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장이다! (아젠다 0호 / 20200520)
문탁
2020-05-20 07:57
142
나는 길드다 사장이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지금 난 길드다라는 ‘청년인문학스터트업’의 사장이다. 그런데 청년들의 배움과 밥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보겠다는 이 실험적 공동체 안에서, 유일하게 50대인 나는,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나는 공식적이고 대외적인 길드다 활동에서는 존재감이 없다. 청년들은 이런 저런 자리에서 길드다를 소개할 때 대체로 나를 ‘제낀다’. 길드다 블로그나 인스타에서도 나의 흔적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길드다에서의 사장은 일종의 명예직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나는 꽤 많은 일을 한다.
무엇보다 나는 길드다 조직 전체의 비전을 제시하거나 한 해의 사업계획을 짜는 일을 한다. 전형적인 CEO의 임무이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비전이나 사업계획은 청년들에게 자주 ‘까인다’^^) 실제로는 궁색한 길드다 살림이 ‘빵꾸’나지 않게 여기 저기 협박도 하고 읍소도 하면서 돈을 끌어오는 일을 가장 열심히 한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간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청년들에게 푸코니 들뢰즈니 장자니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때론 회계장부 쓰는 법, 공지 올리는 법 등 각종 실무와 관련된 노하우를 전수하는 사수(射手)이기도 하고, 또 때론 청년들을 전국으로 보내 <북 콘서트>라는 행사를 뛰게 하는 기획사 매니저로 변신하기도 한다. 음, 아주 가끔씩은 운전도 못하고 차도 없는 청년들을 실어 나르는 운전기사 노릇도 한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청년쉐어하우스 <선집> 대청소를 하면서 매트리스 커버와 이불커버를 몽땅 벗겨 집으로 가져와 빨아서 다시 갖다 놓았다. 무엇보다 나는 길드다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x) 늙은(o) 누나(x) 선생님(o)”이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길드다의 사장은 카드의 조커나 놀이판의 깍두기 혹은 축구팀의 와일드카드 같은 역할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다목적 접착제인가?) 하지만 나의 롤 모델은 스쿨밴드로 시작했던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 도약에 결정적 역할을 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같은 프로듀서이다. 그가 ‘Viva la Vida’라거나 ‘Paradise’ 등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 떼창곡을 성공시킨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가 1,2집의 성공을 통해 이미 인기를 얻고 있었던 밴드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거의 30년이나 어린 밴드멤버 앞에서도 결코 과시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에게 음악을 하는 철학을 전수했다는 점에 감명을 받는다. 그는 멤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음반을 더 많이 팔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목요일을 더 즐겁게 보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콜드플레이 |
어쩌면 내가 브라이언 이노같은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길드다가 ‘콜드플레이’ 같은 밴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고?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그 밴드를 사랑하는 것은 그 밴드가 잘 나가서가 아니라 그 밴드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장수하는 밴드이기 때문이다. 취향과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따로 또 함께’라는 관계의 기술을 함께 훈련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길드다는 무엇보다 청년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 서로의 차이가 더 멋진 화음의 생산으로 나아가는 그런 밴드이다. 하여 그곳에서 나는 청년들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청년들을 지적이고 감성적으로 자극하고, 그들과 함께 다양한 실험을 끊임없이 추가해가되, 그 자체만을 온전히 즐기는, 그런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프로듀서, 바로 그런 어른이다. 지금 내 나이에 이것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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