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10회] 출구 없는 사회의 EXIT

새털
2019-05-14 01:44
485

[플라톤이 돌아왔다 10회]

출구없는 사회의 EXIT, 

화살표를 따라가세요

-국가』 8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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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은유로서의 질병, 폐소공포증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내가 프랑스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의 출구 없는 사회(글항아리, 2019)를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하고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까닭은. 요즘 나는 살맛이 나지 않는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나이는 많고 돈은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간다. 생각이 많아지고 철학자가 될 확률은 높아지는데, 우울, 분노, 자책의 감정도 요동쳐 예술가가 될 확률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약사인 친구는 내가 간기능이 떨어져서 화를 잘 내는 것 같다며 종종 영양제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종합비타민제와 간장약을 복용해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는다. 현재의 무력감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평온한 호흡을 가로막는다. 미세먼지의 농도와 상관없이 숨을 쉬기 힘들다.

다니엘 코엔은 출구가 봉쇄된, 폐쇄적 사회가 된 디지털경제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영화와 음반과 같이 기술복제가 가능한 문화상품이 등장한 시기에 공연예술계가 맞은 위기를 가져와 현재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1960년대에 연극배우, 오페라 가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생산성이 훨씬 더 높은 문화산업과 경쟁을 겪었다. 최고의 마에스트로가 취입한 음반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영화는 예산 변화가 전혀 없이 수백만 가구에 노출되었다. 텔레비전이나 케이블을 통해 모든 가정에 거의 무료로 들어갔던 문화상품의 세계에 일부 스타와 영화 제작사가 범람했다. 반면 라이브 공연, 연극, 무용 등을 펼치던 통상적인 배우들은 생산성의 증대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출구 없는 사회, 113) 영화와 연극은 서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하나는 저렴하고 다른 하나는 비싼 이 두 가지 문화상품 앞에서, 소비자들은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는다. 여기에 소비시장이 전 세계로 확장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면, 기술복제 예술상품의 수익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수 있으며 시장 점유율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실리콘밸리, 할리우드, 월스트리트의 모델이 유통되고 있고, 이렇게 심화된 불평등의 구조는 우리가 살아가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구글, 유튜브, 넷플릭스 등 디지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고, 천문학적 자산을 보유한 슈퍼리치들을 탄생시켰다. 이건 IT산업뿐만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공장의 생산성이 아닌 금융, 광고, 마케팅에서 수익이 창출되고 있고, 기업들은 주력분야를 제외한 모든 부문을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리모델링을 마쳤다. 몇몇의 개발자들과 양질의 일자리를 점유한 고액연봉자가 아니라면, 우리 대부분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다양한 알바를 전전해야 하는 연극배우와 같은 생활고를 경험하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수학적인 문제이다. 수학적으로 현재의 구조는 소득과 자산이 증가하는 소수와 제자리거나 마이너스의 성장률을 갖는 다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음은 심리학적인 문제이다. 다니엘 코엔은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추적한 경제학자 이스털린의 이론을 가져와 행복지수를 살펴본다. 이스털린은 소득이 증가하면 생활의 만족도 즉 행복이 증대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그러하고 정체되기 때문에 이 둘이 비례 관계에 있지 않음을 통계적으로 밝혀냈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이 이론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인간의 강박적 성향을 설명해준다. 임금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이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는 기준은, 절반이 직장동료, 4분의 1이 학교 동문, 4분의 1이 친구나 친척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자신이 동료보다 낮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는 욕구가 늘 상대적이라는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장애물과 맞닥뜨린다. 중요한 것은 소득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데 어째서 부 자체보다 부의 성장이 더 중요한지가 설명된다. 성장은 현재의 심리적, 사회적 상태보다 더 상승하고자 하는, 덧없지만 늘 새로이 갱신되는 희망을 만인에게 선사한다. 성장의 실현이 아니라, 그러한 성장의 약속이 불안을 잠재우는 셈이다.

(출구 없는 사회, 158)

 

 

내가 꿈꾸는 평범한생활인이란 바로 끊임없이 동료와 자신의 생활을 비교하며 어제보다는 나아지리라, 친구보다는 나아지리라는 희망하는 욕망게임의 플레이어. 다니엘 코엔은 서구 산업화시대의 황금기(1945~1975)에는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심리를 상품의 소비로 중재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때 유행했던 텔레비전, 냉장고, 자동차의 소비는 당시의 소득수준에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슷한 상품을 소비한다는 평등의 감각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소통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경제의 시대에는 상품이 중재적 요소를 잃어버렸다. 입지 좋은 아파트, <span style="background: rgb(255, 2

댓글 6
  • 2019-05-14 10:27

    사람이 살아가는 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요.

    욕망의 자유가 문제가 되는 지점이 철학의 부재인가요?

    곧 윤리의 부재이기도 하겠구요.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왜 얘기하는지 알 것 같아요.

    <<출구없는 사회>>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2019-05-14 11:06

      나에겐 약 주고 술 주는 친구가 있지^^

      성공의 비법은 벨런스라는데...3분의 2쯤은 성공한 게 아닐까?

      출구든 비상구든 만들어봅시다!!

  • 2019-05-16 09:22

    대학에 오고 나서 친구들이랑 자본주의가 어떻고 민주제는 어떻고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까 자주 고민하고, 이 사회에 만연하는 여러 종류의 혐오와 폭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야기 할 일이 많은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예전 사람들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요. 한편으로는 역시 사람들 살아가는게 똑같구나 싶기도 하고, 예전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해왔는데도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하기 힘들구나 생각하니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저도 시간이 나면 글에 소개된 책들을 읽고 친구들이랑 다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ㅎㅎㅎㅎ잘 읽었습니당ㅎㅎㅎ

    • 2019-05-16 14:46

      매주 꼬박꼬박 읽어주고 댓글도 달아주고 고맙다!!

      친구들과 문탁에 놀러 오면 밥사줄게rabbit%20(7).gif

  • 2019-05-20 08:38

    어떻게 하면 새털처럼 잘 쓸 수 있을까... 이건 예전의 돈 많이 벌고 싶었던 (내친구보다, 남편 동료보다 ㅋㅋㅋ 갑자기 이게 친구며 동료가 맞나? 하는 생각이, 성찰이 드네욬ㅋㅋㅋ) 그 다음의 욕망이구요 ㅎㅎ

    주변의 돈 많은 친구들 들여다 보면 정말 별거 아녜요

    민주제의 활기찬 혼란이 필연적으로 야심가의 폭군제로 귀결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혁명을 생각하니 이해가 되네요.

    이번글에서는 그외의 것에는 무관심이라는 말이 관심이 갑니다.

    새털샘 글을 읽으면 내가 유식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이집니다 흐흐흐

  • 2019-05-20 09:08

    맞아요! 포인트는 그 외의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에요^^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셔 감사합니다!!!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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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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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2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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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63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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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조회 20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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