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Respect!! (아젠다 1호 / 20200620)
문탁
2020-06-20 20:04
99
올해 나는 길드다에서 <청년철학학교>를 시작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은 문탁 프로그램에 길드다 청년들을 참여시켰는데 이제부터는 길드다에서 독자적으로 철학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들뢰즈, 논어, 장자를 기본으로 하여 최소한 각 1년씩 ‘제대로’, ‘빡세게’ 읽히리라. 하여 6년 정도가 지나면 사유의 ‘검은 띠’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파란 띠’는 딸 수 있게 훈련시키리라.
자, 그러면 올해는 작년에 이어 들뢰즈를 좀 더 읽혀야겠다! 청년들에게 제안했다. “작년에 『천의 고원』을 읽었으니 올해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 들뢰즈 책 몇 권을 더 읽자!” 그리고, 나의 제안은 공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청년들은 나에게 문탁의 커리큘럼은 너무 올드하다고, 자신들은 좀 더 최신 이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헐~~ 얘들아 이 분들은 올드한 분들이 아니라 클래식한 분들이야. 그리고 원래 클래식은, 베토벤이 그렇듯이 당대엔 가장 신박한 스타일이었어. 그래도 청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청년들은 올해 ‘포스트 휴머니즘’을 읽겠다고 했다. 가져온 목록들을 보니 텍스트도 저자들도 낯설었다. 그래? 그럼 난 잘 모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커리큘럼을 짜봐. 그렇게 <2020 길드다 청년강학원>이 만들어졌다. (청년들은 ‘철학학교’라는 이름이 ‘구리다’고 ‘강학원’으로 바꿨다.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건데^^) 첫 번째 시즌은 <미디어와 신체>라는 주제로 슈타이얼, 키틀러, 위베르만을 읽는단다. 얼핏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는데 세상에나 공지를 올리자마자 스무 명이나 신청을 했다. 심지어 서울 강북, 일산에서도 청년들이 왔다.
히토 슈타이얼 |
강학원 첫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을 시작하는 날, 난 어떤 청년들이 모였나 궁금하기도 하고, 또 이 친구들이 코로나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도 할 겸 옵서버로 세미나에 참여했다. 그런데 첫 날 세미나는 전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질문들은 맥락 없이 툭툭 끊겼고 논의는 뚜렷한 쟁점들로 수렴되지 않았으며 길드다 청년들은 말은 많이 했지만 세미나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난 일삼아 잠깐씩 들렸는데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회의에서 점검을 하자 길드다 청년들 왈, 돌아가면서 결석을 해서 그렇지 완전 그만 둔 친구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난 미덥지 않았고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망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망하면 망하는 대로 배우는 게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12주가 지나고 지난 6월14일에 첫 번째 시즌을 갈무리하는 발표가 있었다. 실제로 16명이‘나’ 남았고 12명은 에세이를 썼으며 나머지 4명은 각각 연극, 영상, 음악, 사진작업을 했다. 그래서 공식적인 발표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무려 8시간, 점심도 김밥으로 때운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그 긴 시간을 버티고 앉아서 별 볼일 없을 게 분명한 에세이들을 듣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사장으로서, 선생으로서 가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전 날 푹 자고 체력을 비축했다. 그리고 의무방어전 뛰는 선수처럼 호흡을 가다듬고 참석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날 나는 엄청 감동받았다. 에세이의 수준은, 객관적으로는 들쑥날쑥 이었지만 어느 한편도 ‘날림’은 없었다. 열심히 서로 피드백을 했고 각자 그것을 반영해 여러 번 고치면서 애 쓴 티가 났다. 4편의 에세이가 끝나면 장소를 변경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구성한 진행과 흐름은 유연하고 심지어 유려했다. 사진파트는 딱 한 권만 제작된 실물 <사진-책>과 더불어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바로 PDF파일로 감상할 수 있었고, 음악파트는 큰 모니터에 구현된 상징적 이미지들과 함께 길드다의 빵빵한 오디오시스템^^을 통해 미리 녹음된 6트랙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디어도 빛났는데 세미나 텍스트였던 『진실의 색』에서 언급된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연극은, 문탁의 회원들이 매일 작업하는 파지사유 길쌈방의 재봉틀을 이용해 “구성과 자료, 가상과 현실, 신화와 창작이 계속 섞이”는(슈타이얼) 실험에 도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감동스러운 것은 에세이의 기술적 완성도도 진행의 기능적 숙련도도 아니었다. 그날 거기 모인 청년들의 어떤 ‘태도’, 자신과 친구와 세상을 향한 어떤 ‘태도’였다. 실존의 가장 약한 고리들, 예들 들면 아픈 동생 때문에 겪는 마음의 지옥이나 죽은 친구가 남긴 삼켜지지 않는 질문들을, 어쩌면 늘 외면해왔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위베르만), 감히 마주하고 용기를 내서 글로 써낸 어떤 태도, 발표를 하다가 울음 때문에 중단되고, 그 슬픔이 전염되어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정동적이면서도 성찰적인 공론장”의 경험이 되도록 만든 어떤 태도였다.
에세이 발표를 들으면서 주책없게 나도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아, 이건 한 때 문탁의 모든 에세이발표와 각종 액티비티에서 내가 느꼈던 벅참이고 기쁨이었는데 지금 나는 문탁에서 이런 걸 느끼지 못하고 있구나. 문탁의 위기는 여기서 오는 거구나. (그런데 왜? 어쩌다가? 언제부터? 아마도 이제부터 난 그걸 탐구해야겠다)
어쨌든 루쉰의 말대로 스승 따위는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가르치겠다는 생각도 주제넘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며칠 전 내가 만난 청년들은 흔들리는 자신을 향해 솔직했고 이 미친 세상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훌륭했다. 그들에게 Respect!! 루쉰의 글 하나 첨부한다.
“젊은이가 황금 글자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스승을 꼭 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벗을 구해 힘을 합쳐, 생존할 수 있을 만한 방향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그대들은 생명력이 충만하니, 깊은 숲을 만나면 평평한 땅으로 일굴 수 있고, 넓은 들판을 만나면 나무를 심을 수 있으며, 사막을 만나면 우물을 팔 수 있다. 가시덤불로 길이 막힌 낡은 길을 물어 무엇하며, 탁하고 독한 기운으로 가득 찬 똥 같은 스승을 구해 무엇하랴!!” (1925.5.11. 루쉰, 「스승」, 『화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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