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 차명식 밀양 1일차 후기
2014.11.30 밀양 1일차 후기
도시의 신체
난감한 일이었다. 출발 시간을 약 세 시간 남기고 새벽 두시 삼십분, 나는 팔뚝에 생긴 손바닥 크기의 시뻘건 자국과 그 가운데 흉물스럽게 잡힌 물집을 발견했다. 자정까지 리포트를 쓰다가 딱 두 시간만 자기로 마음먹고 침대 위에 엎어진 게 화근이었다. 정신없이 자는 동안 팔 밑에 깔려 있던 찜질팩은 계속 내 팔을 달궈댔고, 그 결과 의식을 되찾자마자 팔에 화상을 입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화상 전체에 새 살이 솔솔 돋는 연고를 둘러 바른 뒤 그 위에 반창고 비스무리한 물건으로 덮고서 둘둘 말았다. 네X버 지식인은 물집이 잡힌 화상일 경우 절대로 물집을 터뜨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었지만, 나는 대충 반창고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터무니없이 내 신체를 과대평가한 셈이다.
아무튼 시간을 맞춰 모임 장소로 가보니, 길가에 옹기종기 둘러서서 후룩후룩 컵라면을 흡입하고 있는 면면들이 보였다. 그 뒤로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놀랐다. 한 절반 좀 넘는 정도는 아는 얼굴이었고, 절반 좀 안 되는 정도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렴 어때. 가서 일하다 보면 대충 알게 되리라 생각하고, 리포트와 화상 때문에 지친 몸을 버스에 실었다.
*****
한참을 달려 밀양에 도착한 다음에, 나는 뒤늦게 스케줄이 수정되었음을 알았다. 내가 알기로는 분명 첫날은 장터를 방문하고 촛불 문화제에 참여하는 일정이었을 텐데, 내일의 비 예보 때문에 배추 뽑는 작업이 하루 당겨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배추밭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아보였고, 게다가 저번에 왔을 때보다 거의 네 배는 되는 인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정도면 한 시간도 안 되어 순식간에 끝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곧바로 스퍼트를 올렸다. 또 내 신체를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한 셈이다.
장갑도 없이 식칼을 쥐고 동강동강 배추 뿌리를 끊어내다 보니, 어라, 어느새 왼팔 팔뚝에 꾹꾹 붙여 놓았던 반창고가 줄줄 미끄러지면서 흉물스럽게 부풀어 오른 물집이 드러나 있었다. 거기다 갑자기 욱신대는 오른손을 펼쳐보니, 어라, 손가락 사이에는 언제 잡혔는지도 모를 물집이 터져 진물이 줄줄 흐르고 손가락 끝에는 갑자기 굳은살이 박였다.
나는 잠시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낑낑대면서 칼을 내버려 두고 배추 나르기로 작업을 전환했다. 어찌저찌 작업은 끝났지만. 아직 농사일은 개시도 안 했는데 양손이 사이좋게 고장나버렸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배추 작업을 끝내고 장터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더니, 뒤늦게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목덜미며 뺨이며 팔이며 이마며 죄다 화끈거리면서 퉁퉁 붓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한 번 떨어진 반창고는 다시 붙을 생각을 안 했다. 왼팔에는 화상, 오른손에는 터진 물집, 살이 드러난 데마다 화끈화끈 근질근질…….
결국 나는 장터에서도 햇빛을 피해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천막들 뒤의 그늘을 서성대는 신세가 되었다. 흡혈귀도 아니고. 술도 못 먹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겨먹고. 이게 다 내 몸을 과대평가해서 주제도 모르고 처음부터 막 달린 탓이다. 역시 사람은 제 주제와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장터 외곽의 그늘을 전전하면서 주욱 장터를 둘러보니, 신명나는 공연과 술판이 펼쳐지고 있는 장터 한 가운데와는 또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팔러 나온 농작물들을 만지작대는 아저씨, 푸념을 늘어놓은 아저씨를 달래고 말리는 아주머니, 삼바 공연을 지나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젊은 행인 커플, 끝끝내 팔리지 않은 농산물들을 다시 트럭에 가져다 실으며 다시 또 한숨을 푹푹 내쉬는 아저씨.
나중에 모든 축제가 끝나고 숙소인 사랑방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들은 것이지만, 아무래도 이번 장터에서는 물건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밀양 시내의 사람들과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 나가고자 일부러 밀양 시내에 장터 판을 벌린 것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시내 사람들이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원회 분들은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아마 실망이 크셨을 것 같다.
*****
고난의 연속이었던 하루를 마감하면서 자리에 누워, 잘 자리를 찾아 촐랑촐랑 주변의 침낭들을 밟고 다니는 운동이의 기척을 느끼면서, 도시의 신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도시는 홈 패인 공간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지만, 그 뒤 도시는 그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사람들을 장악한다.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도시는 정착과 안주의 공간이다.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도시의 설계에 따라 움직인다. 설계는 일종의 규칙이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도시에서의 삶이다. 규칙에 익숙해짐으로써 생활이 보장된다. 다른 방식의 생활을 바란다면 규칙을 버려야만 한다. 모든 것은 공간의 필요에 따라서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 이성근,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中
도시의 신체는 이 홈 패인 공간의 도시로부터 만들어진다. 정해진 홈에 따라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신체는 자연히 그 홈에 따라 제한된 가능성 안에 포획된다. 무턱대고 일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데어버린 나. 밀양 장터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밀양 시내 사람들. 나와 그들은 모두 도시의 신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도시의 홈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일상과 저항이 함께 하고, 또 그런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밀양은 아무 것도 가로막지 않는 광대한 초원과 다름없다. 그곳에서 도시의 신체는 나아갈 방향을 잃는다.
오늘의 나도, 밀양 시내의 사람들도 그렇게 방향을 잃고 만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시 촌놈이 새로운 땅에 용기 있게 한 걸음을 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의 문제일까.
두 번째로 방문한 밀양에서의 첫밤은 그렇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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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농활팀의 후기를 읽으며
밀양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수없이 많은 밀양이 있고,
그 밀양을 매개로 엮이는 네트워크에서
우리 역시 그 많고 많은 밀양의 한 부분이 되고 있음을.^^
두번째 밤 이야기도 이어질것 같은 마무리? 둘째날 후기도 쓰려고? ㅋㅋ
명식이는 햇빛 알러지 덕분에! 많은 이들이 보지 못한 장터의 뒷풍경을 봤구나...
장터가 생각보다 썰렁해서 안타깝더라.. 마지막까지 최대한 팔아보려고 이계삼 샘은직접 마이크를 들고 농산물 사도록 독려하시고..
그런데 도시의 신체, 초식남 명식이는 벌써 두번째 밀양을 만나면서 다른 신체가 되어가고 있는거 아닐까
물집이 잡힐 정도로 열심히 일했잖아 ^^
그날 명식이가 붙이고 온 '반창고'라는 걸 모든 사람이 봤어야 하는디...
명식아,
네가 일을 열심히 해서 반창고가 떨어진 게 아니라
그 반창고로는 뭘해도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단다. ㅋㅋㅋㅋ....
괜찮냐?
이놈아,
어쩌다 팔이 그 지경이 되는지도 모른채 잘 정도로 몸을 막 굴린단 말이냐?
으이구, 정말...
찜질팩에 놀란 네 한 쪽 팔과 햇볕에 놀란, 드러난 네 피부가 정말 볼만했겠구나...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도시' 이야기는
네 입으로 여러 번 들은 것 같은데, 뭔가 제대로 나올 조짐이지?
몸 돌보는 시간을 갖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