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9회] 시(詩), 호메로스에서 문학레이블 '공전'까지

새털
2019-04-09 16:48
719

 

 

 

[플라톤이 돌아왔다 9회]

시(詩), 호메로스에서 문학레이블 '공전'까지

-국가』 7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새털 프로필02.jpg

 

:  새 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철인왕 사관학교의 커리큘럼

국가7권에서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와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플라톤의 인식론이 설명되고 있고, 이것을 철인왕의 교육방법에 적용한 커리큘럼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교육을 거쳐 철인왕이 탄생하게 되는 것인가? 철인왕 후보자들은 어떤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인가? ‘철인왕 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알아보자.

이 사관학교에 들어오려면, 음악과 체육 수업으로 이루어진 예비학교에서 철인왕(수호자)에 적합한 학생이라는 인증을 받아야 한다. 예비학교에서는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음악교육을 통해 부드러움과 조화, 그리고 균형의 감각을 몸에 익힌 다음 체력 단련으로 들어간다. 체력 단련으로 근육이 단단해지면 그것을 교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단해지는 수업을 유연해지는 수업 다음에 배치하고 있다. 음악교육은 오늘날의 구분에 따르면 역사교육이며 문학교육이기도 하다. 음악교육의 내용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당대 유행한 비극이기 때문에, 음악교육에서는 멜로디와 리듬뿐 아니라 가사내용을 통한 역사와 문학 수업이 동시에 이루어진다.(이건 국가3권에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은 변덕스러운 신(황소와 거위로 변신하여 여인들을 후리는 제우스를 보라)이나 격정에 울부짖는 전사(트로이전쟁 영웅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죽음에 슬픔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다)의 모습은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검열을 거쳐 교과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생들에게 신은 영원한 진리의 표본으로 자리잡아야 하고, 무릇 전사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교육적 신념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입히고, 보이려는 요즘 부모들의 생각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신들의 변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하거나 감정에 휩싸여 전장에 나가는 일이, 현실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플라톤의 노파심은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준다. 특히 검열제도에 대해서는 거부감마저 든다. 우리의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제대로 된 교육만이 정치적 혼란을 해결할 사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음악과 체육으로 수학능력을 인증 받은 철인왕 사관생도들은 다음과 같은 수업과정을 거치게 된다.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을 배우는 기초과학에 10, 변증법을 배우는 철학에 5,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모범생들에게는 15년의 현장실습 기회가 주어진다. 행정, 사법, 군사 관련 현장에 투입되어 실무를 익히고 통치에 대한 안목을 기른 다음,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된 최후의 1이 철인왕으로 등용된다. 마법학교의 퀘스트들을 통과해가는 해리포터처럼, 긴장과 스릴 넘치는 이 모든 과정을 마치려면 최연소 철인왕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50대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타고난 금수저라도 철인왕이 되려면 꽤 연식이 있어야 한다. ‘낙하산은 불가능하다.

철인왕 사관학교의 은 변증법 수업이다. 변증법 이전에 이수하는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학습을 통해 수, 공간, 운동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갖춘 다음에야 변증법을 익힐 수 있다. 도대체 변증법이 뭐길래 플라톤은 모든 학습의 정점에 변증법을 배치한 것인가? 변증법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논의의 기술 또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물을 설명하고, 그 사람으로부터 그 사물에 대한 설명을 끌어내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자들과 함께 어떤 개념의 정의로부터 시작해 서로의 이해를 나누고 합의해가는 대화술을 학문으로 체계화한 것이기도 하다.

 

 

진리를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 발짝씩 나아가는 방법, 매 발짝마다 다음 발짝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하는 방법,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방법이라는 확신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끄집어내고 마음에 진리를 넣어주는 자연스러운 방법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이라는 그의 생각은, 교육은 상자를 채우듯이 마음에 무엇인가를 넣어주는 일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빛을 향하도록 돌려놓는 일이라는 그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중략) 학습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책 속의 사실들을 마음속에 집어넣기만 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기 자신과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을 해야 한다.(네틀쉽,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 276)

 

 

    

 

 

2. 플라톤의 역습, 호메로스식 교육을 멈춰라

플라톤의 교육체계를 정리해보면 호메로스로 시작해서 소크라테스로 끝나는 공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음악()-체육-과학-철학). 그런데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두 대가(大家)에 대한 대접에서 플라톤은 지극히 편파적이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모든 공부의 정점에 왕관처럼 놓여 있다. 반면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국가10권에서 반 권의 분량을 할애해서 시에 대한 비판과 시인추방론을 주장할 만큼, 입에 게거품을 물고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솜털 하나에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복숭아 알레르기처럼, 플라톤은 시적 감수성을 흡수하고 분해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특이체질인 것일까? 왜 플라톤은 시에 대해 이토록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다고 말이네. [여러 시편에는 철학에 대해] ‘주인을 향해 멍멍 짖어대는 개라든가, ‘짖으며 달려드는 개’,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의 실없는 이야기로 대단한이라든가, ‘지나치게 똑똑한 자들의 무리’, ‘시시콜콜 따지며 생각하는 자들’, 그래서 궁상맞은 자들’,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 이들의 오랜 대립을 나타내는 수없이 많은 표현이 있으니 말일세. (국가10607b)

 

 

 

와 철학의 불화의 역사는 길다. 플라톤에 따르면, 시에 대한 철학의 적대보다 철학에 대한 시의 폄하가 먼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철학에 대한 시의 조롱은 호메로스의 시대로부터 오래도록 권위를 인정받아왔다. 플라톤의 시에 대한 비판은 시라는 장르가 아니라 호메로스의 시가 교육과 통치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점적 권위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전쟁영웅 아킬레우스의 노래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일리아스에는 군법, 전리품의 분배, 선박의 적재와 조정, 의술, 장례절차, 경기운영 등 공동체의 규범과 생활양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당대 사람들은 아킬레우스의 비극적인 운명에 눈물을 흘리며 동시에 공동체의 생활규범을 학습했다. 호메로스의 시는 공동체의 인식의 보고(寶庫), 윤리학, 정치학, 역사학<span style="background:#ffffff;letter-spacing:0pt;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

댓글 7
  • 2019-04-12 23:32

    오호리,, 시? 시...

    시도 한번 봐야겠어요,,,,,,,

    시,, 시 좀 재미없는거 아닌지,,,

    재미없음 안되는데,,,,,,,

    재밌는 시를 골라봐야겠어용 ~

  • 2019-04-13 12:59

    학교에서 교양으로 철학수업을 들을 때는 늘 너무 어렵다... 이거 언제 다 읽고 언제 다 외우나... 하는 생각들 뿐이었는데 이렇게 쓰여진 글을 보니까  플라톤에 대해서 흥미가 생기네요ㅎㅎㅎ 플라톤이고 호메로스고 다시 한 번 배워보고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올리시는 글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 2019-04-13 13:05

      너 소영이지? ㅋㅋ

  • 2019-04-21 20:27

    "시 라는 것은 이 위대한 허무로 부터 시작 한다고."

    • 2019-04-22 07:07

      오잉? 어디에 나온 말인가요?

      • 2019-04-22 15:00

        출처는 모르구요 굴러다니는 코팅된 책갈피에 적힌 글이어요

        공감 백퍼라서 옮겨봤어요^^

  • 2019-04-29 19:55

    언젠가부터 시가 잘 안읽혀...

    새털이 읽어보라고 빌려준 시집도 몇편 읽다가 돌려주고

    히말라야가 선물한 시집도 몇편 읽다가 책장에 올려두고

    마음 속에서 내가 달리고 있기 때문인가봐...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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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6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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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5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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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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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70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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