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어진 밀양통신 - 6회] 또래 친구

밀양통신
2018-07-10 01:53
718

또래 친구

  

 

 

 

 

어지니 프로필01.jpg

  글 : 남어진 

 

안녕하세요. 저는 남어진이라고 합니다.

201310월 공사가 들어왔을 때, 학교 그만두고 밀양에 왔다가 눌러 앉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에서 일했고, 지금은 노가다일을 합니다만, 

여전히 탈핵 탈송전탑 세상을 간절히 바라면서 밀양 할매 할배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의 실패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나를 걱정할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살이 더 빠져보인다, 얼굴이 힘들어 보인다.”이다. 반면에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친구가 없어서 심심하겠어요.” . 지금까지 이 말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거나 속이 상한 적이 없었다. 그냥 인사치레로 생각하고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거니와, 오히려 타인이 나의 고생을 이런 식으로 위로해주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고됨이나 외로움은 걱정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밀양 할매들과 대책위 식구들이라는 즐거움을 나누는 친구이자, 고됨을 견디는 동료가 있었다. 이들은 띠동갑, 두 띠동갑, 세 띠동갑도 넘는 나이에도 나를 존중해주었고, 그래서 나는 남들이 보기에 미친 듯이살 수 있었다. 50대 농부가, 20살짜리에게 꼬박 꼬박 이라고 불러주는 일은 흔치 않다. (모두 이렇게 사는 세상이 오면 참 좋을텐데   

 

할매들젊은 나이에 친구들이랑 놀지도 않고 여기에 계속 잡혀서 어쩌노.”라는 말을 하실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여기도 즐거운데, 왜 저렇게 이야기를 하실까라고 생각했다. 백수가 되어 놀기 시작한 지 세 달, 이제야 내게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 둘 느껴진다. 집이나 자동차 같은 것들은 없으면 몸이 조금 힘들 뿐이지만, 남아도는 이 시간을 함께 보낼 친구가 없으니 너무나도 심심하고 허하다. 흥이 점점 사라진다. 문득 문득 재밌을 것만 같은 일거리(돈을 왕창 벌 아이디어.ㅋㅋ)가 생각나도 내 머릿속 상상으로만 끝난다. 어디 말할 곳이 없으니 메모를 하다가도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상은 말로 내뱉고, 돌아오는 말을 받아야 커지기 마련인데 그런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라도 들어줬으면, 응원해주었으면 넘길 수 있는 고통, 분노와 같은 것들은 나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고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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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또래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막상 또래 친구를 만나려면 두렵기도 하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내 입에서 완전 꼰대 같은 말들이 튀어나오기(나오려하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렇다.”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면 부끄럽고 미안하다. 점점 말수를 줄이고 또래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다. 수 년 동안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예의 바름적당히 무시할 수 있는 배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이 내가 무시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변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어떻게 해야 이 깝깝한 삶을 신명나게 되돌릴 수 있을까. 돈 열심히 벌어서 맛있는 거 사먹고, 사고 싶은 옷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는 것은 좀 슬프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속했던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라는 조직에서 빠져나온 지금, 같이 무언가를 작당 해볼 친구는 곁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걱정한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조금은 알겠다. 나는 일상의 친구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근데 나만 그런걸까.

 

 

도시든, 시골이든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벗어나 큰 도시로 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작은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해봤을법한 생각이다. 일거리도, 놀거리도 없는 이 공간에서 고립감과 ‘NO은 아주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동기부여가 되면서 먹고 살만한 일재밌는 놀거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사람이 살아남는 방법은 매우 한정적이다. 부모님에게 공구상이나 농사일 같은 사업을 물려받거나, 나처럼 일용직 혹은 알바로 돈을 버는 일 정도가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에는 큰 돈도 되지 않는다. 소멸해가는 소도시에서 젊은 사람이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보니 한 지역에서 오래 버티는 청년들을 만나기가 힘들다. 2016년 여름, 밀양 청년 여럿이 모여 놀아보자며 너나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7~8명의 사람들이 함께 했는데 2년 만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는 광역 범위가 바뀌었다. 우리는 서울로, 부산으로 각자 할 일을 찾아 떠났다.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가 없는 것이 마치 모래 위 잡초가 홍수에 쓸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친구를 잃어 가다보니, 자연스레 사람이 많은 곳을 동경하게 된다. 그곳에는 더 많은 일거리와 놀거리, 기회들이 가득할 것만 같다.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좋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간 것 같은데, 그래서 당신들은 즐거운가. 당신들의 대답이 꼭 듣고 싶다. 대부분이 여긴, 나름 즐거워라고 말한다면 나도 내일이라도 짐을 싸고 도시로 가고 싶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곳에 사는 청년들은 어떤 처지일까. 그 곳도 먹고 살기 힘들고 모여 놀기는 더 힘들까. 일에 치이고, 꼰대 상사에 치여가며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희망이 없는 세상인데 우리는 뭐가 좋다고 꾸역꾸역 살까. 그만두면 갈 곳이 없어서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세상을 이따위로 만들어놓은 인간들은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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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또래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동의 경험(먹고 사는 일이든, 노는 일이든)이 얼마나 소중할까 생각한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청년 정책이랍시고 매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첫 번째가 일자리문제, 두 번째가 주거 문제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들만 해결된다고 우리네 삶은 바뀔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안정적인 집과 일이라는 결과만큼, 목적지 까지 걸어가는 과정 또한 중요하지 않나. <또래가 함께 겪는 공동체적 경험>은 삭제시키고 모든 것을 <돈과 힘으로 세운 질서>로 돌아가게 만드는 사회는 그 길을 좁고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뜻 있는 일들을 시도하는 순간 빈곤해지고, 피곤해지다가 망할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함께 이루는 즐거움만이 깊은 고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은데, 그것을 도모하는 순간 망하는 모순적 상황을 맞고 만다. 집 생기고, 돈 잘 번들 삶이 즐겁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청년의 이름으로 세상과 싸우는 우리들의 논리도 빈약하긴 마찬가지다. 젊은이의 몫을 더 달라고 싸울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몫을 만들어내는 방법 자체를 바꿔내야 한다. 나의 처지가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지만, ‘친구와 인생 재미나게 놀다가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제일 두렵다. 아재들만 가득한 시골에서, 모든 것이 버글버글 하지만 홀로 외로울 도시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 씁쓸한 위로가 전해지길 바라며,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과 일하면서 조기 꼰대화가 되지 않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을 응원하며, 언젠가는 함께 일터에서 만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누군가를 억압하고 삭제시키지 않고, 혼자 희생하지 않고, 함께 고생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NM

 

 

댓글 7
  • 2018-07-10 02:36

    도시에서 살 사람과 시골에서 살 사람이 어디 정해져있당가.

    나 역시 문탁에 또래 남자친구들이 버글버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 2018-07-10 07:45

    함께 놀고 작당모의할 또래들이 모일 여유가 없는 삶이라니... 확 다가옵니다.

    돈과 모더니티 에세이이군요^^ 

  • 2018-07-10 09:28

    어진아,  동천동에 친구들 많잖아?

    어진아, 길드다 객원회원 할래?

    춘천에도, 밀양에도 길드다 회원으로 있을 수 있어.

    일단 한달에 한번 올라와서 뭔가를 해보는 것,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디.

    그리고...음.....공부해야 하는데, 괜찮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18-07-10 11:18

    몇년 전 광주에서 올라와 문탁에서 공부하던 수아가... 외롭다고 울었던 것이 기억나네.

    수아도 ..우리도.. 또래가 없어서라고... 진단했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래도...나는...조기 꼰대화가 원인일듯한데...

    조기 꼰대화된 동류들을 찾아나서심이 어떠실지...^^

  • 2018-07-10 19:27

    '함께 하는 즐거움을 도모하는 힘'..... 어떻게 키울까.... 나에게도 어려운 질문^^

  • 2018-07-11 10:33

    요사이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느낀건데요,

    민주주의와 우정이 같이 간다는 거에요.

    우정은 위계적 사회에서는 싹틀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또래 친구가 더 중요해졌을까요?

    암튼 저도 요사이 우정이 화두로 올라와 있습니다.

  • 2018-07-11 11:50

    아이고 우리 어진이 보러 8월에 밀양 가야지~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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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9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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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7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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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7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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