롤로그 :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니고아니고.

 

나는 보통 다음 두 문장 중 하나로 나를 소개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입니다.”

 

“가구를 만들며, 인문학을 공부합니다.”

 

이 문장들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아, 목공으로 밥벌이를 하고, [조금 진지한] 취미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편으로 이 두 가지 활동이 하나는 몸을 쓰는 일, 다른 하나는 머리를 쓰는 일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일과 여가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나에겐 그렇지가 않다. 우선 나는 함께 인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과 ‘길드다’라는 인문학 스타트업을 만들어, 적은 돈이긴 해도 본격적으로 인문학 세미나와 강의를 진행하며 돈을 번다. 그것을 준비하는 시간은 가구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고되고 지난하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수업이나 글쓰기 준비를 위해 주문 건을 줄이거나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목공도 때때로 그 즐거움에 비춰볼 때 밥벌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인문학 공부가 밥벌이이고 목공이 취미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처럼 상식적인 궁금증들에 나는 조금 소심한 목소리로 “그건 아니고….”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공자도 아니고, 목수가 직업인 것만도 아니고, 공부가 취미도 아니고, 아니고…아니고…. “그럼 집에 돈이 많은 거야?”…그건 진짜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빚게 만들면서도 내가 굳이 목공과 인문학을 붙여서 말하는 이유는, 나에게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설명을 더한다.

 

나무를 다룬다는 것

 

내가 처음 목공소에 취직했을 때, 첫 한 달간 했던 일은 자투리 나무로 만든 냄비받침을 칠하는 일이었다. 나를 고용한 목수님이 나를 교육하기 위해 냄비받침을 만들어 두셨던 건지, 일이 없어서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백 개 정도 되는 손바닥만 한 냄비받침을 하루는 오일을 칠하고, 마르면 다음 하루는 사포질 했다. 지루할 법한 일이 재미있었던 것은 하루하루 칠을 먹어 변화하는 나무의 색깔과 감촉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목재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건조된 상태에서 제작에 사용된다. 때문에 목공소에서 처음에 받는 목재는 건조된 생선이나 건조한 겨울에 일어나는 우리 피부처럼 희끗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 희끗하고 냉랭한 색깔 위에 오일을 펴 바르면 나무는 살아있을 때의 따뜻한 색깔을 회복한다. 반듯하게 대패질 되었던 건조목은 다시 생기를 머금으며 놀라기라도 한 듯 그 원래의 결이 우둘투둘 일어난다. 칠이 마르면 사포는 모래알이 굵은 것에서부터 고운 것으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모래알이 굵은 것으로 일어난 결을 정리하고, 고운 것으로는 칠이 된 나무의 표면에 점점 더 작은 스크래치를 내며 여전히 칠이 붙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결이 정리되고, 작은 스크래치들에 촘촘하게 칠이 들어가면 비로소 취약하고 거칠던 표면은 단단하고 부드러워진다.

 

나무는 수축팽창을 거듭한다. 휘어지고, 갈라지고, 곰팡이가 피고, 벌레가 생기고, 썩는다. 정성스런 칠은 [이어질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단순히 색깔, 감촉의 개선을 넘어서 이런 나무의 변화들을 억제하거나 완화해 인간이 사용하는 데에 무리가 없도록 한다. 그것을 완전히 제어할 도리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와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천 원짜리 냄비받침치고는 꽤 과도한 정성이 들어갔다. 그러나 수지타산과 상관없이 이 작은 경험은 나에게 목공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수많은 가구들이, 하물며 냄비받침과 같은 하찮은 물건들이 이렇게 지난한 공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작은 물건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나무의 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무엇보다 목공은 다른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

 

난 군대에서 난생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 거다. 그런데 그 짧은 우연이 책을 읽는 일이 주는 기쁨을 알게 했다. 난 그 길로, 인문학 공동체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공동체에서 처음 접한 인문학 공부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었다. 학창시절 학교수업은 물론 책 한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나에게, 처음에 이 책은 흰색 종이와 검정색 글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 한 문장도 온전히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까.’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세미나에서, 난 조금씩 검은 글씨가 단어로, 그리고 이야기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와 달리 사람들은 책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냈고, 그것을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검은 글씨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우리와 함께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 중엔 현직 교사도 있었다. “푸코가 감옥의 일람표를 예로 들 때, 깜짝 놀랐어요. 내가 학교를 다니며 요구받아왔던 것, 내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내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실은 권력을 정당화 하고, 재생산 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 『감시와 처벌』은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푸코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감시와 처벌의 형식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어떤 종류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그는 오늘 날 우리가 권력이라고 표상하는 것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대기업과 같은 거대권력이 아닌 규율, 일람표와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권력의 작용이 우리의 삶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권력의 분석,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곧 바로 나 자신의 삶과 책을 연결시켰다. 내가 학교에서, 군대에서 행했던 수많은 실천들이 사실은 내가 나쁘다고 믿어왔던 그것과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 군대만 벗어나면 될 거라고, 자유로울 거라고 믿어왔던 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 것이었는지를. 푸코는 17세기 이후 감옥에서의 감시와 처벌[판옵티콘]이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학교, 병원, 군대, 공장을 막론하고 이러한 모델이 전 사회에 적용된다고 말이다. 이는 군대와 소위 군대에서 ‘사회’라고 부르는 바깥세상과의 경계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장소가 아니라, 나 자신의 특정한 실천이 된다. 책을 읽는 일은 이처럼 삶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더 이상 이전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도록 한다.

 

만드는 이가 된다는 것

 

위와 같은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인문학 공부에 목공의 경험들을 녹이고, 가구를 만들며 세상에 대한 고민들을 녹일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리하여 두 활동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하나가 된다.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가구를 소비하는 방식: 싼 가구를 사서 채 몇 년을 안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하게 이루어져도 괜찮은 걸까?’ 혹은 ‘가구 산업이 가구를 만드는 방식: 이를테면 지난한 칠의 과정을 인건비의 문제로 다루며 마감에 화학적인 성분을 섞는 일이 괜찮은가?’ ‘저렴한 목재를 위해 가난한 국가의 숲을 없애는 등의 일들이 과연 신중하게 나무를 고르고, 정성들여 마감하던 과거로부터 차례로 발전한 결과일까?’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공부하고, 또 어떻게 가구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내가 공부를 하면서 좋아하게 된―역사학자, 때로는 페미니스트, 르포 작가, 또 철학자로도 불리는―레베카 솔닛은 그의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드는 이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일, 그저 물질적 세상뿐 아니라 그 물질적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의 세계, 우리가 희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꿈까지 만드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물질적인 일이라 생각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사실 무언가를 사유하고, 공부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사유와 공부가 부재하는 만들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오직 가격이라는 단일한 가치로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우리가 다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이다. 또한 우리가 [물질적이지 않은] 머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유와 공부도 결국엔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념과 꿈 또한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만들기는 질문이, 질문은 만들기가 된다.

 

이런 그의 정의를 빌려 조금이나마 혼란을 피해보자면, 나는 ‘만드는 이’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것. 우리가 희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꿈까지 만드는 것. 물론, 여전히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여기에서 하게 될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는 내 소개다. 이는 내가 만든, 혹은 만들 것들과, 그것을 통해 내가 만들고자 하는 꿈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도 일단은 이렇게 시작해보겠다.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댓글 9
  • 2020-08-11 10:03

    음... 냄비받침 하나에도 끝나지 않은 나무의 생이 포함되었다는 말이 감동적이네요..
    생이 포함된 물건에 나의 삶이 투영되고 그 나무의 생이 나의 삶에도 투영된다면
    정말 소중한 관계로서 이어져갈 수 있을텐데.
    플라스틱엔 없는 생이 나무에는 있었군요.. 더 구체적으로는 그 냄비받침에는
    만드는 사람과 나무의 삶이 투영되어 있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 2020-08-11 16:51

      꿈틀님 댓글 감사해요. 맞아요. 만드는 사람과 나무의 삶! 한가지 덧붙이자면 그러한 생은 사실 플라스틱에도 있답니다! 다음 글의 주제가 마침 '재료'에 대한 것인데요. 스쳐지나가듯이라도 다루어 볼게요. 쭉~ 관심 가져주세요 😉

    • 2020-08-11 17:12

      저도 그 구절이 좋았는데... 멋진 표현이었어요^^
      앞으로의 연재, 기대!!!

  • 2020-08-12 09:29

    오일을 바르면 살아있을 때의 따뜻한 색을 회복한다는 말이 따뜻하네요.
    나무가 가구가 되면 또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되는 거군요.
    만든다는 일이 그런 점에서 멋지면서도 섣부를 수가 없겠어요.
    저도 인문 목수 지원의 연재 기대할께요~

    • 2020-08-13 23:31

      네 제가 만들어드린 테이블과 함께 살고계신 둥글레님~*

  • 2020-08-12 11:20

    그렇게 열심히 칠했던 냄비 받침대 우리 집에서 여전히 살아 있어요^^

    • 2020-08-13 23:32

      여기저기에 살아 있네요 ?

  • 2020-08-16 12:43

    재미없을 것 같아 안읽다가 저의 경험상 편견을 뛰어 넘으면 의외로 괜찮은 전리품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어 이제야 읽어 보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마도 작업과 공부가 그리고 지원님의 관찰이 내용을 세밀하고도 풍부하게 하는 것 같아요.
    저가 목수의 딸인지라 흥! 그까짓 만드는거 그랬었거든요. ^^
    지금 바꾼 닉네임은 옛날에 엄마를 도와 저의집 목공소에서 알하던 아재들 밥 지어주던 언니 이름이예요.^^

    • 2020-08-17 10:36

      ㅠㅠ. 감사합니다. 제목을 더 구미가 확 당기도록 바꾸어 볼까요?ㅎ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08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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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0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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