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불교산책14회]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수행자들

요요
2023-07-20 23:24
468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편은 30명과 500명이 함께 읊은 시로 전해진다. 500명(Pancasata)을 한사람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으므로 『테리가타』는 최소 102명, 최대 601명의 시를 모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일상의 수행자 테리까

 

첫 번째 노래의 주인공은 테리까다. 그녀는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고자 했으나 남편의 허락을 얻지 못해 가정에 머물러야 했다. 결혼한 남성은 아내의 허락이 없이 출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여성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리까는 할 수 있는 만큼 통찰지를 닦는 수행을 계속했다. 어느날 부엌에서 카레를 끓이던 중 그릇에 불이 붙었다. 그 불은 그릇을 새까맣게 불태웠다. 그녀는 그 불을 관찰하면서 무상(無常)을 통찰했고, 모든 것에는 실체라 할만한 것이 없다는 지혜를 성취하여,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끊은 불환자의 경지에 올랐다.

불환자는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이 얻는 세 번째 단계이다. 첫 번째는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갖고 깨달음의 흐름에 들어간 예류자(預流者, 수다원)다. 두 번째는 다음 생에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일래자(一來者, 사다함), 세 번째는 욕망의 세계를 벗어난 곳에 태어나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불환자(不還者, 아나함), 마지막으로 지금 여기에서 해탈한 지혜의 완성자 아라한이다. 테리까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서 거의 모든 탐욕이 사라져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체의 장식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에게 탐욕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내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 옹기 속의 마른 야채처럼 그대의 탐욕은 실로 지멸하였다.(『테리가타』, 「테리까 장로니의 시」)

 

그녀의 경지를 찬탄한 붓다의 게송이 테리까의 노래가 되었다.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수행을 계속해 온 테리까에게 출가는 수행의 시작이 아니라 수행의 완성을 의미했다. 테리까에게 출가는 번뇌를 종식한 아라한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도 출가자 못지않게 수행에 진심이었던 테리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재가의 삶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통찰지를 닦았던 여성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춘엽니(비구니)> 권진규

 

 

자식을 잃고 수행한 끼사꼬따미

 

끼사 꼬따미는 아들이 어린 나이로 죽자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니며 아이를 살릴 약을 구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었지만 붓다는 아이를 살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한 사람도 죽은 이가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자식을 살리고 싶었던 끼사 꼬따미는 모든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회한, 비탄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났다. 오랫동안 내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들 잃은 여성이 아니라 그녀를 구원한 위대한 스승 붓다였다. 그랬기에 나는 이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테리가타』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알았고, 그 뒤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구니 끼사 꼬따미는 『쌍윳따 니까야』 「수행녀의 품」에도 등장한다.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끼사 꼬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지난 일이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환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존재의 다발은 파괴되었으니, 죽음의 군대에 승리하여, 나는 속세의 번뇌를 여의고 살아간다.(『쌍윳따니까야』 5:3 「꼬따미의 경」)

 

끼사 꼬따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출가 수행을 통해 생과 사에 수반되는 일체의 번뇌와 두려움에서도 벗어났다. 악마 빠삐만은 그런 그녀를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으로,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연약한 여성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수행자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가부장제에 예속된 존재로 돌려놓으려는 남성의 목소리이다. 해탈한 여성 끼사 꼬따미는 그런 목소리를 가볍게 물리친다. 그녀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메가스테네스가 본 여성 철학자들 역시 이런 당당한 여성이 아니었을까?

 

 

깨달음에 남녀는 없다고 선언한 쏘마

 

깨달음을 얻은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수행자를 불신하는 의심의 눈초리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여성혐오적인 담론도 그친 적이 없었다. 여성은 머리가 나쁘다, 여성은 질투심이 강하다, 여성은 속이 좁다, 여성은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다, 여성은 화를 잘낸다, 여성은 사치스럽다, 등등. 가부장제의 질서와 이념은 열등한 인간으로 여자를 규정하고, 남자와 여자는 본래적으로 본성과 역할이 다르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악마] 선인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 그 경지는 성취하기 어려우니,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쏘마]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쌍윳따니까야 』 5:2 「쏘마의 경」)

 

이 대화에 등장하는 악마는 여성의 지혜는 보잘것없어서 여성들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담론을 대변한다. 고대 인도에서만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가부장적 질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여성 혐오적 통념은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온존한다. 비구니 쏘마는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것은 악마의 견해일 뿐, 지혜에는 남녀가 없다고 응수함으로써 악마의 목소리를 잠재운다.

 

붓다는 금수저냐 흙수저냐의 출생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과거의 업이나 절대자가 내 운명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적 결정론을 단호히 거부했다. 동시에 붓다는 각각의 사물에 주어진 고정불변의 본질이나 실체가 있다는 본질주의도 거부했다. 모든 사물은 조건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며, 만물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설은 여성과 남성에게 불변하는 본질과 역할이 있다는 전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여성은 열등한 존재여서 지혜를 성취할 수 없다는 주장은 붓다의 가르침에 반하는 악마의 견해일 뿐이다. 깨달음에 남녀는 없다는 비구니의 사자후다.

 

<승려복을 입은 여인> 최우석

 

 

아들을 해탈로 이끈 밧다의 어머니

 

밧다의 어머니는 아들 밧다를 친척에게 맡기고 출가했다. 그녀는 일체의 번뇌를 여읜 아라한이 되었다. 밧다도 장성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였다. 어느날 밧다가 어머니의 처소를 방문했다. 밧다의 행동거지는 사사로이 어머니를 찾아온 아들의 모습이었다. 밧다의 어머니는 밧다의 안일함을 꾸짖었다. 이에 밧다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용맹정진하였고, 마침내 모든 번뇌가 가라앉은 적멸을 얻었다. 밧다의 어머니의 시는 밧다와 그 어머니 사이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밧다의 어머니] 통찰을 얻기 위하여 선인들이 닦은 길을 가는 것에, 밧다여, 헌신하라. 괴로움의 종식을 위한 것이니라.

[밧다] 어머니, 확신을 가지고 그 의취를 말씀하셨으니, 어머니, 생각건대 당신께는 저에 대한 애착이 없습니다.

[밧다의 어머니] 어떠한 형성된 것들에 대해서든 낮거나 높거나 중간이건 간에, 아주 작은, 또는 원자의 크기라도 결코 나에게 애착은 없다.

[밧다] 나는 그녀의 말씀, 어머니의 가르침을 듣고 진리에 대한 외경을 얻어 멍에로부터의 안온에 도달했다. 어머니로부터 자극받아 그래서 나는 노력을 기울여 밤낮으로 게으름이 없었으니 최상의 적멸에 도달했다.(『테리가타』 제9장 「밧다의 어머니 장로니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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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다의 어머니는 자식의 성취를 위해 헌신하는 맹모도 아니고 자식의 매니저인 헬리콥터 맘도 아니었다. 높은 깨달음을 성취한 그녀는 자신을 결코 밧다의 어머니로 정체화하지 않았다. 밧다의 어머니는 밧다의 어머니이면서 밧다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비구니 밧다의 어머니를 통해 우리는 젠더로서의 ‘남자, 여자’의 정체성에 구속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핏줄로 얽힌 ‘어머니, 자식’ 관계의 애착마저 벗어버리고 대자유인이 된 여성 수행자를 만난다. 밧다의 어머니는 모성에 대한 통념을 가뿐히 뛰어 넘는다. 붓다가 라훌라에게 한 것처럼 밧다의 어머니 역시 밧다의 정진을 독려하여 최상의 열반으로 이끈 스승이었다. 아마도 밧다의 어머니는 아들 밧다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들을 멍에로부터 벗어난 안온으로 이끄는 훌륭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전국비구니회(여성신문)

 

 

여성 수행자들의 학교, 비구니 승가

 

개인으로서 여성들은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시대였다. 이 여성 철학자들이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성 출가자들의 수행을 돕는 공동체가 잘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붓다의 시대로부터 물적 토대와 교육시스템을 갖춘 비구니 승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 여성 출가자들은 가정과 사회의 의무와 구속에서 벗어나 수행 생활에 온전히 집중하며 탁월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

 

붓다에게는 뛰어난 비구 제자들이 많았다. 사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깟싸빠와 아난다 등. 그들의 출가와 수행에 얽힌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앎으로써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붓다의 여성 제자들은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거니와 경전에서도 쉽사리 만나기 어렵다.(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다음 글의 주제다.) 그러나 붓다는 뛰어난 여성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들이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테리가타』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테리가타』의 시를 통해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비구니들 역시 사리뿟따 등에 못지않은 뛰어난 스승이었고 설법자이고 명상가들이었다.

 

나는 수행녀들의 허스토리와 그녀들의 이름을 알게 되어 기쁘고 벅차다. 이 글에서 소개한 테리까, 끼사 꼬따미, 쏘마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난관을 뚫고 스스로를 구원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영적인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존재는 우리의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하고, 우리를 구속하는 안팎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더 많은 가능성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댓글 5
  • 2023-07-23 11:48

    수행녀... 번다한 일상 속에서 영적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출가수행만이 수행이 아니다, 일상과 수행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깨달음 역시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네요.
    솔직히 제겐 너무나 요원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속하는 안팎의 한계를 넘어 잠재력을 끌어내고 더 많은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는 말을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 2023-07-24 11:29

    모성과 애착에서 벗어난 어머니
    감동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느꼈을 요요샘의 마음을 쪼끔은 알것도 같네요
    다음글도 또 기대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ㅎ

  • 2023-07-26 23:30

    회사에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의 회사 이름이 '라훌라' 였어요. 아마도 그 회사 이름을 만든 분은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나봅니다. 저는 그때 불교 까막눈이었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지요.ㅎ

    어머니와 자식이면서 어머니와 자식관계를 뛰어넘어 어머니와 자식이 아닌 경지에 오르고 싶습니다....ㅠㅠㅠ

  • 2023-07-29 09:19

    수유하면서 이 글을 읽는데 육아로 지친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지네요.

    살면서 이렇게 집에만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집안일을 하는 것 만큼 대단한 수행이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ㅎㅎ 일상의 수행자 테리까로부터 오늘 하루도 깨어 있을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네요.

    저도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넘어서 독립적인 개인으로 관계 맺고 싶은데 밧다의 어머니처럼 서로 깨달음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지..? ㅎㅎㅎ 저의 수행에 달려있겠죠??

    이렇게 육아를 하니 불교 공부와 인연이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 2023-08-11 06:29

    와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출가가 수행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었다는 게 너무 멋지네요... 크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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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 조회 161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9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11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봄날
2023.09.05 | 조회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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