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인생극장/6회> 다다익선(多多益善), 그 ‘좋음’을 성찰하지 못하면

기린
2019-12-1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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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은 뭘까? 시세차익, 좋아요 구독자수, 맛집 리스트. 그럼 많으면 많을수록 나쁜 것은? 내 뱃살, 미세먼지. 이런 것들은 그나마 좋고 나쁨을 가볍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데 맞닥뜨리는 수많은 사건을 좋고 나쁨으로 판가름할 수 있을까? 또 그런 선택이 늘 좋기만 하고 혹은 늘 나쁘기만 할까?

 초한(楚漢)시대 한신은 유방의 휘하에 들어간 후 항우 진영을 상대로 거듭 승리를 거두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 결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천하에서 한신의 이름이 드날렸다. 유방도 경계심을 품을 만큼이었다. 한신 스스로도 자신감에 차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사자성어의 원출전이 바로 한신의 열전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사자성어 토사구팽(兔死狗烹)도 나온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한신이 토끼 사냥이 끝나 쓸모없는 사냥개로 삶겨지는 처지가 되었다. 한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인생역전을 따라 가보자.

 

  1. 한신의 병법, 배수진

 

한고조 유방이 공신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한신과 마주 앉게 되었다. 한고조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 군대를 이끌 수 있겠소?

-폐하는 10만 정도의 군대를 이끌 수 있겠습니다.

-그대는 어떻소?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 그대가 왜 내 밑에 있소?

-폐하께서는 군대는 이끌 수는 없습니다만, 장수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폐하의 밑에 있는 까닭입니다. 또 폐하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지 사람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신이 처음 몸을 담았던 곳은 항우 진영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을 떠나 유방 진영으로 옮겼다. 유방의 측근이었던 소하는 한신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유방에게 한신을 기용해야 한다고 강력 추천했다. 그리하여 대장군이 된 한신은 그동안 갈고 닦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신의 주무기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즉 동쪽에서는 소리를 내어 적의 관심을 유인하면서 서쪽에서는 기습공격을 펼치는 속임수 병법이었다. 이 전법은 조(趙)나라와의 접전에서 제대로 빛을 발했다. 조나라 국경 정형에서 대적하게 되었을 때 한신은 정예병 2000명을 매복시키면서 한나라 깃발로 무장시켰다. 조나라 병사들을 성 밖으로 유인하면 기습해서 성 위에 깃발부터 꽂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 병사들에게는 강을 등지고 조나라 진영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 직전 한신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오늘 저 조나라 군사들을 모두 무찌르고 다 같이 원 없이 먹고 마시도록 하자!

 

 강을 등졌으니 퇴로마저 없는데 승리라니, 병사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형국을 모를 리 없는 조나라 군대는 의기양양하게 성 밖으로 진격해 나왔다. 그 사이 매복해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성으로 들어가 한나라 깃발부터 꽂았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기세에 몰린 조나라 병사들이 퇴각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 성 위에 나부끼는 깃발은 한나라 깃발이었다. 깃발만 나부낄 뿐인데도 조나라 병사들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말았다. 배수진(背水陣)병법의 승리였다.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한 장수가 물었다.

 

-병법에는 ‘산과 언덕은 오른쪽으로 하여 등지고 물과 못은 앞으로 하여 왼쪽으로 두라’ 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치라고 했을 때 이 싸움은 패배구나 싶어 낙담했습니다. 그런데 이겼습니다. 이건 무슨 전술입니까?

-병법에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소. 내가 거느린 병사들은 평소에 훈련을 받으며 대비를 했던 전력이 아니오. 시장바닥에 굴러다니던 오합지졸을 몰아다 싸우게 한 것이오. 그러니 죽을 형세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모두 달아나기 바쁠 테니 어찌 싸울 수 있었겠소.

 

 제나라와의 접전에서는 하룻밤 새 모래주머니로 강의 상류를 막게 했다. 그 후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공격하는 척하다 돌아서서 후퇴했다. 뒤쫓아 오는 적들이 강의 중간쯤에 이르자 모래주머니 제방을 터서 적들을 수장시켰다. 한신의 자신만만은 이렇게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으로 진을 쳤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병사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승리할 확률도 높은 병법이었다.

 

2. 한신의 금의환향

 

진(秦)나라의 폭정에 맞서 천하에서 반란군이 결집하던 때, 유방은 패현의 정장이었다. 이 직책은 지금으로 치면 마을 이장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명망은 있었던지 천하가 들썩이자 뜻이 있는 인재들이 유방의 밑으로 속속 모여들어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한신의 명망은 바닥이었다. 가난한 데다 별다른 능력도 없이 그저 남 따라다니며 얻어먹고 사는지라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친구의 집에 드나들며 얻어먹는 밥으로 몇 달을 넘기니 친구의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식구들에게 새벽밥을 해 먹이고 밥상을 거둔 시간, 한신이 밥 때에 맞춰 어슬렁대고 들어섰다.

 

-어째 밥상을 차리지 않는가?

-우리 집에 밥 맡겨 놨수? 우린 벌써 다 먹고 치웠소.

 

쌩하니 돌아서는 아내를 겸연쩍게 바라보는 친구를 향해 한신이 한 마디 했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다 중도에 그만 두는 소인과는 더 이상 교제할 수 없지.

 

 그런 홀대에도 아랑곳 않고 칼을 차고 어슬렁대다 힘깨나 쓰는 마을 청년들과 맞닥뜨렸다.

 

-어이 한신, 일로 와 보시오. 빌어먹는 주제에 그 칼이 가당키나 한가? 당신이 만약 진정 무사라면 나와 한 판 붙어봐. 그렇지 않으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야 할 거야.

 

 한신은 시비를 붙는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무릎을 굽히고 그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서 지나갔다. 한신의 등 뒤로 한 바탕 비웃음이 쏟아졌다. 그랬던 한신이 초나라 왕이 되어 금의환향했다. 한신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이들이 찾아 재물을 내렸다. 한신이 빌어먹던 시절 사내가 돼서 제 손으로 밥 한 끼도 못 먹는 게 너무 한심해 수십일 동안 밥을 챙겨준 빨래터 아낙이 있었다. 한신은 언젠가는 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빨래터 아낙은 기가차서 대답했다.

 

-그 꼴에 보답은 무슨, 여튼 입은 살아서 나원참.

 

 그랬던 한신이 천금을 내렸으니 빨래터 아낙 좀 민망했을 것이다.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게 한 청년에게는 벼슬을 내렸다. 벼슬을 내리는 까닭은 이랬다.

 

-그 때 너를 죽이지 않은 건 그래봐야 이름 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욕을 참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공을 이루었다.

 

 

3. 결국은 토사구팽

 

 한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로 제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던 때 괴통을 알게 되었다. 괴통은 한신이 얻은 명성으로 천하의 혼란을 멈출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괴통이 말했다.

 

- 한(漢)나라와 초(楚)나라가 차지하지 않은 서쪽 땅을 차지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누면 두 나라의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나라를 나누고 강한 나라를 약화 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천하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한신이 말했다.

 

-한나라 왕 유방은 나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와의 의리를 저버리겠습니까?

 

 한신은 괴통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방과의 의리를 택했다. 장수로써 병사들을 부리는 데는 탁월할지 몰라도 천하의 인재들을 두루 쓰는 유방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내린 분이라는 말이 아첨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한신은 담백하고 소신 있는 장수의 면모가 엿보인다. 유방의 입장에서 보자면 병법에 탁월한 신하는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상대였다. 언제든지 모반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나라 왕이 된 한신은 순행을 할 때 늘 병사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그런 동향을 살핀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을 했다는 글을 올렸다. 유방은 그것을 빌미삼아 한신의 체포하여 왕의 자리를 박탈하고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항우라는 적이 사라진 마당에 한신은 쓸모없는 사냥개였던 것이다.

 한신은 천하의 항우를 물리치고 장수로서는 최정상에 올랐다. 그 정상은 곧 위험한 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한신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또 한신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당시의 정세를 판단하지 못했다. 괴통의 간언에 의하면 천하를 두고 나누어서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입장이 여전히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천하를 통일하고 싶었던 유방은 한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승리를 주로 했던 한신의 자신만만함과 수많은 패배를 겪은 유방의 노련함이 맞붙었고 결국 한신이 추락하고 말았다.

 

 한신과 관련한 자료를 검색을 하다가 기사 하나를 읽었다. 건물을 세내어 장사를 한 점주가 있었는데, 새로운 건물주로 바뀐 후 터무니없이 임대료를 올려달라는 통보가 있었다. 점주가 부당하다고 따지자 건물주는 나가라는 통보를 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시비가 붙어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이슈가 되자 건물주는 자신의 SNS에 거액을 내고 투자한 건물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다고 내세우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올렸다. ‘시세차익 다다익선!’

 

 

 

 우리는 다다익선의 의미를 대부분 저 건물주처럼 쓴다.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훨씬 낫지 않느냐는 논조가 더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다다익선의 원 출전에서 살펴 본 한신의 삶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다다익선에도 그만큼의 댓가가 있었다. 그의 병법으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이 장기판의 졸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승승장구(乘勝長驅)로 얻은 명성은 동시에 위협이 되었다. 자신의 명성을 성찰할 기회를 놓치는 순간부터 위협은 현실이 되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음이 야기할 댓가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한신의 몰락은 언제든지 다시 들이닥칠 수 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세차익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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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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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6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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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5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0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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