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20대의 탄생 1회] 지원 - 수단이 되는 삶

김지원
2018-03-20 07:26
1144

다른 20대의 탄생

 

 

대학을 안 가고, 못 가고, 자퇴한 우리들의 이야기. 학교를 관두라는 말, 직장을 관두라는 말은 많지만 어떻게 살라는 말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20대의 탄생은 세 명의 20대가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질문들을 던지고 길을 찾아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담은 글이다.

 

 

 

 

 

 

 

 

다른 20대의 탄생 #01

수단이 되는 , ?’라고 질문하기

 

 

 

 

지원 프로필02.png

: 김지원 (길드; )

 

 

천재는 27살에 요절한다던데, 스스로 천재라 믿고 산 나는 28살이 되어버렸다. 대학졸업장도, 자격증도 없다. 대신 지난 5년간 공동체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목수 일을 해왔다. 그 간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살 길을 모색해보려 한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5년 간 다니던 목공소를 그만두고, 현재 준 백수(반쯤은 프리랜서)가 되었다. 내 삶은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다. 나는 기껏 모아놓은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퇴사 직전 유럽여행에 모두 썼고, 부양해야할 가족은 없지만(어쩌다 보니 함께 살게 된 개 한 마리가 있긴 하다.) 내 가족도 나를 부양해줄 수 없다. 말인 즉, 매달 월세를 내야하고, 생활을 위한 벌이를 해야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간단하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과 사지 멀쩡한 몸, 그리고 5년 간 익힌 목공 기술이다. 누군가는 내가 가진 것을 듣는다면 충분하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5년 치 목공 기술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나 우리는 모두 무언가 하나쯤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것이든 익힌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보다도, 남들이 모두 가진 것을 일단 가지길 원하는 것 같다. 대학 졸업장이 그렇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는, 이런 필요가 만족될 때에만, 충분한 것이 된다.

    

 

 

여행이라는 목적

    나는 다행히 고등학교 졸업장은 가졌지만, 불행히도 대학 졸업장은 가지지 못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음대를 가고자 했으나 내가 원한 대학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다. 물론 다시 도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대를 가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의무감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미 3년 남짓을 그렇게 준비 했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했다. 또다시 1년을 의무감으로 음악을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은 현재의 내 삶을 즐겁게 하고 풍요롭게 하던 음악을,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대학에 모두 떨어지고, 용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여러 곳에서 알바를 했다. 빵집, 편의점, 스크린 골프장 카운터, 공사 현장, 이사 현장 등. 돈을 벌고, 쓰는 경험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알바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고, 의외로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달에 90만원 남짓을 벌면서 순진하긴 했지만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알바는 지나쳐 가는 곳이다. 나보다 늦게 들어 온 내 또래의 알바생도, 2년 넘게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형 누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만나고, 먹고, 사는 이 일터를 다음 단계를 위해 지나쳐 가는 곳으로, 지나쳐 가야할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열심히 술을 마셨다.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재수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나 사이 어딘가에 차이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똑같은 술을 마시는데도, 목적이 있는 그들에게 술은 휴식이고 여가인 반면, 나에게는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나는 특정한 목적 없이 알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벌고 있다! 그러니 친구들은 나에게 물을 수밖에. ‘뭐하고 살 거냐?’라고. “필리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가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삶의 목적이 술인 것 보다는, 아무래도 여행이 더 멋지다. 그 때부터 내 삶의 목적은 필리핀 여행이 되었다. 친구들은 부럽다고, 멋지다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말의 힘인지 술의 힘인지, 나는 그 해 가을 정말 필리핀을 가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신기할 것은 없다. 겨울에 입대하게 된 나는 말만 떠벌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가야했으니까. 나름의 절박함이었다. 여행을 가기 두 달 전부터 일을 조금 늘리고, 술을 조금 줄였다.

 

 

무엇을 위해?

    돈이 없었던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홈스테이를 선택했다. 홈스테이는 마닐라 소재 NGO를 통해 난개발로 사라져 가는 판자촌 동네에 머무르며 일도 돕고, 생활을 함께 하는 일종의 국제교류-체험 프로그램이었다. 보통은 하루 이틀의 짧은 체험으로 끝나는 홈스테이를 나는 개인적으로 가정에 부탁해 2주 동안 머물렀다. 내가 머물던 가정이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집이었던 덕에 나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을 알게 되었다. 또 음악을 하는 친구였던 그 집 아들 덕에 밤마다 동네 클럽에 가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삶의 모습에 놀랐다.

    그들의 삶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하지 않았다. 물론 서울이 누리는 소위 위생적인 삶이나, 편리한 교통 시스템, 교육, 의료 복지 혜택 등 선진국의 삶으로부터는 한참 떨어져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은 이랬다. 나는 처음 내가 머물 집에 갔던 며칠간 누가 이 집의 가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0여명 남짓의 사람들이 집을 들락거리는데, 모두가 이 집의 주인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먹을 것을 가져오고, 먹을 것을 내주고, 청소를 도와주고, 설거지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잘 나오지도 않는 TV를 본다. 내 것과 네 것,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하다. ‘엄마와 두 종류의 야채를 사기 위해 집 근처로 장을 보러 가는데 2시간이 걸린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20분씩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골목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을 찬다.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말리지 않는다. 그걸 말리려던 나를 보고 한 아저씨가 말한다. 사람들은 평생 싸우기 때문에 그걸 배워야한다고. 주말에 가족을 따라간 교회는 경건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신성모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파티를 한다. 장난기 많은 얼굴의 괴짜 같은 젊은 신부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아닌, “현재 즐거움을 주는 기쁨의 신앙이 진짜라고 말한다. 난 교회가 이런 식이라면, 한국에서도 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 친구들은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며 나에게 무엇을 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위해?”라고 묻지 않고, “?”라고 물었다. 이 두 질문은 언뜻 같은 말인 듯 보이지만, 다른 말이다. 전자는 내 행위를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가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는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그러나 후자는 더 포괄적이고, 현재적인 질문이다. 여행이나 돈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라는 질문 앞에 서면, 그런 말들은 같은 질문의 반복을 불러올 뿐이고, 힘을 잃는다. 그들은 나에게 계속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미래에 행복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현재의 불안한 삶을 극복하기 위한 강박적인 믿음일 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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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하루

    군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이 명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내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렵지 않았지만,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군대는 상명하복의 문화, 이를 이용한 부조리와 인권침해가 보통의 일상에 산재해 있다. 이런 일상은 내 안에 일종의 분열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할 수밖에없도록 하는 일상의 흐름이 늘 문득 떠오르는 질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군 생활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하면 힘들어지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를 질문하지 않은 채 열심히 보내고, 매일 밤 열심히 보낸 하루하루를 PX에서 먹은 라면 봉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이 쓰레기 같은 일상을 며칠이나 더 보내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300일 남았다. 299일 남았다. 남은 군 생활이 줄어드는 것이 당시 나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미래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역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마자, 모른척하고 쓰레기통에 버리던 내 구체적인 삶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임이던 시절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한 선임의 모습을 내 모습에서 발견했다. 후임에게 빨래와 PX심부름을 시키고, 전투화 손질을 맡기고, 불침번을 대신 서게 하고, 나는 TV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었다. 후임들이 한쪽 구석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쟤는 걔보다 더하다함께 괴롭던 시절에는 같이 선임을 욕하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내가 욕을 먹고 있었다. 나는 군대가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나 자신을 합리화해왔다. 그게 늘 내가 싫어했던 선임이 나에게 하던 말이었다</

댓글 11
  • 2018-03-20 09:06

    다른 20대 지원 고은 동은의 연재 시작합니다

    다음 필자들의 글도 기대해주세요^^

  • 2018-03-20 10:40

    삶이 수단이 된다니...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삶이 습이 되어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네요 ㅠㅠ

    맑스에서 스피노자에 이어 돈과 모더니티까지 함께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느껴왔던 지원이의 질문들.

    여기서 풀어가게 되는군요. 

    변신을 거듭하는 지원이가 마주했던 것들과 그 질문들 궁금합니다. 

    아마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질문이었거나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일테니까?

  • 2018-03-20 13:44

    지원스~ 행복하자요. ^__^

  • 2018-03-20 17:02

    군대는 특수한 집단이 아니다특수하다는 믿음이 합리화를 도와주는 것뿐이다

    : 이 문장이 확 꽂히는 것은 요즘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라서 ㅋㅋ


    '특수하다'를 특이하다로 또는 다르다로 바꾸어 보자면^^


    다르다는 '믿음'이 혹 우리가 하는 많은 행동과 말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질문으로 튀면서^^ 김지원의 글이 더 또렷하게 읽히네요^^


    다음 필진의 글도 기대 기대~

  • 2018-03-20 18:33

    제가 요즘 오마이뉴스에 글을 연재하는데 

    <다른 20대의 탄생> 필자들도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해서 글을 올려봤으면 좋겠단 생각이 드네요. 

    문탁 내에서만 읽기보다 많이 읽혀지면 좋겠어요. 청년들 이야기가 워낙 없어서...생생하고 재미있게 와닿아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글쓰기 훈련도 될 수 있고요.  

    (*글의 퀄리티는 오마이뉴스 매일 들락거리는 제가 보기엔 이정도면 훌륭! 대신 분량은 인터넷 기사이니 

    A4 -3 페이지 이내로 줄여서요. (원고료로 조금 주더라고요. ) 

  • 2018-03-20 22:53

    재밌네요!

    뭔가 저의 삶의 좌표와 가까워보여서 더 와닿은 것 같아요.

  • 2018-03-21 06:09

    재미있네요~!!

    쓰레기통에 버린 줄 알았던 하루하루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다니...!!!

    왜? 라는 질문으로 내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 나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 2018-03-21 06:13

    아~ 저 한자를 들고 있는 사진은 무엇일까요~??

    • 2018-03-21 18:53

      논어의 한 구절, 삼십이립^^

  • 2018-03-21 09:57

    다른 20대의 이야기 재밌네요. 전 그시절 고민없이 남들이 옳다는대로 살았는데..

    문탁의 20대들 응원합니다!

  • 2018-03-21 18:55

    악어떼 수업하려고 기다리며 글 읽다가 완전 놀람. ㅎㅎ

    나두 지원이의 '왜?'룰 응원합니다!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동은
2024.05.14 | 조회 126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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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8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82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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