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인생극장/7회> 부창부수(夫唱婦隨)로 본 별별 로맨스

기린
2020-01-28 21:31
404

 벌써 작년이다.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였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주인공들의 로맨스도 한 몫을 했다. 여주인공인 동백에게 첫 눈에 반해서 순정을 바치는 용식의 ‘폭격형’ 로맨스가 묘하게 마음이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그 로맨스는 동백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했다.

 

 

『사기』에서 남녀의 로맨스를 주로 다룬 편은 아예 없을뿐더러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편도 「본기」에서 유방의 아내였던 여치의 일대기를 다룬 「여태후 본기」가 유일하다. 다만 부부로 연을 맺은 이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가물에 콩 나듯 발견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반전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 아내의 활약이 돋보이는 이들의 로맨스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어리석은 남편을 일깨운 로맨스

 안영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이다. 오랑캐 출신으로 제나라 조정에 발탁된 후 세 명의 제후를 섬기면서 재상을 지냈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살림살이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밥상에는 한 가지 이상의 육류가 오르지 못하게 했고, 첩에게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안영의 성품을 흠모하는 이가 있었으니 안영의 마부 아내였다.

어느 날, 안영이 외출하려고 마차를 대령시켰다. 마부는 재상을 모시는 자신의 처지에 우쭐하여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마부의 아내가 보기에 그런 남편이 영 마뜩찮아 보였다. 저녁이 되어 남편과 마주앉은 아내가 말했다.

 

-당신과 헤어지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재상님은 당신보다 덩치가 작아서 여섯 자밖에 안 되는데도 재상자리에 올랐어요. 근데 당신은 키는 여덟 자나 되는데도 남의 마부 노릇이나 하고 있잖아요.

 

-이제 와서 내가 마부라서 싫다는 거야?

 

-당신은 재상님이 어떻게 재상 노릇하는지에 대해 손톱만치도 관심이 없고 마부인 주제에 재상인양 거들먹거리는 꼴은 또 어떻고요! 그래서는 제대로 마부 노릇도 할 수 없어요!

 

아내로부터 버림받기에 이른 마부는 어떻게 했을까?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제 일에 충실함은 물론 매사에 겸손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안영이었다. 안영은 그 까닭을 물었고 마부는 사실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안영은 그를 대부로 추천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순종은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일 때 해피엔딩의 가능성도 그만큼 상승하게 된다.

 

 

2. 현실에 발 디딘 로맨스

 

 사마상여는 한(漢)무제 때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장성하여 여러 유세객들과 어울리면서 글쓰기에 재능을 드러냈다. 집안의 살림살이는 넉넉지 않았고 별다른 직업도 없었지만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고을의 현령도 있었다. 어느 날은 현령의 초대로 탁왕손의 집안 잔치에 가게 되었다.

 탁왕손은 노복을 800여 명이나 부리는 부호였다. 잔치 상에 이르러보니 수백 명의 빈객이 어울리고 있었다. 상여의 인기는 잔치 상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흘긋흘긋 그를 훔쳐보았다. 현령은 그 분위기를 틈타 사마상여에게 거문고를 주며 말했다.

 

-그대가 거문고 연주 솜씨가 뛰어나다 들었소. 한 곡 듣고 싶소이다.

 

사실 사마상여의 연주는 탁왕손의 딸이면서 과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군의 마음을 사기 위한 의도로 기획된 것이었다. 문군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별당에서 사마상여의 연주를 들은 문군이 관심을 보였다. 잔치 마당을 떠나기 전 사마상여는 심부름꾼에게 한바탕 선물을 안겨 보내면서 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문군은 당장 그날 밤으로 보따리를 싸서 사마상여에게 왔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고향을 떠나 도성으로 향했다. 도성에 이르러 찾은 거처는 네 벽만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한 편, 탁왕손은 자신의 딸이 사마상여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 한 것을 알고 대노했다.

 

-딸은 쓸모가 없다고 할 때 내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참말이구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한 푼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문군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사마상여에게 말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요. 저한테는 아버지도 있지만 그 외 형제들도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돈을 빌려 뭐라고 해서 먹고 살아야지요.

 

고향으로 돌아 온 두 사람은 돈을 빌리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술집을 차렸다. 문군은 주모가 되어 직접 술을 팔고 사마상여는 머슴들과 허드렛일을 하면서 술집을 꾸려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탁왕손은 기가 찼다.

 

-이런 배은망덕을! 내 챙피해 얼굴을 들고 나다닐 수 없다.

 

그러고는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형제들과 자식들은 그런 탁왕손에게 번갈아 드나들며 구슬렸다.

 

-고작 셋 뿐인 자식이오. 게다가 넘치는 저 재산을 어디에 쓸 것이오. 사마상여가 비록 가난하긴 해도 들어보니 쓸 만한 재목이라고 합니다. 우선은 거두어서 다음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 치욕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렇게 되자 탁왕손도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탁왕손은 문군에게 한 재산을 떼 주었고 두 사람은 그예 술집을 접고 다시 도성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사마상여의 유혹이 낭만이었다면 문군의 사랑은 현실이었다. 현실에 뿌리내린 문군의 사랑은 예상치 못한 가난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후 사마상여는 한무제의 전속 작가가 되어 그 사랑에 보답했다.

 

 

3. 천하를 함께 경영한 로맨스

 

 유방(한고조)과 여치(여태후)는 여치의 아버지가 중매를 했다. 유방의 고향인 패현 현령의 손님으로 갔다가 유방의 인물됨에 반한 결과였다.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집안에 알렸더니 아내가 버럭 했다.

 

-패현 현령이 중매를 넣었을 때도 거절해놓고 어디 이름도 없는 나부랭이한테 보낸단 말입니까?

 

여씨 집안은 나름대로 재산 규모가 있었던 반면 유방은 주막집에서도 줄곧 외상술만 마셨던 형편이었다. 결국 여치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고 유방과의 슬하에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진섭의 난을 시작으로 진(秦)나라에 반기를 든 무리들이 천하에서 일어날 때 유방도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여치는 유방과 헤어져 갖은 고생을 했다. 유방과 항우의 접전이 계속 되었을 때는 항우 진영에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여치의 집안에서는 위기에 몰린 유방을 돕기 위해 새로 병사들을 모집하여 유방의 전력을 보충해 주기도 했다.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고 아들 혜제가 태자가 되었다. 공을 세운 신하들을 논공행상하는 과정에서 여치는 장차 한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대신들을 없애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유방이 전장에서 함께 고생했던 한신을 차마 처단하지 못하고 망설였는데 여치가 나서서 해결해버렸다.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궁에서 떠나 있었던 유방은 이 소식을 듣고 아무 말도 못했다.

반란의 전장에서 빗나간 화살을 맞은 유방은 결국 병석에 눕고 말았다. 병세는 호전되지 못하고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여치는 유방의 병석에서 물었다.

 

-폐하가 돌아가시고 소하가 죽으면 누가 대신합니까?

 

-조참이 할 수 있소

 

-그 다음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릉이 할 수 있소. 그러나 왕릉은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 진평이 그를 돕도록 하는 것이 좋소.

 

천하를 차지하기 위하여 안팎으로 협력했던 부부에게 사후 권력의 향방은 목숨 연장보다 중요한 결정사안이었다. 고조의 뒤를 이어 혜제가 천자가 되었다. 하지만 혜제는 결국 여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혜제의 아들은 너무 어리고 유방에게는 혜제 외에도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다른 유씨들에게 이 권력을 넘길 것인가. 여치는 혜제의 빈소에서 마른 곡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다. 여치의 서슬에 안절부절 못한 승상이 여씨 집안사람들에게 전권을 준다는 통보를 받은 다음에야 안심하고 눈물을 흘렸다.

부부로서 이들은 일개 평민이 천자가 되는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였다. 그들의 천하는 이전에 제후들이 나눠가지는 봉건체제가 아니라 천자에게 집중되는 중앙집권체제였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부부의 인연에서는 세드엔딩 이었다. 유방이 척씨 부인을 총애하고 그 소생을 태자로 만들려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파탄이 났고 자식들도 결국 여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천하 백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유씨와 여씨가 구중궁궐에서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온 천하는 드디어 전쟁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백성들도 살만한 시절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던 이들의 부창부수야말로 결과적으로 천하가 평탄해지는 해피엔딩에 이르게 하는 동력이었던 셈이다.

 

 

부부사이의 덕목을 가리키는 부창부수의 원뜻은 남편이 주장을 하면 부인은 순종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 사자성어는 부부가 서로 뜻을 맞춰 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위에서 살펴본 로맨스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남편의 뜻에 아내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도리는 없었던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처한 상황에 따라 협력으로 대처해나가는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부부의 역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차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일터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이나 집안에서 육아와 관련해 아내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 차별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협력보다는 대립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벌어지는 별별로맨스에서도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 쌍방향의 협력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졌다. 그러자면 일단 만나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저마다 홀로를 외치는 이 시절이 하 수상하다.

 

 

 

 

댓글 2
  • 2020-01-29 15:26

    그럼 미팅이라도 잡아볼까요? ㅋㅋ

  • 2020-01-30 09:13

    고전 속의 부부? 연애? 이야기 재밌습니다.
    그리고 기린샘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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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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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2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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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4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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