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의 사상가 - 맹자 1회] 지금, 맹자를 읽는다는 것은?

문탁
2018-06-19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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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사상가 - 맹자]  # 1회

지금, 맹자를 읽는다는 것은?

 

 

 

우연히 동양고전에 접속해서 지난 10년간 정말 빡세게 읽었다. 많이 배웠고,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나름 바뀌었다.
어쨌든 갈무리가 필요하다는 생각, 혹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공자님에게? 하하. 그럴지도.
하지만 우선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에게 그동안 떠들어댔던 말들을 공들여 주워 담아 전달해보려 한다.
친구들이여, 잘 읽어주길!

 

 

 

 

 

 

 

문탁샘 프로필.jpg

 

 

 

글 : 문탁

 

새털이 말한 것처럼 

난 문탁에서 ‘쪼는’ 인간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힘에 부친다.
‘원로원’을 만들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다.
청년들을 핑계로 서울에도 거처를 마련하고,

문탁연수원을 핑계로 지방에도 거처를 마련하여
국내에서라도 유목하며 사는 게 꿈이다.

 

 

 

 

 

 

 

1. 어느 게 진짜 맹자일까?
 
  작년에 『맹자』를 두 번째 읽었다. 사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맹자』 완독에 1년이나 걸린다는 게 가장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책들을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나 더 문제는 그렇게 다시 읽는다고 해서 맹자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할 것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처음 『맹자』를 읽을 때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에는 누가 뭐래도 원조의 아우라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공자의 함축적 문장들 – 예를 들어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혹은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같은 문장 –은 맥락을 짐작하기도 어렵고, 쉽게 해석하기도 힘들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리를 긴장시킨다.
  『노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단 여섯 글자만으로도 관계자 모두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낸다. 그만큼 다층적이고 심오한 텍스트이다. 『장자』는 또 어떠한가? 그것은 진중한 내용을 경쾌한 리듬에 실어낸,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다. 『사기』는 일찍이 루쉰이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며, 운율 없는 <이소(離騷)>”(루쉰, 『한문학사강요』)라고 말한 바 있는 것처럼, 수천 년의 시공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장대한 인간사를 드라마틱하게 펼쳐내고 있는 ‘절대필법’의 텍스트이다.
  그런데 맹자는? 일단 말이 많다. 제후가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대답하고, 제자가 한 가지를 물으면 백가지로 대답하는 식이다. 공자는 ‘말’을 상당히 경계했고, 유창하게 말하기(巧言)보다 차라리 어눌하게 말하는(訥言)편이 더 낫다고 했는데, 막상 공자의 제자를 자처하는 맹자는 끝도 한도 없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당대의 평가대로 그는 정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好辯)’이었다. 촌철살인의 미덕이 없는 맹자, 그것만으로도 매력반감이다.
  게다가 인내심을 갖고 그 말을 끝까지 좇아보아도 대개는 ‘지당하신 말씀’ 수준이다. 심지어 가끔씩은 맹자가 뭔가를 우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사마천은 맹자를 초청했었던 어느 제후의 입을 빌어 그가 현실에 맞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迂遠而闊於事情”, 『사기』,「맹자순경열전」)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말은 많은데(好辯) 그 말이 대부분 원론적인 이야기(迂闊)라면? 너무 지루하지 않은가! 맹자의 첫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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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다시 읽은 『맹자』는 좀 달랐다. 그는 힘의 정치가 아니라 덕의 정치를 주장했지만, 덕의 정치를 실현시킬 인물로 선택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힘 있는 군주였다. 뿐만 아니라 그런 군주의 눈에 들기 위해, 혹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거스르지 않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런 정치-외교적 수사는 자신이 곡학아세의 태도라고 비난해마지 않았던 당대의 다른 정치인들, 예를 들어 후대에 ‘종횡가’ 혹은 ‘유세가’라고 불리는 소진(蘇秦), 장의(張儀)들의 전매특허였다. 반대로 맹자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작은 나라에서 맹자는 역으로 ‘왕도정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세(勢)가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결코 ‘우활(迂闊)’한- 공허하거나 이상주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다. 공자와 맹자는 흔히 ‘공맹(孔孟)’이라고 불리며 세트로 취급당하지만 이 둘은 핵심적인 논점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공자가 춘추시대의 패자(霸者)였던 제 환공을 높이 평가한 반면 맹자는 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그를 폄하한다. 공자는 제환공을 힘의 균형을 통해 국제평화를 구축한 정치적 능력자로 본 반면 맹자는 그를 패권주의 정치의 시조로 본 탓이다. 공자를 사숙(私淑)했다면서 스스로 공자의 적통임을 주장한 맹자의 포지션을 놓고 생각해보면 이런 맹자의 입장은 좀 이상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공-맹을 하나의 유가로 엮고, 맹자와 동시대 다른 지식인들은 법가, 병가, 유세가, 도가 등으로 분별하는 것은 오히려 후대의 패러다임 아닐까? 다시 읽은 맹자에게서 난 그보다 180년쯤 앞선 공자와의 공통점만큼이나 당대의 유세가들, 심지어 동시대 인물이지만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장자와의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맹자의 스캔들. 그는 어머니 –바로 그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의 그 맹자 엄마^^- 의 장례를 호화롭게 지냈다는 비난에 줄곧 시달렸고,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했던 군주들에게 받은 화려한 선물 때문에 여러 번 문제제기를 받았다. 이에 대해 맹자는 자신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거나, 정신노동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방어를 한다. 때로는 그것이 정적에 의한 네거티브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뒤에 따르는 수레 수십대와 뒤에 따르는 수행원 수백명(後車數十乘,從者數百人, 「등문공 하」 4장)”이라는 맹자의 재력과 위세가 정말 ‘도리’에 적합한 것일까? 일단 그 평가는 유보하자. 어쨌든 맹자는 ‘상갓집 개’ 취급을 받았던 공자와는 그 처지가 사뭇 달라 보인다. 그는 당대 지식인 스카웃 시장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FA(자유계약선수) 대어’였던 것이다.
  다시 읽은 맹자는 더 이상 장황하고, 원론적이고, 지당하신 말씀만 하는 아재나 꼰대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훨씬 더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때로는 종잡을 수 없고 때로는 애매한, 그런 역동적 인물로 다가왔다.

 

 

2. 존맹(尊孟)과 비맹(非孟) 사이 – 논쟁적 텍스트 『맹자』

 

 『맹자』가 상당히 논쟁적 텍스트라는 것은 『맹자』 의 역사적 수용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우선 『맹자』는 오랫동안 경(經)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제자서(諸子書) 가운데 하나였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맹자』는 「제자략諸子略」에 속한 189가(家), 4000편의 책 중 한 권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순자는 맹자가 자질도 좋고 뜻도 크고 견문도 넓지만 성인의 뜻을 자기마음대로 전유하여 매우 치우치는 주장을 했다고 비판한다. 심오하지만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단정적이지만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게 바로 ‘속유(俗儒)’ 맹자의 학설이라는 것이다.(『순자』, 「非十二子」) 후한(後漢)의 왕충도 맹자를 비판하는데 주장의 논거가 부족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왕충, 『논형(論衡)』, 「자맹(刺孟)」) 물론 사마천 같은 경우는 힘의 논리를 부정하는 맹자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맹자』의 부침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주희(朱熹)의 논술문제이다. 주희는 백록동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맹자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그를 비판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견주며, 또 어떤 사람은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또 누구는 그의 공로가 우임금 아래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 귀취(歸趣)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대들은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해보라”는 질문을 했다.(황준걸, 『이천년 맹자를 읽다』, 45쪽)
  그러나! (알다시피) 송대(宋代)에 이르러 『맹자』는 그 모든 논란을 뒤로 하고 불후의 텍스트로 등극한다. 한유(韓愈)가 시작하고 이정(二程)이 부흥시켰으며 주자(朱子)가 사서시스템의 완성을 통해 마침표를 찍은 맹자 리바이벌 프로젝트! 이후 ‘심성(心性)의 철학서’, 『맹자』는 성리학이라는 동아시아 근세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중국 현대 사상계의 거목인 리쩌허우(李澤厚)는 송명유학이 심성-도덕이론으로 유학을 개괄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심성도덕의 추상이론을 유학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원전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란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순자나 동중서의 유학을 배제하고, 외왕(外王)(=정치)의 독자적 범주에 대한 사유를 유학내부에서 차단한 것도 매우 큰 오류라고 말한다.(리쩌허우, 『학설』, 10~11쪽) 리쩌허우는 이것 때문에 중국(=동아시아)이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맹자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이 아니라 맹자의 정치철학에 방점을 찍어 독해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가 도올이다. 그는 『맹자』에서 ‘민본과 혁명’을 읽어낸다. 도올은 『맹자』가 『논어』와는 좀 성격이 다르다고 하면서 “공자가 ‘상향’의 발돋움을 한 사람이라면...맹자는 철저한 ‘하향’의 사명감이 있다. 맹자에게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민중의 고초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다.”(도올, 『맹자 사람의 길 上』, 103~104쪽)라고 주장한다. (도올의 책을 읽으면 신기한 게, 글자 속에서 도올의 표정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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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맹자』의 왕도정치를 민본주의로 읽은 사람은 도올 만이 아니다. 도올 이전에 캉유웨이(康有爲)가 있었다. 특히 그는 서양근대정치학의 개념으로 『맹자』를 읽어나가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맹자』 ‘고국장(故國章)’의 국인(國人)을 거의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市民) 비슷하게 이해하면서 그 장의 의미를 맹자가 민권을 받아 의원을 개설하는 제도를 밝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나아가 『맹자』의 그 유명한 ‘민위귀장(民爲貴章)’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는 그 다음이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진심 하」, 1장)- 은 서양의 사회계약론을 이미 선취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올은 MB정부하에서, 캉유웨이는 반식민지로 전락해가던 청말의 정세 하에서 『맹자』의 민본주의적 성격에 주목하고 또 그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맹자가 민주의 제도를 수립한 태평시대의 법이다. 대개 나라가 되는 것은 백성을 모아 이루어지는 것이다...이른바 임금은 많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함께 공생하며 안락한 일을 맡은 자이다. 여러 백성이 함께 추대한 것으로 곧 여러 백성이 공용으로 하는 바가 된다. 마치 백성은 점방의 자본주이고, 군주는 초빙된 경영인일 뿐이다. 백성이 주인이고 임금은 손님이다.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는 노복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천하니 쉽고 분명하다. 여러 백성들이 귀의하여 이에 추대하는 것이 민주이고, 미국과 프랑스의 총통이 그들이다...지금 미국과 프랑스, 스페인 및 남미의 각국들이 모두 시행하고 있다...맹자가 진작에 발명한 것이다” (캉유웨이, 『孟子微』, 황준걸 위의 책, 519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반대로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처럼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원래 백성이 곧 정치의 근본이라고 하는 ‘민본주의’의 테제는 본래는 군주 쪽에 정치의 기점을 둔 것”으로, “그런 정치를 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군주이고 백성은 정치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미조구치 유조 등,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218쪽) 맹자 역시 “마음을 쓰는 자(勞心者)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자(治人)이고, 힘을 쓰는 자(勞力者)는 다른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治於人)”라고 말하면서 사서(士庶)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다.(「등문공 上」 5장)
  그런데 이런 시각을 극단화하면 우리는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나아가 그것에 기반한 비트포겔(Karl Wittfogel)의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개념에 닿게 된다. 농업생산을 위한 대규모 관개사업을 위해서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는 전제적 정치체제의 중앙집중적인 통제가 필수적이었다고 요약되는 ‘동양적 전제주의’는 ‘노심자(勞心者)-노력자(勞力者)’ 이론의 유럽버전 끝판왕이다. 동아시아 고대를, 한쪽에서는 서양민주주의의 선취사회로, 또 한쪽에서는 정체적인 전제사회로 보는 것이다.

 

 

 

3. 맹자를 어떻게 읽을까?

 

  누군가는 맹자에게서 우활(迂闊)하나 강직한 성품을 발견했고, 누군가는 맹자에게서 독선과 아집을 발견했다. 어느 시대에서는 『맹자』가 형이상학적 텍스트로 해석되었고, 또 어느 시대에서는 『맹자』가 정치학의 교본으로 떠받들어졌다. 『맹자』는 민주주의 사상의 선취자로도 전제주의 사상의 증거로도 거론된다. 사마천, 조기, 순자, 왕충, 사마광, 한유, 왕안석, 주희, 왕양명, 황종희, 대진, 정약용, 퇴계, 율곡 같은 기라성 같은 학자들 모두가 『맹자』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맹자』를 읽고 각자의 맥락에 따라 모두 다른 『맹자』를 출력시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맹자』는 어떤 것일까? 
  아카데미 밖에서 비전공자로서 동양고전을 읽으면서, 난 우리의 고전독해가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나는 ‘평이하고 친근한’ 동양 고전에서 일상의 교훈을 얻거나 마음의 위로를 찾는 경향, 또 하나는 12세기 주자가 구축한 ‘사서집주’라는 완결된 해석체계를 충실히 익히고 재생산하는 경향.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경향은 아카데미 안이든 밖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가 “역사 속 언어의 산물들과 다른 언어와 다른 역사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고 또 고심하기 위해 한 사람의 능력을 언어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여, 인문주의가 “이미 알고 느끼고 있는 것을 다시 공고히 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전을 포함하여 이미 만들어진 확실한 코드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들에 소란을 일으키고 재정식화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에드워드 사이드, 『저항의 인문학』, 51쪽), 힐링적 독서든 주자적 독해든, 그것들은 인문주의적 태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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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는 정전(正典, canon) 이전에 텍스트(text)이다. 그리고 모든 “텍스트들은 사건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만큼 세속적이며, 설혹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경우조차도 사회적 세계와 인간생활의 일부이고, 또한 당연하게도 텍스트들이 그 속에서 자리 잡고 해석되는 역사적 계기들의 일부”이다.(에드워드 사이드, 『세계, 텍스트, 그리고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읽기』, 107쪽에서 재인용) 따라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역시 세속적 지평 속에서 행해지는 사건이다.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가 구축하고 있는 지배적 힘들에 저항하면서, 전체화하는 개념들과 도그마적인 해석에서 탈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인문주의의 핵심으로서의 ‘세속적 비평’이다.
  사이드는 비평가를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물론 이 때의 아마추어는 ‘알쓸신잡’이나 ‘지대넓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들은 사이드가 ‘사제계급 이론가’라거나 ‘교조적인 형이상학자’라고 부르는 전문가에 맞서, 세상과 뒤얽혀있는 채로 인칭적이고 활동적인 독해를 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독해자들!
  『맹자』에 대한 모든 권위와 전제를 괄호에 넣기! 나에게 그 첫 번째 스텝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우활하다는 맹자의 전통적 이미지 너머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투하면서 종종 모순에 빠지는 맹자가 보인다. 두 번째 스텝은 공자의 충실한 계승자라는 맹자의 지위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공자 별자리의 두 번째 밝은 별이 아니라 공자와 다른 별자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보인다. 세 번째 스텝은 주자의 해석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명말(明末)의 지식인들은 이미 어느 누구도 주자의 주석을 읽지 않았다는데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대신 난 꼬뮨주의자로서 『맹자』를 읽는다. 선거를 앞두고 투표를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맹자』를 읽는다. 문탁네트워크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인지, “민주주의와 삶이 살아있는 곳”인지를 고민하면서 『맹자』를 읽는다. 그렇게 다시 발견해나가는 맹자의 삶과 사유! 그게 앞으로 내가 써나갈 나의 『맹자』이다. 일단 그 제목을 <공유지의 사상가, 맹자> 라고 부친다. NM

 

댓글 3
  • 2018-06-19 07:48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독해!!!

    왜 이게 힘들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직 개인이 못되고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걸 두려워하며

    우물쭈물 살고 있기 때문이겠죠....

    둥글레는 이도저도 아닌 인생이라 말하던데...

    우물쭈물 갈팡질팡하며 맹자 읽어볼랍니다~

  • 2018-06-19 08:57

    고전무식자에겐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던 맹자가 확 끌리네요~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그래도 아는 사자성어 몇 개 나와서 서당개 수준은 된 듯)

  • 2018-07-02 00:27

    우샘은 우리들에게 <노자>를 읽으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맹자>를 '공유지의 사상가'로 문탁샘과 함께 읽어보겠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8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7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3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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