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마을경제학 개론 #6] 우리에겐 ‘복’이 있다

뚜버기
2020-02-2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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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6]

우리에겐 '복'이 있다

 

 

  지난 겨울 문탁 축제 때 열린 <대놓고 노래자랑>에 세 청년이 출전하여 1등상을 수상했다. 그때 나는 누구보다 기뻤다. 그 청년들이 자그마치 10만‘복’을 상금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복 상위권을 달리는 그 청년들이 어떻게 복을 벌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마이너스가 줄어든다 생각하니 안도가 되었달까. 게다가 본회계(문탁네트워크는 활동단위마다 자율적으로 회계를 하고 네트워크 전체의 통합적 활동이나 살림에 관한 회계가 별도로 있는데 이를 본회계라 부른다)에 쌓여있던 수십만 복도 사람들 사이로 흘러나온다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복(福)’은 문탁네트워크에서 사용되는 대안화폐다. 처음 작업장을 꾸릴 때 함께 만들어져서 작업장 일꾼 품삯을 줄 때,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참고한 것이 지역화폐 레츠(LETS:Local Exchange & Trading System)다. 작업장의 모태인 마을과 경제 세미나의 탄생계기가 지역화폐 모임이었던 걸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미나를 시작하고 1년이 넘도록 우리는 『증여론』과 『거대한 전환』과 같은 고전텍스트의 매력에 빨려들었다. 그러는 사이 지역화폐는 우리에게 잊혀지는 듯 했다. “이제 지역화폐는 물건너 갔나보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작업장을 만들고 ‘복’이라는 다정한 이름을 붙인 화폐까지 만들게 되었다. 나는 복을 잘 운영해서 사람들이 활발하게 사용하게 하고 싶었다. 더 나가서 우리 동네로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고 꿈꾸었다. 다른 어떤 문탁활동보다 복화폐 운영에 힘을 쏟아왔다.

 

1. 복은  화폐일까

 

  경기가 불황이던 1980년대 캐나다의 어느 마을에서 시작된 레츠는 돈 없이도 서로의 노동력과 재화를 교환하여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지역 내부의 거래 시스템이다. 국내 최초의 레츠인 대전 한밭레츠 역시 IMF라는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탄생했고 지역화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생소했던 지역화폐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지방자치정부들이 앞다투어 자신들의 지역화폐를 발행한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 오면서부터이다. 그러다 보니 원조 지역화폐인 레츠와 지방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다.

  지자체의 화폐는 말 그대로 지방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다. 상품권이나 충전식 카드 형태로 된 지자체의 화폐들은 기본소득 지급 등에 사용된다. 지역 내에서만 쓸 수 있어서 골목상권을 보호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발행주체가 지방정부이고 그 화폐를 얻어야만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한국은행 발행권과 다르지 않다.

  반면 레츠는 스스로 발행하는 화폐, 이자가 붙지 않는 화폐다. 복 역시 이 두 가지 성격을 그대로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처음 복회원이 되면 잔고가 제로인 복계정이 생긴다. 이후 복거래를 하면서 복계정의 잔고는 늘거나 줄어든다. 예를 들어, 복을 발행하여 문탁의 자율카페인 파지사유에서 이천복을 주고 차를 마실 수 있다. 그러면 회원의 계정에는 마이너스(-) 이천복이 기록되고 파지사유의 계정에는 플러스(+) 이천복이 기록된다. 복을 받는(플러스로 만드는) 활동없이 발행만 계속 한다면 계정의 잔고는 마이너스쪽으로만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복잔고가 많건 적건 이자가 붙지 않기 때문에 복을 저축해서 더 큰 복으로 불릴 일도 없고, 마이너스로 인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태를 겪을 일도 없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복 초창기, 복의 활성화를 위해 기본적인 이용방법만 알려주고 복회원 가입을 받곤 했다. 동네 주민 한 분이 제법 값나가 보이는 운동화를 거금 3만복을 발행하여 가져간 적이 있었다. 요즘도 대부분의 거래는 이천복에서 오천복 안쪽인 걸 감안하면 꽤 거금이다. 가입과 동시에 복을 발행했으니 당장 복잔고는 (-)3만복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로 그분은 도통 복 버는 활동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부하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얼굴 볼 기회도 없고 복을 버시라고 강하게 권유하기도 어려웠다.

 

 

 

  지금껏 화폐는 가장 사적인 것이었다. 자기 지갑에 있는 돈 자기 맘대로 쓰겠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최소비용으로 최대의 욕구를 채우겠다는 합리주의를 장착한 소비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처음 기대했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가 꿈꾼 건 돈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얻는 그런 풍경이었다. 복을 돈처럼 쓰는 상황, 화폐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그런 따뜻함은 생겨나지 않았다.

  복을 많이 가진 회원이 강좌수강료 전액을 복으로 내는 경우가 있었다. 또 작업장에 쌓인 복을 품삯으로 지출하지 않고 본회계에 이관하는 일들도 있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복이 본회계에 계속 쌓여 갔다. 내 주요 업무가 복계정 정리여서 나는 그런 상황을 제일 빨리알게 되고 제일 신경이 쓰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복을 왜 거기에 썼냐, 왜 복을 그렇게 많이 받았냐 타박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복은 점점 알 수 없는 무엇이 되어갔다. 복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드러난 현상에 대한 해석도 제 각각이었다. 복은 안건으로 등장하면 모든 회의는 블랙홀로 빠져버렸다. 가끔은 복이야기로 회의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미안할 정도였다.

  어떻게든 해법을 찾고 싶어서 화폐 공부를 시작했고 맑스 공부로까지 이어졌다. 맑스는 “화폐 그 자체가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는 화폐가 공동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했다. 공동체에 화폐가 출현하면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화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면 복은 공동체 활동과 양립할 수 없는건가? 복이 화폐가 아니게 해야 하나? 사서 고생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저질러 보는 쪽을 택했다. 안 하고 미련을 가지느니 일단 해보는 쪽을 택했다.

 

2. 복은 빚일까

 

  대부분의 복회원들은 처음엔 마이너스를 무척 부담스러워한다. 마이너스 통장이라든가 외상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와 겹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절대 빌려주지 말고 빚지지도 말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다. 그러나 복은 마이너스라 하더라도 마이너스 통장과는 전혀 다르다. 마이너스통장은 담보 없이는 절대 빌릴 수 없다. 거기에 대출 이자가 발생하고 제 때 갚지 않으면 연체 이자까지 물어야 한다. 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빚은 당연히 이자를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의 돈을 쓰는 것은 그 돈의 기회비용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돈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자가 붙어서 점점 불어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렇지만 돈을 써서 사업을 하고 망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아닌가. 증식하는 돈이라는 개념은 진짜 억지다. 어쨌든 복은 이자가 붙지 않는다. 아무리 복잔고가 마이너스라도 하루빨리 탕감해야만 하는 압박 따위 전혀 없다.

  시간이 지나자 복회원들은 슬슬 마이너스 복에 익숙해져 갔다. 마이너스도 괜찮다고 독려하고 다녔던 나로서는 늘어나는 복거래에 마음이 뿌듯했으나 그도 잠시였다. 주머니에 잔돈이 없다는 이유로 복을 쓰고, 계좌이체하기 귀찮아서 복을 쓰고 그런 뒤엔 나 몰라라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땐 힘이 빠졌다. 어떤 회원에게 마이너스가 너무 심하니 당분간 현금 거래만 하시라고 권유했는데 그 이후로 그 분이 거래 자체를 안 하게 된 일도 있었다. 자본주의 화폐를 거부하는 급진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늘 마이너스 복 걱정만 하는 나 자신이 쫌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이너스 어떻하냐고 궁시렁거리며 머리를 맞대는 가운데 종종 쓸만한 아이디어들을 얻었다. ‘마이너스 복 클럽(줄여서 MBC라 부른다)’을 결성해서 복잔치날 복벌이를 결의하는 이벤트도 벌이고, 자기 복이 얼만지 신경 좀 쓰고 살자며 ‘복수첩’도 만들어 보았다. 그런 시도들은 대체로 잠깐 반짝하고 끝나버리곤 했다. 그러나 MBC회원 당사자보다 주변인들이 더 마이너스를 걱정하게 되는 이 시스템은, 내 지갑과 네 지갑의 경계가 분명한 각자도생의 자본주의적 삶과는 동떨어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모든 복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복 희년(禧年)을 하자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올 수 있는 세계다.

  마이너스복이 계속 쌓이는 게 부담스러워서 현금으로 탕감하고 싶다는 회원도 있었다. 하지만 복은 돈의 대체물이 아니라서 그렇게 할 수 없다. 복을 버는 활동을 해서 플러스를 늘리는 수밖에 없는데 복을 벌려면 문탁의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탁사람들이 의미있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활동들을 통해 벌 수 있다. 작업장의 공동생산, 터전을 돌보는 매니저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활동들, 중고물품의 순환, 먹거리를 만들고 나누는 셰프활동과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가운데 복은 돌고 돈다. 복에서는 문탁사람들의 향취가 묻어나온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그 흔적을 알 수 없이 세탁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돈과는 전혀 다르다. 가장 문탁스러운 복 활동으로 몇 년전에 열린 ‘복스토리펀딩’을 꼽고 싶다. 탈핵활동이면 활동, 우크렐레 동아리면 동아리, 공부면 공부.....,열심히 하는 활동들은 모두 복 안 되는 일뿐이라는 사연을 가진 회원이 있었다. 궁리 끝에 묘수를 짜냈다. 이름하여 복스토리 펀딩. 탈핵활동 계속 열심히 하라고, 살아만 주어도 고마우니 운동 열심히 하라고 친구들이 복을 쾌척하여 마이너스를 탈출한 훈훈한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히말라야의 복스토리펀딩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는 “삶은 누구에게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빌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빚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 세계는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신세 지느니 카드를 쓰고 은행대출을 받는 쪽이 올바른 선택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이웃과 서로 빚지고 사는 유대관계를 끊고 금융자본이라는 채무관계, 때로 생명마저 저당잡혀야 하는 폭력적 채무관계 속으로 포획된다. 그에 비해 복은 마이너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훤히 보여준다. 전체 복이 제로로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에서 누가 복을 많이 가지면 상대적으로 복이 부족한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개되는 복의 흐름을 살피다 보면 우리는 모두 다른 친구들의 활동에 빚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뚜렷이 느껴진다. 서로서로 빚지고 사는 관계. 복은 그런 끈끈한 관계를 이어주는 빚이다.

 

3. 복은 선물일까

 

  복이 처음 만들어질 때 문탁에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선물로 주고받으며 운영해 왔는데 화폐를 도입하면 선물의 오고 감이 줄지 않을까 염려한 탓이다. 차갑고 계산적인 등가교환의 수단인 돈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대안적이라 해도 화폐라는 이름이 붙은 복에 거부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의심과 우려 속에서 복이 화폐냐 아니냐는 질문이 계속 되었고 마을경제 세미나는 그 답을 찾으려 애썼다. 선물경제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 글쓰기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는 나 역시 복에 대해서라면 기꺼이 오케이했다(그래서 내가 쓴 글들은 대부분 복 이야기다).

  많은 복회원들이 그런 마음으로 복을 돌보고 노력을 한 덕분일까. 언제부터인가 복은 선물과 하이브리드되기 시작했다. 지난 달에 일어난 복거래를 살펴보자. 누구는 복으로 식권 사서 밥 잘 챙겨 먹으라며 청년 래퍼 우현이를 응원하며 복을 선물했고, 또 누군가는 무거운 짐을 배달해준 청년 목수 지원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복을 선물했다. 오고간 복과 함께 이런 저런 근황들도 함께 읽힌다. 선물의 공동체에 복이 녹아들자, 일상을 공유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기술들이 더 다양해진 것이다.

  선물의 원리를 표현하는 복의 쓰임새를 잘 보여주는 한 순간은 복 포틀래치다. 일 년에 두어 번 복회원들이 모여 복잔치를 연다. 복포틀래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이 손님들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엄청난 선물들을 제공하는 포틀래치 풍습에서 착안한 이벤트다. 복잔치를 열 즈음이면 준비팀이 모여 복잔고를 쭉 훑어본다. 자작나무 복이 꽤 많은데? 쓸 데가 있어서 모으고 있대. 이사간 풍경도 복이 많구만... 본회계에 복이 많이 쌓여 있는데 좀 풀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너도 복이 많구나! 이렇게 복부자들이 레이더망에 포착되면 복포틀래치를 하라는 요청에 들어간다. 모처럼 모은 플러스복인데.....라며 아까워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흔쾌히 응한다. 오만복, 십만복 그렇게 모인 복은, 마치 추장이 귀한 보물인 동판을 손님들에게 마구 내동댕이 칠 때처럼 복잔치날 풀려난다. 보물찾기로 뿌려질 때면 사오십대 어른들이 복을 찾아 온 사방을 뒤지고 다니게 하기도 하고, 사회자 재량껏 뿌려질 때면 사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오버액션이 난무하기도 한다. 열광의 분위기는 금새 퍼져 나간다. 복을 쾌척하고 탕진하는 가운데 마이너스 복을 탕감받는 운 좋은 일도 생긴다. 흥청망청 복잔치는 과잉을 유쾌하게 소모하는 현장 그 자체다.

  책에서만 배웠던 증여사회의 포틀래치를 우리는 복을 통해 강렬하게 실감한다. 어떻게 강제적이면서 동시에 자발적 선물이 가능한지 복을 주고받는 동안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복 덕분에 문탁의 선물경제는 더욱 활성화되어 있었다. 서로의 필요를 등가교환의 방식으로 거래하기보다는, 수고를 베풀어주고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복으로 답례하는 방식으로 전하고 있었다.

  한 군데 고여있지 않도록 물꼬를 잘 터주는 만큼 복은 활발해졌다. 복이 잘 돌아다닐 때 많은 것들이 함께 순환하는 게 보였다. 강사료에서 작업장 물건값으로, 다시 품삯으로 그리고 강의 수강료로 복이 잘 흐를 때 그만큼 문탁 공동체의 경제가 풍요로워졌다. 좌충우돌 속에서 우리는 차츰 스스로 발행하는 화폐의 참뜻을 깨달아 간 것이다. 스스로 발행하는 자유는 내 주머니 상황만 생각하는 내 맘대로의 의미가 아니었다. 어떻게 발행하는 게 적절한 지 살피고 결정하는 과정을 배우면서 우리는 복의 흐름을 능동적으로 순환시키는 존재가 되어갔고, 복은 그렇게 공동체 화폐가 되어갔다. 그러나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도 있는 법. 복의 잘 나가던 시절도 무한정 계속 되지는 않았다.

 

      

MBC창립모임과 복보물찾기

 

4.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실험으로 이행중

 

  지난 가을 열렸던 복잔치는 역대급으로 재미있고 뜻 깊었다. 작업장과 파지사유의 각종 장비들과 친해지는 도구5종경기가 벌어져서 참가자들에게 복이 쏟아졌다. 가죽에 구멍을 뚫고, 미싱 바늘에 실을 꿰어보고, 커피 머신 조립을 해보면서 파지사유가 보다 친밀한 장소가 된 것 같았다. 타로를 봐주고, 캘리그래피를 가르쳐주고, 공들여 만든 도자기를 내놓고, 안마를 해 주는 복활동들도 구석구석에서 열렸다. 마침 좋은 기회라서, 혹은 의리로 재미로 복을 주고받는 정이 넘치는 잔치였다. 하지만 그날 복잔치에 참여한 사람 수는 예전에 비해 매우 적었다. 한때 파지사유 전체가 왁자지껄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던 풍경은 펼쳐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2015년엔 년간 총거래량이 일억복을 돌파할 정도로 열 띠었던 복거래도 2019년엔 5천만복이 채 안될 정도로 감소했다.

  그 시절 무엇이 그렇게 복에 활기를 불어넣었을까, 그때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흥분시켰을까. 작업장이라는 중심이 있어서 과감하게 복을 순환시킬 수 있었고, 복이 있었던 덕분에 작업장의 가격 책정도, 품삯 책정도 여유로웠다. 그렇게 작업장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복으로 포틀래치를 열고 펀딩을 하고 경매도 벌이며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 보았다. 복을 만든 덕분인지, 화폐가 문탁을 만난 덕분인지 독특한 색깔로 마을경제를 실험할 수 있었다. 복은 이제  문탁에서 공기와 같아졌다. 처음 경험할 때는 낯설어서 나의 경제 행위를 되돌아보게 만들지만, 늘 호흡하다보면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요소로 문탁에 존재한다.

  복으로 시작한 실험은 또 다른 이슈로 이행 중이다. 돈을 멀리하려고 복을 만든 우리가 복을 넘어 이제는 ‘돈’으로 하는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회원들이 한 통장을 공유하여 입금하고 출금하는 무진장이 바로 그것이다. 복과 선물이 혼용되는 경험, 복으로 사적 경제의 경계를 흐트러트린 경험을 돈에 적용하는 시도다. 지금은 작은 규모의 실험이지만 복이 그랬듯이 어느 사이 야금야금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 버릴지도 모른다. 반대로 가족경제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지리멸렬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마을경제의 실험들은 쭈욱 계속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뚜버기 프로필 02.png글 : 뚜버기

나는 글 쓰는 게 하나도 재미없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쓰려고, 그것도 재미없는 경제로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건 ‘마을경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다.

 

 

 
댓글 7
  • 2020-02-24 09:32

    감명깊게 읽었어요. 저만 해도 복에서 한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네요. 아니, 떨어져 있지 않은데, 우리 곁에 공기가 있어 숨을 쉬지만 너무 당연해서 공기의 존재를 앚어먹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뚜버기랑 같이 복에 대해 생각하고 일을 벌였던 제가 다 뿌듯하네요. 그라고 이렇게 멋지게 글까지 쓴 것에 리스펙트!!!!

    • 2020-02-24 13:05

      참 잘했어요는 누구지??
      암튼 저도 리스펙트!!

    • 2020-03-03 08:58

      자누리 샘이죠? ㅋㅋㅋ
      아뒤에서 냄새가 나는데~~~

  • 2020-02-24 13:13

    복 개념이 아직도 모호하지만 복받을 일을 안해서 복이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갑자기 제복은 마이너스인지 풀러스인지가
    궁금해지네요?
    민폐를 안끼치려면 어느정도 발란스를 맞추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복받을 일이 뭔지 궁금해집니다.
    돈을 내는것을 바라는것은 아닌것 같은데...
    복받을일 방법을 알려주세요~

    • 2020-02-24 17:52

      복을 받으려면
      공지를 열심히 보고 복활동을 신청하시거나
      복팀과 의논하셔서 하실수 있는 복활동이나 복잼활동을 하시면 됩니다. 또 복잔치때 셀러로 참여하셔도 되고 곧 진행될 개인간복거래에 적극 참여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닉네임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어서요~~
      알려주시면 연락드릴수도 있어요~#

  • 2020-02-24 23:52

    복에 대한 문탁의 고민의 역사!!
    복에 대해 복터지게 고민하는 뚜버기쌤! 복받을꺼유~ ㅋ

  • 2020-03-03 08:58

    샘 글을 읽고 새삼 ‘복’이 문탁의 중심에서 우리의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의 화폐가 잃어버린 그 능력을 복은 가지고 있었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1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12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8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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