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인생극장/8회> 관포지교(管鮑之交), 나의 수많은 포숙들을 기다리며

기린
2020-03-16 00:31
533
  1. 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과 포숙

 

 노(魯)나라 환공이 제(齊)나라를 방문하면서 제 양공의 여동생인 부인을 대동했다. 결혼하기 전부터 연인관계였던 양공과 여동생은 환공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났다. 환공이 그것을 알게 되어 부인에게 화를 냈고 양공은 사람을 시켜 환공을 죽여 버렸다. 양공의 동생들이었던 규와 소백은 형의 이러한 행실 때문에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염려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쳤다. 관중은 둘째 왕자인 규를 모시고 노나라로, 포숙은 소백을 모시고 거나라로 갔다.

 

 

 결국 양공은 자신의 부하였던 무지에게 목숨을 잃었다. 무지가 제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원한이 있던 무리들이 일어나 그를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 규와 소백 가운데 한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왕자는 각각 노나라와 거나라에서 출발했고, 누가 먼저 제 왕실에 도착할 것인지를 두고 각축을 벌였다. 제나라로 향하는 길목에서 소백의 무리를 마주친 관중은 소백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혔다. 소백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관중은 뒤따라오던 규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일행은 느긋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그 시각, 소백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귀국을 재촉하여 먼저 제 왕실에 도착해 왕위를 차지했으니 바로 제 환공이다. 그는 복대에 화살을 맞은 후 죽은 시늉을 하며 관중을 속였던 것이다. 이후 환공은 노나라를 협박해 규 왕자를 처단했고 관중은 제나라로 불러들여 죽이겠다고 호송시켰다. 환공을 모셨던 포숙이 나섰다.

 

-임금께서 제나라를 다스리겠다면 지금의 신하들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뜻이 있다면 관중 없이는 안 됩니다.

 

 환공은 포숙의 의견을 수렴하여 관중을 살려서 대부로 삼았다. 그 후 관중은 제나라를 정비하여 환공을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권자로 만들었다. 환공을 보좌하여 천하의 제후들을 규합하는데 힘썼고 북쪽 오랑캐들을 평정하여 제후국들의 신임을 샀다. 안으로는 바닷가에 위치한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주변 제후국들과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았다. 관중의 이러한 활약으로 제나라는 고대 중국에서 일찌감치 부강한 나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춘추시대 이전에 천하를 차지했던 이들은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요임금과 순이 그랬고 탕왕과 이윤, 주 무왕과 강태공도 있었다. 이들의 협력으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반면, 세가에 실린 환공의 면면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환공을 모셨던 포숙은 관중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여 천하를 차지하고 싶은 환공의 야심도 자극하면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도 구하는 계책을 내기에 이르렀다. 관중은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서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환공을 춘추시대 첫 패자로 만든 두 사람의 협력,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2. 포숙이 없었다면

 

관중이 재상이 되어 제후를 능가하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를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소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사기열전』 25쪽? 김원중 저/ 민음사)

 

 

 만약 내가 친구와 함께 동업을 했는데 친구가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간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일단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부터 들 것이다. 그게 통념이다. 그런데 포숙은 그 통념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관중이 일에 실패하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전쟁에서 도망치는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실패도 하고 전쟁에 나가면 죽을까봐 두려워 도망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이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을 알게 되면 어리석다거나 겁쟁이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포숙은 그렇게 작동하는 통념을 멈추고 다른 측면을 살폈다. 그렇다면 ‘알아준다’는 것은 어떤 국면에서 통념대로 반응하기를 멈추고 또 다른 사정까지 살펴서 행동함이다.

 

 사마천은 관중의 열전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했다고 했다. 포숙은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관중이라는 친구를 사귀어 그에게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공감과 이해는 매뉴얼이 없다. 매순간 묵묵하고도 아슬아슬한 실천만 있을 뿐”(은유, 한겨레신문 <삶의 창> ‘연민과 배려사이’) 이라고 했다. 친구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매순간 일어나는 통념을 넘어 맥락을 살피는 실천이 거듭되었다. 그 실천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관중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포숙의 능력은 친구에게 공감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거듭 실천하는 가운데 터득된 것이다. 관중 역시 그런 포숙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 노련한 관중이 모를 리가.

 

3. 나의 수많은 ‘포숙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외신을 접했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서 최근에는 WHO에서 ‘펜데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사태가 심각해지는 만큼 그에 대응하는 방법도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공동체의 주방을 맡고 있는 나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점점 복잡해졌다.

 

 

 감염자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1년짜리 프로그램인 이문서당 개강은 무리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주방도 잠정적으로 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탁 전체는 닫을 수 없으니 공부하러 나오는 회원들이 알아서 도시락도 싸오고 주방에 있는 재료들로 밥이나 해 먹자고 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가자 점심상에 모이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코로나 확진자 수도 점점 늘어났다. 밥을 함께 먹는 식구들 사이에 감염이 가장 잘 되는 상황이라는데 경계가 느슨해졌다고 할까. 언론을 통해 감염을 막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한다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좀 더 삼가는 행동이 필요하다며 주방을 완전히 닫자는 제안을 했다.

 

 공식적으로 주방을 열지 않는다고 결정했으니 각자의 감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제안은 그 감각을 믿지 못하겠으니 강제적으로 금지하자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반발하는 마음이 들었다. 월요일에 나 혼자서라도 밥상을 차려야겠다는 다짐까지. 그런데 막상 월요일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 다짐이 귀찮아졌다. 친구가 저렇게 염려하는데 그냥 쉬면 또 어때. 결국 나는 그 날 문탁에도 안 나가고 하루 쉬었다.

 나는 삼갔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의견을 듣는 순간 강제한다는 통념부터 떠올랐다. 그 순간을 인식하고 멈추었다면 코로나 정국이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강제라기보다는 심각함을 반영한 대책이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반발했던 마음조차 하룻밤 자고 났더니 바뀌고 말지 않았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공동체 밥상은 차려야한다고 새겨진 나의 ‘통념’이 작동하는 순간 상황의 맥락을 알아채는 능력은 급격히 쫄아 들고 말았다. 포숙-되기가 쉬운 게 아니다.

 

 

 작년 3월 <사기, 인간극장> 첫 글의 주제는 ‘전전긍긍’ 이었다. 공동체 주방을 맡은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주방을 드나드는 친구들의 마음을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고충을 토로하는 글을 썼다. 8회 차에 ‘관포지교’를 주제로 우정에 대해서 쓰겠다고 했더니 첫 글과는 다른 내용을 쓸 수 있겠느냐고 염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피드백이 거듭되는데도 글은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 친구의 말에 반응하는 나를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나의 통념, 즉 공동체 주방과 관련하여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즉각 반발이 일어나면서 다른 맥락을 살피는 힘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 반응은 공동체에서 겪는 많은 국면에서 우정을 쌓는데 걸림돌로 작동한다는 것도.

 

여전히 코로나정국이다. 그래서 주방도 공식적으로 닫혀있다. 공동체 밥상이 안 차려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던 나의 통념도 깨졌다. 동시에 모든 끼니를 공동체 밥상에서 해결했던 최근의 나에게 흉흉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보였다. 그렇게 매 끼니가 차려졌던 것은 공동체 밥상이 꼭 차려져야 한다는 나의 뜻을 ‘알아준’ 수많은 포숙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흉흉한 시간도 결국은 다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의 수많은 포숙들이 돌아올 것이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포근한 봄이 오는 것처럼.

 

 

  • 8회를 끝으로 <사기, 인생극장> 연재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9
  • 2020-03-16 08:23

    자기에게는 포숙이 없다고 한탄한 사마천에겐 없었고 포숙을 기다리는 기린샘에게는 있는 건
    '공동체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연재하시느라 수고하셨어요~~

  • 2020-03-16 09:21

    기린에게 주방은 로도스구나! 자 한 번 뛰어보시오!!

  • 2020-03-16 09:32

    가끔 나에게는 게으르니님이 관중이자 포숙입니다~ 가아끔ㅋㅋ
    마지막 글에서야 댓글 다는 친구, 이런 우정을 가진 친구도 있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다시 만날 글들도 기다릴게요^^

  • 2020-03-16 09:44

    우정은 친구를 끝까지 책임지는거라는데
    친구를 알아주는게 먼저겠네요
    알아주려면 일단 관심과 애정을 그에게로 향하고 그를 잘 들어야할테구요
    물리적인 격리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코로나팬데믹 시절에 친구와 공동체가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기린샘 산고의 고통을 끝낸? 오늘을 맘껏 즐기시오!!!
    매실주 한병 콜? ㅋ

  • 2020-03-16 10:59

    벗을 향한 내마음을 돌아보는 일
    벗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한다는 것은 결국은 다시한번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가다듬는 일이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이듭니다

  • 2020-03-16 16:47

    전 : 전전긍긍이 과연 주방 일 만이랴
    전 : 전속 오지라퍼일수록 전전긍긍이 심해지지
    긍 : 긍정적 마인드? 그건 혼자만 우아한 자의 것!
    긍 : 긍께, 아무나 주방지기 하겠냐고..
    관 : 관심 좀 끊고 우아해 지고 싶어도
    포 : 포숙아들이 손짓발짓하니
    지 : 지대로 내손으로 목줄걸고
    교 : 교차로 없는 길에서 호각부는 오지라퍼 매니저들!

    수고했어요. ? 또 다른 글로 만나는 거죠?

  • 2020-03-17 08:25

    쿵짝 쿵짝~ 난 쌤 옆에서 같이 박자를 맞추다가~
    쿵쿵짝! 하고 가끔씩 삑싸리~내는 포숙일 것 같구만요. ㅎㅎ

    그동안 연재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2020-03-22 08:11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가 새삼 절절히 다가오네요
    통념을 버리고 서로의 리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요즘 새삼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기린 전전긍긍하며 글쓰는 당신이 아름다웠소 ㅋ

  • 2020-04-08 18:59

    저는 포숙되기 를 과제로 삼아야 할것 같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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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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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6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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