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벗 8일차 [호도협 28밴드] 길의 경계

관리자
2015-08-0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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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 8일차 [호도협 28밴드] 길의 경계

자혜



   비가 내렸다. 심하게 쏟아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우산 없이 유스호스텔안의 중정에 나가자 어깨에 걸친 바람막이 위로 물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호도협을 오르는 내내 그 정도의 비가 내렸다. 호도협을 오르는 날에 비가 올 것을 그렇게 걱정했는데, 막상 닥쳐 뚜껑을 열어보니 비가 와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겹겹이 쌓인 구름들은 호도협의 경관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했고, 뜨거운 해를 가려주고, 열이 오르는 몸을 식혀주었다. 덕분에 정말로 아름다운 하루를 보냈다. 눈앞에 있는 자연은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 미안할 만큼 아름다웠다.

   두 다리로 진짜 땅을 밟아 걸어가면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는 길과, 걸어갈 길에 관해 생각했다. 산을 오르기 전에는 몸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조용히 내리는 비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경관,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 길은 내게 기꺼이 온갖 종류의 상념을 허락했다.


호도협 가는 길

옅은 비를 뚫고 호도협으로

1 나는 어떻게 내가 되어왔을까

며칠 전에 있었던 나의 미니강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의 나의 삶을 서사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굳이 그 시작이 초등학교 5학년이어야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나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틀이 그 때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수련회에 가면 무대에 오르는, 학교에서 존재감 있는 여자애가 되었고, 그것이 설령 판타지 소설이나 연애소설이었을지라도 어마어마한 양의 활자들을 읽기 시작했고, 다이어트와 외모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빛나는 것들을 향한 열등감을 주체 못하기 시작했다.

용돈기입장을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그저 용돈기입장이었지만, 중학교 때에는 거기에 체크리스트 플래너가, 스무 살이 넘어서는 매일 매일의 일기까지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내가 3년 전 4월에 식비로 얼마나 돈을 썼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인간이란 이야기 외에도, 연속성을 가지고 서서히 지금의 내가 되어온 십일 년의 여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이라고 믿고 있는 길에 대해 나름 위트를 덧입혀 웃으면서 수다를 떨 듯 말을 이어나갔다.

호도협을 걸으면서 나는 미니강의에서 내가 설명했던 나의 삶을 다시 재구성해봤다. 그리고 내가 걷는 걸음들과 내가 만나온 사건들을 엮어보기도 했다. 열두 살 때부터 시작해 몸을 한 번 꺾을 때마다 내게 영향을 준 사건을 하나씩 생각해내는 식이었다. 그것은 꽤나 재미있지만 많은 의문들을 뒤에 남기는 작업이었다. 가령 가장 크게 들었던 의문은 정말 내가 구성하는 나의 인생이 실제로 내가 살아온 인생과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정말로 그 사건이 내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사실 정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건이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어떤 순간에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변화한 것은 아닐까?

사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해도 내가 겪어온 많은 사건들이 정말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왔는지를 나는 절대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그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갈수록 모호한 것들은 점점 많아지기만 했다. 내가 라고 설명하는 존재의 경계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도 나의 생각을 덮쳤다. 그리고 한발 내딛고, 호도협을 한 번 눈에 담고 다시 생각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고민에 고민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평범하고 익숙한 습관 같은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시간과 여유가 주어질 때마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고 답을 찾지도 못하면서, 누군가가 김자혜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에는 매우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나에 대해 떠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나는 내가 나의 경계조차 제대로 그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뻔뻔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있는 것인가?

결국 늘 비슷한 원을 빙빙 도는 나의 망상인지 상상인지 모르겠는 스스로와의 대화는 결국 내가 내게 비판적인 어조로 환멸을 드러내는 것으로 내 뇌 속에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호도협

사진은 진짜 아름다움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2. 나와 길의 경계

요즘 나의 화두는 경계에 관한 것이다. 나는 대개 내가 말하는 것들이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산더미다. 예를 애써 고민해서 찾을 필요도 없다.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사실상 거의 완전히 없다는 것은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하지 않겠다.

요즘의 나는 경계 중에서도 무엇보다 관계의 경계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타인이며, 누가 나의 친구고 누가 나의 친구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가 7월에 쓴 에세이의 주제였다. 그리고 지난 미니강의도 인생의 서사로 시작해서 결국 관계의 경계에 대한 고민으로 끝을 맺었다. 모두가 내게 결국 답은 언젠가 자혜 자신이 찾아야 할 거라고 말했다. 내가 스스로 답해야 할 질문이라는 것에는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답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명백해 보여 질문을 완전히 미뤄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또한 동시에 그 문제에 덤벼 싸워보고 싶다는 의욕이 불타오르기도 한다. 관계의 경계에 대한 답을 호도협을 걷는 시간동안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면 미니강의 때 그 주제에 관해 그렇게 긴 질문과 답변을 서로 주고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나는 관계의 경계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내가 걸어가는 길의 경계에 관해 생각으로 상념이 이어지는 방향을 전환시켰다. 오른쪽에 있는 낭떠러지는 길의 끝인 듯 보였지만, 왼편에 있는 넝쿨들은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까지가 길이 아닌지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길은 맞았다. 하지만 명확하게 어디까지가 길이라는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비단 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애매모호한 경계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경계들에 대한 고민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일 때 유효한 것일까? 그냥 대충 의미가 통하면 편한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닐까? 이런 비슷비슷한 것들의 경계를 하나하나 다 찾으려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지? 다시 의문들이 몰려오면서 일단 나는 생각들을 치워버리고 한동안 나의 뇌를 웅장한 호도협의 경관으로 채우려고 애썼다.

나시객잔 도착

사실 다들 28밴드보다 나시객잔까지 더 어렵게 갔다.


3 길을 헤쳐 나가는 힘

28밴드를 오를 때, 남산 조깅 코스를 뛸 때만큼도 숨이 차지 않았다.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나는 “28밴드 끝!”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영상을 찍던 순간에도, 사실 아직 28밴드가 시작도 안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28밴드는 끝난 것이 맞았고, 이게 끝났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어가자 눈앞에 호도협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차마객잔이 보였다.

물론 내게 28밴드가 쉬웠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 길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시객잔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아저씨들은 28밴드는 산을 잘 타는 사람도 올라가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곳이라고 말했고, 지은은 길을 오르다 중간에 기절한 척을 할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가 힘들지 않았던 것은 내가 계속해서 운동을 해서 심폐지구력과 근력을 행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험난한 길을 숨차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남산에 올라 4~5km를 뛰었기 때문이라면, 인생에서 험난한 역경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편안하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어디로부터 얻을 수 있을까 묻고 싶어졌다. 공부는 나를 단련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될까? 이 여행은 내가 나 자신을 더욱 풍부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나? 나는 정말 강해지고 있는 걸까? 잠들기 전까지도 길을 걸으면서 만들어진 의문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28밴드

신체를 단련하고 가면 생각보다 쉽다

몸이 안 좋았던 고은이는 28밴드 전까지 말을 탔는데, 금방 회복해서 쌩쌩하게 28밴드를 올라갔다


4 내가 가고자하는 길

28밴드를 지난 다음 날인 8월 8, 티나객잔에서 저녁을 먹다가 나는 폭탄선언 아닌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생각과 고민을 더 많이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방식으로 말했어야 하는데, 내일 아침에도 브로콜리를 먹어야겠다는 말과 똑같은 어조로 나는 상당히 무게감 있는 발언을 입 밖으로 뱉어버리고 말았다. 원래부터 솔직한 편이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생각 없이 실언을 막 하는 인간이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런 말을 뱉어버린 건 길을 걷는 내내 그에 관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는, 당황스럽지만 그렇게 희귀하지는 않은 경험을 했다.

지금은 상세하게 밝힐 수 없는 고민을 호도협에서 다시 얻었다. 고민을 좀 하고 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나서, 다시 내일 아침뿐만 아니라 점심에도 브로콜리를 먹겠다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무게감으로 졸음이 밀려오는 하루 밤 만에 문제를 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20일의 여행을 9인이 이틀씩 맡으면 비게 되는 이틀 중 하루의 글을 여행이 끝나갈 때쯤에 다시 내가 쓰려고 한다. 호도협이 아닌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 내가 걸어갈 길에 관해 고민할 것이다. 나의 고민을 그 전에 정리해 그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 3
  • 2015-08-09 12:37

    자혜님글 정말 조으다요 ♥♥♥ 세 번을  읽었네요 

    경계에 대한 고민... 관계에 대한 고민... 

     고마워요~~~

  • 2015-08-09 14:15

    사랑한다고 하면 나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 될까 몹시도 두려운 나.

    아름답다고 전하는 것. 나의 고민을 말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냥 내가 그것들을 갖고 즐기고 싶을 뿐.. 

  • 2015-08-11 11:53

    자혜...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