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청년 #7 | '청년 루쉰', 그리고 '청년과 루쉰' (1)

문탁
2019-03-08 19:37
609

‘청년 루쉰’, 그리고 ‘청년과 루쉰’ (1)

 

 

 

1. 청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문탁에서 공부하다 아이 낳고 독박육아를 경험한 후 페미니스트 맘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후배가 있다. 늘 딱했고, 한편으로 기특했고, 언제나 응원하는 마음이었는데 얼마 전 그 후배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다. 자기 세대들이 이렇게 힘들어 진 것은 나 같은 선배들이 가부장제와 제대로 싸우지 않고 적당히 타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이 부당한 현실을 절대, 절대 좌시하지 않고 계속 투쟁하겠다고도 했다.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뭣이라? 싸우질 않았다고? 아니 내가 얼마나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였는데... 운동권 내에서 계급 이슈를 넘어 젠더 이슈를 처음 제기한 것도,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실험한 것도, 여성들 간의 연대를 위해 물심양면, 불철주야 발로 뛴 것도 우리 세대였는데.... 그런데 우리가 싸우지 않았다고?

 

하지만 난 속에서 우글거리던 이 모든 말들을 그냥 꿀꺽 삼켜 버렸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말야 ~~”라고 입을 떼는 순간, 자신들이 젊었을 때는 청춘을 다 바쳐 산업화를 일구었다고 말하는, 심지어 그러면서 태극기를 흔드는 우리 부모 세대와 별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그 말들, 약간은 억울한 그 속내를 우리끼리 모여서 뱉어내고 풀어낸다. 얼마 전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 모임에서 나는 무슨 대단한 봉변이나 당한 냥 앞의 이야기를 토로했고, NGO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친구 한명은 젊은 간사와 소통하는 게 너무 힘들어 병까지 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날 우리의 주요 화제는 ‘요즘 것들’에 대한 뒷담화였다.^^ 혹시 그날 우리는 민주화(세대) 꼰대였을까?

 

민주화(세대) 꼰대가 산업화(세대) 꼰대 못지않게 젊은이들 사이에서 냉소와 경멸의 대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난 그런 민주화(세대) 꼰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런 말이 듣기 싫으면 청년에 대해서 관심을 딱, 끊으면 되는데(그러고도 세상에는 할 일이 많다^^) 나는 끊임없이 청년들에게 이러저런 제안을 하고, 청년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고, 심지어 지금처럼 루쉰과 청년이라는 주제로 뭔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말은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나는 왜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청년들에게 말을 거는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말을 듣기보다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말은 혹시 남자가 여자들에게 하는 멘스플레인( (mansplain: 남성을 뜻하는 man과 설명하다의 explain의 합성어. 레베카 솔닛의 책 제목이기도 한데 국내에는 <남자들은 나를 자꾸 가르치려 든다>로 번역되었다.)처럼 어른이 청년들에게 하는 꼰대스플레인은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청년이 아니라 청년에 대해 말하는 나 자신에 대해, 내가 발화하는 자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동시에 점점 더 청년을(에 대해) 말한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2. <청년 링컨>

 

<청년 링컨 Young Lincoln>이라는 흑백영화가 있다. 서부극의 대가 존 포드 감독의 1939년 작인데 내가 무척 사랑하는 영화이다. 물론 그 이유는 백가지도 넘지만 지금 여기서 주목하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것이 링컨의 청년시절이 아니라 청년 링컨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링컨>은 우리가 아는 익숙한 영웅 링컨의 젊은 시절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청년 링컨은 위대한 링컨으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위대한 대통령’같은 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링컨은 진짜로 ‘위대한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진짜’란 뭔가? 스필버그의 <링컨>은 혹시 이 질문 아니었을까?) 영화 초반부에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는데 죽은 애인(그 애인이 링컨에게 늘 도시로 나가 변호사가 되라고 말을 했었다) 의 무덤 앞에서 막대기를 꼽아 자신의 미래를 점치는 장면이다. “내 쪽으로 넘어지면 마을에 남고, 네 쪽으로 넘어지면 법 쪽으로 갈게” 나뭇가지는 묘비 쪽으로 넘어진다. 청년 링컨은 중얼거린다. “네가 이겼으니 법을 공부할게” 그러나 곧이어 “내가 네 쪽으로 살짝 민 걸까?”라고 자문한다. 영화에서 막대기가 죽은 애인 쪽으로 넘어간 운명은 “내가 네 쪽으로 살짝 밀었”을 지도 모를 의지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운명과 의지가 구별되지 않는 영화 처음 부분의 그 장면은 영화 내내 지속되는 모호하고 느리고 침울한 링컨에 달아 붙어있다.

 

 

 

“<젊은 날의 링컨>은 불가사의한 영화다. 앞에서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영웅설화를 구성하는 극적 사건과 결단의 행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사건과 행위에 포섭되지 않는 일화와 농담들, 표정과 몸짓들, 기운과 예감들, 그리고 빛과 음영과 풍경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잉여들이다. 반복해서 보면, 이 영화는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를 끝없이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하면, 잉여들이 살아 움직이며 극적 사건들의 전개를 끝없이 교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고전영화와 모던영화가 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은밀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젊은 날의 링컨>은 소명과 의지의 송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훼손하거나 따돌리는 오점과 얼룩들의 난장이며, 그들 모두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음성과 죽음과 풍경의 노래다. 그들의 소란스런 화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전설은 진리의 언명에 순종하는 정태(靜態)의 구조이지만, <젊은 날의 링컨>은 흐르고 번잡하고 활동하는 삶의 시학이다.” (허문영, <젊은 날의 링컨>에서 출발하다, http://www.kmdb.or.kr/story/6/4)

 

 

 

이 영화 안에서 노예해방의 영웅,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 속의 링컨은 없다. 영화 속의 링컨은 언변에 능하되 만담가에 가깝고, 몸을 쓰는데 능하되 반칙을 서슴치 않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인 살인사건의 법정장면. 피고를 변호하는 링컨은 치밀하고 논리적이고 사명에 넘친다기보다는 시종 딴 짓을 일삼는 듯 보이고 다소 능청스럽거나 건방져 보인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 하지만 그는 대중들의 환호에 당황한다. 그리고 승리를 구가하는 대신 예의 그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홀로 걷는 길을 택한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고 바람은 불고 심지어 천둥까지 친다. 그 길을, 끝없는 울타리 옆의 길을, 청년 링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걷고 걸어 결국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물론 우리는 그 다음의 역사적 전개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매 순간 맞닥뜨리는 사건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불려간 것인지 모호하다. 다음 사건이 앞의 사건과 인과가 있는 지 없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청년 링컨은 기꺼이, 주저하며 그 사건(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살아낸다. 거기에는 “흐르고 번잡하고 활동하는 삶”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여 <청년 링컨>은 드러나고 쓰인 링컨의, 드러나지 않고 쓰이지 않은 이면이고 공백이며, 결코 언표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이다.

 

 

 

3. 청년 루쉰

 

청년 루쉰을 <청년 링컨>처럼 쓸 수 있을까? 바라는 바이지만, 글쎄다.

 

 

루쉰은 몰락한 가문의 장손이었고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다. 전당포를 드나들면서 집안의 가재도구를 팔아 겨우 겨우 부양했던 병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비로소 자신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열여덟 루쉰, 그는 진저리치듯 고향을 떠나 중체서용, 실학의 기치를 걸고 만들어진 ‘강남수사학당’이라는 일종의 해군양성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곳은 물과 배에 대해 가르치기 보다는 여전히 군자와 효도에 대해 가르쳤고, 학교의 운영 역시 연줄과 관료주의에 의해 움직였다. 결국 그곳을 그만두고 이번엔 ‘광무철로학당’이라는 곳에 진학했다. 드디어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곳은 곧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한 곳이었다.

 

한편, 도망치듯 고향 샤오싱을 떠난 루쉰은 과연 선장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광산개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중국의 몰락을 목도하면서 사서삼경이 아니라 격치, 수학, 지리, 역사, 제도, 체조 등의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중간에 과거시험은 왜 본 것일까?

 

어떤 것도 명료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사후적으로 종합할 수 없다. 루쉰은 다만 길을 나섰고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는 중이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일본까지 간다. 도쿄 – 센다이. 어느새 스물 넷의 청년 루쉰은 센다이 의전에 머물고 있다. 후지노 선생을 만나고 그 유명한 ‘환등기 사건’이후 센다이를 때려 치고 도쿄로 나와 ‘문예운동’을 해야겠다고 맘을 먹는다. 스물 여섯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 나는 이 때가 루쉰의 생애에서 아주 드문, 거의 유일하게 파이팅 넘치는 때였다고 생각한다 – 마음 먹은 잡지 발간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족을 한 여인과 구식 결혼을 하게 되고, 몇 가지 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기개 넘치는 몇 편의 논문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 (어떤 점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속한 신청년–개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낡은 세계에 속한 한 가문의 종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루쉰은 귀국 후 깊은 적막에 빠진다. 그리고 후에 자신은 그 적막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쳐 날뛰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나를 국민들 속에 가라앉히기도 했고 나를 고대로 돌려보내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영혼을 마취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루쉰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서 글을 청탁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철방의 비유!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게.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무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그렇다.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있었지만, 희망을 말하는 데야 차마 그걸 말살할 수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 소관이고 절대 없다는 내 증명으로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도 글이라는 걸 한번 써 보겠노라 대답했다.” (1922, <외침> 서문, 전집2권)

 

 

루쉰은 희망과 낙관에 결의에 불타오르는 ‘신청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눈을 뜨면 빛이 아니라 반대로 어둠이 도래한다는 삶의 역설, 반-계몽의 구도를 깊이 이해했던 인물이었다. 삶은 희망으로도 절망으로도 의미화되지 않는다. 다만 의도, 의미, 표상을 넘어서 있을 뿐이다.

 

그는 눙치면서 혹은 에둘러 자신의 글은 친구들을 응원하기 위한 ‘외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루쉰이 그 순간 찾은 삶의 출구였다고 생각한다. 열여덟에 고향샤오싱을 떠난 일, 다시 도쿄로 유학을 떠난 일, 단발을 감행한 일, 도쿄에서 다시 센다이 의전으로 방향을 바꾼 일, 계몽적 파토스가 가득한 논문을 썼던 일, 베이징에서 직장생활을 버티기 위해 하루하루 고문을 베끼고 비석을 탁본했던 일, 그 모든 것은 마침내 <광인일기>를 쓰기 위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광인일기>를 쓴 일 역시 앞의 다른 일처럼 더 의미 있는 것도 의미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앞의 것들처럼 루쉰이 찾은 ‘다른’ 출구였을 뿐이다.

 

청년 루쉰. 그는 삶에는 정답 따위가 없지만 최선을 다해 답을 찾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의 방법은 없다는 것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그래서 그도 우리도 다만 있는 힘을 다해 걸을 뿐이다.

 

 

 

 

 

 

----------------------------------다음 회에 아래로 소제목으로 이어집니다.

4. 청년‘과’ 루쉰

5. 청년과 연대한다는 것

댓글 1
  • 2019-03-11 10:02

    음...요즘 고민이 '왜 나는 내가 계획한 것과 반대로 행동하게되는가'인데..그것까지도 제가 계획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띠우
2024.04.28 | 조회 1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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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8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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