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습니다 ⑥] 독립이라는 ‘자유’ - 라헬 하우스파터,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차명식
2018-08-1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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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독립이라는 자유

라헬 하우스파터,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프로필 2.jpg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여름이 왔고, 아이들과의 책읽기도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다.

 

  시즌이 바뀐 뒤의 첫 시간에는 으레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자기소개를 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전부터 있던 아이들은 다 아는 사람들에게 굳이 자기를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새로 온 아이들은 낯을 가리느라 제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나는 일종의 타협점으로써 아이들에게 딱 세 가지만 말해볼 것을 제안했다. 이름, 나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 이렇게 말해야 할 것들을 정해주면 아이들은 어렵잖게 대답한다. 그리고 처음 오는 아이들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대개 다들 같다.

 

  “엄마가 가보라고 해서요.”
  “저 몰래 엄마가 신청했어요.”

 

  가끔은 “아빠가…….” 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자기 의지로 오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별로 놀랍지는 않다. 중학생들이 자신의 의지로 어떤 일을 하려드는 경우도, 그것을 부모들이 허락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니까.

  그런 면에서, ‘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 여름 시즌에 아이들이 유독 ‘이 단어’에 매달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독립.

 

 

 

  1.

 

  라헬 하우스파터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는 아주 얇고 짧은 소설이다. 어느 날, 어린 주인공의 부모가 이혼하여 별거하게 되고 주인공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격주 주말에 한 번씩만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는 밤마다 울며 괴로워하느라, 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느라 주인공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은 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의 어머니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버지도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가족’은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 역시 부모들과 ‘이혼’하기로 마음먹는다.

 

  주인공은 더 이상 주말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에게 간다고 하고,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 있겠다고 하면서 그 시간들을 할아버지가 남겨준 도심의 옥탑방에서 홀로 보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오직 주인공을 통해서만 서로에게 필요한 말을 전하던 부모들은 그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한다. 주인공은 혼자만의 시간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사건들을 만나면서 부모님의 아들인 자신과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결국 거짓말이 들통 나고 부모들은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주인공을 힐난한다. 그에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과 자신이 홀로 보낸 시간에 대해 부모들에게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 책을 커리큘럼에 넣으면서 기대했던 역할은 일종의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짧은 소설을 가볍게 읽으면서 책읽기에 대한 집중력을 유지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들은 이 책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으로, ‘독립’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제각기 할 말들을 쏟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독립’은 녀석들에게 무엇보다도 ‘자유’를 의미했다.

 

  “나는 평소 독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독립을 하면 내가 무엇을 하든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된다 (...) 나에게는 5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초등학생 특성상 만들기 활동이 많고, 우리 동생은 그것들을 다 모으는 성격이다. 매우 지저분하다. 나는 정말 인상 깊은 과학 실험기구들을 몇 개 빼고는 모두 버린다. 우리 엄마아빠는 전부 버리고 싶어 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가끔 싸우게 되는데 혼자 살게 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출 수 있다.” - 선희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감상문 중에서

 

 

  녀석들에게 있어 ‘독립’이 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부모로 대표되는 ‘집과 가족’이 구속이라는 뜻이리라. 여기에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한 번쯤 갖게 되는 의문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왜 부모님은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인지. 왜 자꾸 내 의지를 무시하고 자기들 뜻대로 내 일을 결정하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는 자기들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인지. 내가 자기들 말을 들어주기만을 바라고, 내 말은 듣지 않는 것인지.

 

  왜냐하면, 집안에서 아이들이란 보통 그런 존재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숙하고 서투르기에 알아야 할 것도 많지만 몰라도 되는 것도 많다. 그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기준, 말과 행동, 생각, 나아가 생활 전반에 걸쳐 부모들은 아이들의 모든 것에 참견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이 집만, 집만 나가서 오직 나만의 쉼터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되는 것이다.
  가족에게서 독립하는 것, 그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대개 ‘안전’은 ‘구속’과 한데 묶여있고, ‘자유’는 ‘위험’과 한데 묶여 있다.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정한 책임을 짐으로써 안전을 보장받고, 자유란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가족 또한 하나의 소속이다. 또한 가족은 현대 사회에서는 한 명의 개인에게 있어 가장 밀접하고 기본적인 단위의 소속이기도 하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아이들조차 한편으로는 독립이란 단어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 그러한 까닭이리라. 홀로서기는 그동안 나를 보호해주던 그 모든 것, ‘안락한 나의 집Sweet home’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부모가 없으면 많은 것이 바뀔 것 같다. 일단 뒤에서 받쳐주던 지지대를 잃어버린 느낌과, 앞에서 두려움을 막아주는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일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느낌도 들 것 같다. 왜냐하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나를 옥죄는 가족도 없고, 나를 구속하는 어떤 것도 없으니 말이다.” - 효준이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감상문 중에서

 

  집 밖으로 내딛는 그 한 걸음은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보면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에 대해 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감정이 많이 묻어났다. 책의 주인공에게는 할아버지가 남겨준 자신만의 방이 있었고, 홀로 박물관이며 수영장을 찾아다닐 의지가 있었고, 낯선 할머니나 대학생 누나와 거리낌 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부모에게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걷겠노라 포부를 밝힐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들은 집을 떠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자문할 때 녀석들의 표정에는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책의 아이가 부럽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의 용기도 부러웠지만 무엇보다 아이 자신이 살 집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 정우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감상문 중에서

 

  어쩌면 누군가는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 부모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며 혀를 차거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에게 나는 집 밖의 세상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더 낯설어졌는가를 말하고 싶다. 아이들의 하루는 대개 그 길이 정해져있다.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가고, 학원을 들러,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아이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몇이나 될까? 가족 외에 아이들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들은 몇이나 될까? 돈 혹은 제도로 맺어진 책임과 의무 없이도 그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가 되어줄 어른들은 집 바깥 어디에 있는가?

 

  타인은 과거의 사회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낯선 어른과 그들이 베푸는 낯선 친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는 동시에 집이라는 공간의 안전함과 가족이라는 방파제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독립은 자유, 정말로 낯설고 두려운 세상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질 자유이며,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깝고 헌신적인 인간관계로부터 멀어지는 고독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사실은, 이 낯선 세상에 유일한 방패처럼 말해지는 그 가족조차도 사실 아주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또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3.

 

  그 때 나는 아이들에게 바로 그 사실을 설명하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오늘날 독립이 왜 그렇게나 달콤하면서도 쉽지 않은 말이 되었는지를. 가족이 얼마나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자, 상상해보자.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 너희의 삶은 어떤 모습이지? 혹은, 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 너희의 삶은? 엄마와 아빠의 아들 혹은 딸이 아닌 너희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 중 문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책에 집중하지 못하던 아이였는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성민이, 넌 어떨 것 같애?”

 

  그 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입을 열지는 않고 그저 눈만 깜박이면서.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했고, 그 애는 그저 “그냥 그래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비슷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넘겼다.

 

  나중에 알기로, 그 아이의 집은 이혼가정이었다.

 

  나는 뱃속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날 이혼은 드문 일이 아니고, 이상하게 여기거나 지나치게 안타깝게 여길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 아이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책은 잘 안 읽어도 장난기가 많고 그를 숨기지도 않았다. 만일 나 역시 다른 경로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평범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상황이 너무 절묘했던 탓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생각도 든다. 전통적인 핵가족의 이미지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머릿속 깊은 곳에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 때 나에게는 내 말을 그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정확히는 ‘엄마 혹은 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 삶을 낯설게 여기고 상상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이 나와 그 아이 사이에, 또 내 말을 듣고 그 ‘낯선 상황’을 상상하느라 애쓰던 다른 녀석들과 그 아이 사이에 벽을 놓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그 이후로도 그 아이가 딱히 내게 거리를 둔다거나 수업에 나오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녀석은 여전히 책 읽는 걸 지겨워했고, 장난스런 말들을 툭툭 내뱉었으며, 수업 시간마다 크게 하품을 했다. 다만 여름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 아이는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그 애는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종종 나와 마주치곤 했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 그만두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님 그저 내가 그러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고. 확실한 건 그 일이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미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감각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그것을 낯설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남의 가족 사정에 대해 캐묻는 일이 드물고 그만큼 우리 주위에 엄마-아빠-아이가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교육과 미디어는 또 어떤가. 학교와 각종 매체는 아주 무심하고 당연한 태도로 ‘엄마와 함께 해오는 무언가’, ‘아빠와 함께 해오는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건넨다. 아이들은 물론 ‘저는 엄마, 혹은 아빠랑 같이 안 사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묻지 못한다. 우리는 아이들로 하여금 낯선 세상을 두려워하고 가족에 의지하라 가르치면서, 그 가족의 모습 또한 지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그려낸다. 물론 우리 자신 역시도 그러한 이미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지금보다도 더욱 많은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혼이 이미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 것처럼. 집 바깥의 세상은 더욱 낯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그 때도 여전히 가족은 유일한 방파제로서 남게 될까? 애초에 그 ‘가족’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족과 같은 것일까? 그 때 아이들에게 있어 독립은 무엇이 될까? 그 자유와 두려움과 고독은 어디로 향할까?

 

  나는 단지 상상만 해볼 뿐이다.

댓글 1
  • 2018-08-18 11:23

    독립이란 뭘까? 결코 독립적 존재로 살 수 없음에도

    우리는 언제나 독립(혹은 자립)을 꿈꾼다.

    한 때는 경제적 독립만이 독립의 유일한 조건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고

    의존적 인간관계에서의 심리적 독립, 정서적 독립이 중요하다고 절감한 적도 있었다.

    중학생들도 꿈꾸는 독립, 과연 독립이란 무엇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족과 항상 쌍을 이루는 독립이란 꿈, 혹은 과제?? 넌, 누구냐?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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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7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1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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