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습니다 ⑮] 1980년, 광주의 기억 - 한강, 『소년이 온다』

차명식
2019-03-22 06:33
566

 

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⑮

 

1980년, 광주의 기억

한강, 『소년이 온다

 

 

프로필 2.jpg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1.

 

  돌이켜보면 그 때 나는 녀석들에게 무언가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단지 한 사람의 시선에서 역사의 기억을 바라보고 그에 이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 우리와 우리를 지나쳐가는 하루하루 역시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나아가 자신의 질문으로까지 연결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아직 그러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생각했다. 내 바람과 기대는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녀석들과 『쥐』를 읽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소년이 온다』를 읽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하지만 녀석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텍스트와 자신을 연결시켰고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앞서 읽은 책들을 통해 인지했을지도 모를 자기 삶의 문제들을 타인의 기억 속에서 묻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아우슈비츠의 ‘무엇’에 대하여 묻느냐 하는 것에 이미 녀석들 각자의 삶의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녀석들은 그렇게 블라덱 슈피겔만의 아우슈비츠를 각자의 아우슈비츠로 끌어들였다.

 

  그 질문들이 다시 80년의 광주로 옮아가는 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자,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왜, 국군한테……나라한테 죽은 사람들 관을 태극기로 덮었을까요?”
  “어떻게, 나라가 자기 국민들을 죽여요……?”
  “이제 나라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녀석들이 던지는 모든 질문들에 답안지를 적어주는 것은 너무나 멋없는 일일뿐더러 모처럼의 녀석들 몫을 가로채는 일이 될 것이다. 스리슬쩍 정해진 답으로 유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을 수만도 없다. 광주의 기억을 수많은 화자들의 입으로 풀어내는 한강의 문장들은 아우슈비츠의 그것보다도 더욱 친숙하고 빠르게 녀석들에게 가닿아 그만큼 더 절절하고 강렬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광주는 폴란드 남부보다 훨씬 거리적으로 우리에 가깝고, 1980년은 1940년보다 훨씬 시간적으로 지금에 가깝고, 광주에서 들려오는 이름들과 어렴풋이 상상되는 얼굴들은 쥐나 고양이의 얼굴보다 훨씬 더 익숙하다. 이미 시신들을 태우는 냄새와 밤새 도청 쪽을 찢어발기던 총소리, 살아남은 이들의 침묵의 무게가 녀석들을 잡아끈다. 기대에 찬 녀석들의 눈빛과 스스로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나의 준비부족을 힐난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광주를 앞에 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부끄럽게도 그 때 나는 답이라 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정답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만일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녀석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녀석들이 각자의 아우슈비츠, 각자의 광주를 마주한 것처럼, 내가 마주한 광주는 무엇인가를, 그것을 녀석들과 함께 나누어 볼 것이다.

 

 

 

  2.

 

  1980년 5월.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고조되고, 군부는 신속하게 그를 제압하여 일종의 본보기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침 그들 앞에는 한 도시가 놓여 있었다. 야당의 거물인 김대중의 지지기반이자, 서울의 저항이 한풀 꺾인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저항의 불길이 치솟는 도시. 군부는 광주를 봉쇄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한다. 고립된 시민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적막 속에 파묻힌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머지않아 벗겨지고 말 적막 속에.

 

  『소년이 온다』는 바로 그 시절 광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80년 5월의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과 그 일들이 남긴 것들을 다양한 화자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로 엮었다. 거기에는 평범했던 학생의 목소리가 있고, 사자死者의 목소리가 있고, 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다. 목소리들이 산산이 흩어져 있다.

 

  최근에 나는 또 다른 수업에서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이번에는 중학생들이 아닌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의 청년들과 함께였다. 『소년이 온다』만 읽은 것은 아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여성』 등 광주를 다룬 다양한 텍스트들도 함께였다. 심지어는 광주와 유사한 케이스인 칠레 내전에 대한 텍스트들도 읽었다. 그 수업은 애초에 주제부터가 광주 5월 항쟁이었고, 다양한 텍스트들을 접해본 후 직접 광주로 여행을 떠나는 것까지를 목표로 하는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일이 그 수업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큰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어쨌건 그 수업에 참가한 친구들은 모두 열심히 텍스트들을 읽고, 토론했고, 저마다의 질문을 가진 채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물론 나도 함께였다. 다만 나는 무언가 새로운 질문을 가지고 여행길에 오르지는 않았다. 몇 년 전 녀석들과 함께 『소년이 온다』를 읽었을 때 광주에 대한 나의 감상과 평가는 이미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고 나로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커리큘럼의 마무리를 위하여 광주에 간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렇게 나는 광주에 도착했고, 예상치 못한 광주를 마주했다.

 

  무엇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는가를 한 마디로 줄이기도 어려웠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충격적인 경험이 너무나 많았다. 가령 시민군의 마지막 저항지이자 학살의 현장이었던 구 전남도청은 ‘아시아 문화전당’이라는 이름의 정체조차 불분명한 ‘종합예술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미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록관이나 위령공원 같은 곳에 갈 때마다 그 현장을 경험한 어르신들이 그 날의 기억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안달하셨다. 너무나 조악하게 그 기억을 덧칠하려는 시도들과, 너무나 필사적으로 그 기억을 전하려는 시도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오랜 질문이 다시 되살아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쉽사리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답은 조용히 내게로 찾아왔다. 구 전남도청 별관의 2층. 도청 대부분이 아시아 문화전당이 되었음에도, 그에 반대하는 유족들이 점거한 유일한 귀퉁이였다. 그 귀퉁이의 1층은 유족회가 대책본부로 사용하고 있었고, 2층에는 불과 몇 달 전 익명의 시민이 보냈다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흑백의 무성 영상은 80년 5월, 그 때의 광주의 수많은 사람들을 서투르게 촬영한 것이었다.

 

  영상을 보는 동안 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영상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거리의 시위자들, 누워있는 환자들, 늘어선 시신들. 그들의 시선은 모두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나는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영상이 끝날 즈음, 나는 나도 모르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별관을 나와 주변을 거닐면서 나는 내가 왜 울었을까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것을 구태여 말로 표현해보자면 일종의 애틋함이었던 것 같다. 국가로부터 내팽개쳐진 무법의 도시에서도 고결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 그날의 사람들을 기억하겠다는 집념을 오늘까지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애틋함. 또한 그 애틋함은 내가 서 있는 자리 탓에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눈빛으로 무언가 말을 건네어오지만, 나는 그들 사이로 들어갈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놓은 거리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애틋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경계 위에 서 있었다.

 

  그것이 그 여행에서 내가 느낀 것이었다. 그 3일의 여행 동안 내가 마주한 광주는 부름Calling의 도시였다. 그 도시는 끊임없이 1980년 5월을 현재의 순간들로 불러들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 『소년이 온다』 , 100-101p

 

  수많은 추모공원들과 추모시설들, 거기서 만난 유치원,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성인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내게 1980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했다. 지금은 민주화 기록관이 된 구 가톨릭회관 안에서는 바깥 어디에선가 이름 모를 중년 남자가 518에 대하여 무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그 소리가 나를 그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도청 복원 운동 위원회의 아저씨와 상무관의 아저씨, 자유공원의 해설사 아저씨들이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달리 들린다는 사실이 나에게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 강요한 적 없음에도 이 도시는 그것을 자신의 소명Calling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1987년, 80년 광주에게 빚을 지고 있는 그 87년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한 강론을 떠올렸다. 도시는 카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주님께서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탕'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2명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릅니다."라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추모미사 중

 

  하지만 그러한 그들, 그러한 도시의 의지와는 별개로, 국가가 바라는 바는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여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를 위하여 그들이 선택한 단어가 ‘평화’다.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애도이지만 애도가 아니고, 징악이지만 징악이 아니고, 반성이지만 반성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침묵이다. 고통의 기억은 과거의 것으로 고정된다. 그들은 불미스러웠던 과거는 과거로 남기고 대신 밝은 미래를 지향하자고 주장한다. 뜯어 고쳐진 도청의 모습과 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웅비한 이름이 그것을 증명한다. 국민들의 통합을 원하기에, 국가 정부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구태여 광주의 기억을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자신들의 정당성을 누군가 훼손하려 들 때, 그와 같은 때에만 오늘날 ‘민주’정부를 있게 한 디딤돌로서만 그 기억을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러한 타성에 익숙해지리란 사실이 광주에 대한 나의 애틋함을 더욱 부채질한다. 언젠가 도시의 부름은 결국 현재에 닿지 않게 될 것이고 국가와 국민은 그들을 과거에 내버려둔 채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다만 경계에서 그것을 지켜본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문하면서.

 

 

 

  3.

 

  만일 지금 다시 내 앞에 『소년이 온다』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또 녀석들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면, 비로소 나는 나에게 광주가 무엇인지 녀석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광주는 과거의 기억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와 경계를 실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그 거리와 경계를 넘어서서 그 기억을 현재로, 우리 자신의 삶으로 끌어옴으로써 그 기억들을 살아남게 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그러한 노력을 멈춘다면 그 모든 기억들은 결국 망각 속에 파묻히거나, 권력의 필요에 따라서만 끌려나와 그들의 의지에 따른 형태로만 살아남을 것이라 경고한다.
  우리가 그러한 노력을 이어간다면, 이전보다 조금 더 광대하고 세밀한 세계를 우리 자신의 발로 디디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응시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우리-세계는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도록 한다.

 

  나에게 광주는,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은 그 모든 사실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도록 한다. 역사가 오직 분쟁의 씨앗으로만 느껴질 때, 이번 달을 보내기 위해 벌어야 할 돈과 그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할 일들 외의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 밀양과 용산과 세월호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때 문득 떠올리는 광주는 곧게 뻗은 지남철처럼 기억과 나와 세상의 방향을 가리킨다. 길을 잃는 일 없이 내가 따라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준다.

 

  이제 걸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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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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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17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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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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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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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4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9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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