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양생이다> 1회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기린
2020-05-13 00:39
599

 

  1. 설명하기엔 애매한

 

  나는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나이는 오십이 넘었는데 시집도 못 갔지 안정된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문탁에서 학생들과 수업도 한다는 얘기로 미루어 예전에 다녔던 학원 같은데 이겠거니 생각하신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을 때 어머니는 학원에서 월급은 주냐고 걱정하는 전화를 하셨다. 학원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는 뭐래니 라는 표정이다.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족은 물론 주변 친구들에게도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공동체 관련 기사도 열심히 읽었고 그와 관련한 책도 꾸준히 사서 읽었다. 새해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때 소개된 공동체 방문해보기가 빠지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살자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럴 때 떠올린 공동체의 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간다는 정도였다. 책을 통해 문탁네트워크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런’ 공동체를 실제로 경험해 본다는 생각에 좀 설렜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와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맞닥뜨리는 상황들도 낯설어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처음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해서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렸던 ‘그런’ 공동체의 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뜻이 맞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래서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살아갈수록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을 허물고 다시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리 익혀도 상황이 달라지면 또 헤맨다. 이 글은 그렇게 헤매면서도 여전히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이다.

 

2. 게을러터지다

 

 나는 이십 대 대부분을 백수로 살았다.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교육원을 들락거렸고 작품공모 마감일 맞춘답시고 많은 것을 미루며 보냈다. 그렇게 쓴 글들이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만두지도 못하고 계속 하지도 않는 시간만 죽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직업을 구했다. 학원 강사 일이었다. 경력이 없던 터라 영세한 학원에서나 나를 써주었다. 그마저도 수업을 못하네 성적이 안 오르네 등의 이유로 맡았던 반이 없어지고 잘렸던 적도 있었다. 연이은 탈락의 경험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할 수없이 종목을 바꾸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취향을 살린 독서 논술이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성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다. 잘 해서 바닥을 치고 있던 자존감도 끌어올리고 싶었다. 기대에 차서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독서는 나의 취향일 뿐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강제였다. 부모의 닦달에 억지로 읽어 온 내용으로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학교 성적이 떨어지면 독서논술 수업부터 정리했다. 현실은 기대에 찬 내 마음 따위 안중에 없었다.

 

 그래도 달이 차면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결혼도 못하면서 뭐 해 먹고 살 거냐 걱정을 끊이질 않는 어머니에게 할 말도 필요했다. “학원 잘 다니고 있어요.”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사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요령도 하나 둘 늘어갔다.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다그치기 전에 읽고 싶게 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직접 따라해 보고 그 경험을 표현해 보자고 했다. 그러느라 계절을 느끼기 위해 학원 주변 동네를 싸다니고 수업 시간에 오미자를 담그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볼만한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그런 활동의 경험을 살려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보는 시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맡은 수업이 재미없다는 피드백이 점점 잦아졌다. 내 딴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문리가 트이도록 공을 들였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힘이 빠졌다. 선생님의 뜻은 알겠는데 아이가 너무 하기 싫어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그만하겠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다. 나중에는 재미라는 말만 들어도 울화가 치밀었다. 같은 책으로 수업하면서 나날이 수업 반을 늘려가는 동료를 시기질투 하는 내 자신도 한심했다. 그렇게 나의 한계와 직면하면서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은 흘러갔다.

 

 수업이 줄어드는 만큼 학원에 안 나가는 날이 늘어났다. 다시 드라마라도 쓰겠다며 트렌드를 분석한다고 온갖 드라마를 섭렵하다가 새벽녘에 자고 오후에 일어나기 일쑤였다. 드라마 편수만큼 맥주 캔을 해치우며 안 그래도 뚱뚱한 몸이 나날이 불어갔다. 그즈음 한 웹사이트에 회원가입하면서 지은 별명이 ‘게으르니’였다. 너무 게을러터져서 살고 싶은 의욕까지 바닥을 칠 즈음 우연히 문탁을 알게 되었다.

 

 

 

3. 백일 수행 프로젝트

 

 예전부터 고미숙샘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문탁도 그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전화로 문의를 했더니 『논어』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신청했다. 와서 보니 문탁샘이 튜터로 진행하는 앎삶세미나 였다. 텃밭울력이 있다는 공지를 보고 텃밭에도 가보고 등산동아리를 따라 광교산 등산도 시작했다. 등산길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나의 일상도 밝히게 되었다. 문탁샘은 그렇게 밤늦게까지 깨어 있으니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셨다. 그 습관을 바꾸고 싶다면 매일 아침 문탁에 나와서 청소하고 공부하는 ‘불목하니’를 백일 동안 해보라고 제안하셨다. 솔깃했다. 뭐가 됐든 지금보다야 낫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일 수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침 여덟시에 문탁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밤새 가라앉은 눅진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온갖 창을 열어젖히고 청소기부터 찾았다. 대강의실 구석 음향기기의 전선들이 온통 엉겨있는 곳을 요리조리 피해 청소기를 돌렸다. 이층 까페와 OA실, 공부방, 주방까지 쓸고 닦고 나서 화장실을 끝으로 청소가 끝났다. 이 과정을 매일 반복하다보니 점점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실 바닥에 엉겨 있는 전선들을 가닥가닥 정리해서 보이지 않도록 정리하는 일, 창문 난간 쪽에 너덜대는 시트지를 정리하고 순간접착제로 마감하기, 주방에 말려둔 온갖 식기와 조리도구들을 제자리에 수납하기까지. 매일 쓸고 닦아서 쌓이는 먼지가 줄어드는 만큼 공간 전체를 정리하는 손품은 늘어났다. 언젠가는 화장실 하수구가 막혀 물이 안 빠지는 걸 뚫느라 쩔쩔매기도 했다. 백일이 거의 끝나가던 즈음 어느 날 아침에는 도어락이 작동하지 않았다. 출입구에 붙은 광고스티커를 보고 열쇠아저씨를 불렀더니 십초 만에 해결해주셨다. 그즈음 문을 열 때마다 삑삑댔는데 그게 건전지교체 신호라는 걸 몰랐다. 불목하니로 시작해 출입구 도어락의 상태까지 살필 줄 아는 신체가 되고나니 백일 수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문탁샘이 홈피에 나의 수행을 알린 탓에 세미나를 하러 와서 나와 마주친 이들은 여지없이 “아... 게으르니님이군요?” 라며 반가워했다. 백일 동안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청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이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는데 대략 난감이었다. 적은 나이도 아닌데 제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나 싶어서 무척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저 무기력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할 수없이 창피함을 꾹꾹 눌러가며 어색한 웃음을 짓곤 했다. 차츰차츰 시간이 흐르자 창피함도 많이 줄어들고 담백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처음 보는 이가 내미는 선물도 기꺼이 받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도 문탁에 처음 와서 천연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한 자누리였다^^.

 

 어머니는 늘 나의 게으름이 문제라고 걱정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려서 어머니의 다음 말문을 막아버렸다.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게으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가족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이제 가족은 내게 너무 ‘멀어진’ 사이였다. 드문드문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에게 이런 속사정을 털어놓자니 계면쩍었다. 그랬던 내가 주말과 공휴일까지 포함 꼬박 백일을 매일 아침 여덟시에 나와서 공간을 청소하는 부지런을 수행해 내다니. 점점 백일 수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여기라면 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공동체에 쑤욱 들어섰다.

 

4.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백일 수행이 끝나갈 즈음이 되자 만나는 사람들도 모르는 얼굴보다 아는 얼굴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 별명을 부지런이로 바꾸라는 농담도 편하게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백일만 하고 그만 할 거야?” 당시 나의 고민도 그거였다. 열심히 쓸고 닦다가 백일이 되었으니까 이제 끝? 이러면 되나. 절에서는 행자 생활이 끝나면 계를 받는다든가 하는 의례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절도 아니고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하는 건가.

 

 나의 고민을 들은 문탁샘은 이렇게 말했다. “백일 되면 끝내야지. 청소당번 있잖아.” 그동안 이 공간을 운영하는 회원들이 당번을 정해서 청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기약 없이 계속 청소를 해야 한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점점 부담이 되어가던 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동체에서 그런 방식으로 일을 맡지 않는데 그 때는 그걸 몰랐다. 그저 문탁샘의 말을 듣고 끝내도 되는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백일 수행이 열흘 남짓 남았을 즈음 문탁샘은 홈피에 백일 쫑파티를 하자는 제안을 올렸다. 당시 주방지기였던 콩세알이 특별식을 하겠다고 나섰고 다른 친구들도 축하 선물을 챙겨오겠다는 댓글을 보면서. 또 창피했다. 공동체에서는 조용히 넘어가는 일이 없구나. 절집의 행자처럼 계를 받는 의식은 없었지만, 친구들의 박수소리에 둘러싸여서 한 개의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자르고 나서 백일 수행프로젝트를 끝냈다.

 

 

 쫑파티가 끝난 후 문탁샘이 올린 후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100일 전 게으르니가 발심했습니다. 다르게 살고 싶다!! 일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는 습관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여, 시작된 게으르니의 100일 프로젝트!! 드뎌 오늘 100일째가 되었습니다.” 게을러터진 습관부터 바꿔보자고 시작한 수행이었다. 그렇게 일상을 바꾸기 시작하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학원에 나가는 요일도 점점 줄어 공동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었으니 확실히 다른 일상이 펼쳐졌다. 그렇게 나는 공동체로 출근하게 되었다.

댓글 21
  • 2020-05-13 09:37

    기린샘의 듬성듬성 성글게 알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펴쳐지는군요.
    다음 이야기 기다려집니다~~~^^궁금

  • 2020-05-13 10:17

    게으르니가 기린이 되기까지 이야기!
    문탁 초창기의 몰랐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도
    살짝 들을 수 있을 거 같네요~ ^^

  • 2020-05-13 10:59

    전 게으르니 샘을 잠깐 만나고 쭉~~기린샘을 만나고있는데, 이렇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흥미진진하네요~~다음 이야기 기대할게요~~^^

  • 2020-05-13 16:14

    아 매주 산을 같이 가면서도 이제야 게으르니-기린의 이야기를 알게 되네요^^ 뭔가 글을 읽고 나니 더 친해진듯한^^

  • 2020-05-14 12:14

    한창 젊은 게으르니가 활짝 웃고있으니 새삼 반갑네 ㅎ
    그대의 공동체생활을 보면서 나도 한번 돌아보리다^^

  • 2020-05-14 12:18

    문탁 오기 전, 2-30대의 게으르니샘이 눈에 그려집니다 ^^
    재밌게 읽었어요 ㅎㅎ

  • 2020-05-14 12:19

    짝짝~ 재밌습니다. 기린 인생극장 될 듯하네요~

  • 2020-05-14 12:50

    이 글을 통해 제가 선생님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군요!
    기대됩니다~

  • 2020-05-14 13:27

    게으르니에서 기린으로의 스토리 흥미진진한데요^^

  • 2020-05-14 13:42

    내가 아는건 게으르니라...ㅎㅎ
    전 기린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문탁에 100일 수행하러 날마다 일찍와서 청소하던 그때 모습이 선하네요.
    그래도그렇지 시간 귀할 사람이 청소를 수행으로 하다니!
    존경스러웠어요.
    난 절대 선택하지않을 수행이었기에^^
    100일 쫑파티를 진심 축하해주고 싶었답니다.
    지금은 공동체로 출근하는 기린...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네요^^

  • 2020-05-14 14:10

    파지에 들어서면 늘 반가운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제가 엄청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도 이렇게 저렇게 알려주시는 기린샘~
    공동체가 양생임을 몸소 실천하시고 계시는 것 같아요.
    홧팅~~
    앞으로는 쫌 덜 귀찮게 할게요 ㅎㅎ

  • 2020-05-14 14:21

    문탁에 들어서면 항상 밝게 인사해주시는 기린샘의
    밝은 인사가 그냥 밝은 인사가 아니었군용~
    문탁네트워크의 주모같으신 분이 ~ 문탁 새내기때의 이야기라~ 재밌네용!
    기린샘을 좀 더 잘 알게 된 느낌? ㅎㅅㅎ

  • 2020-05-14 15:02

    게으르니샘이 기린??
    난 어색하지만~^^
    동지적 공감과 팬심으로 읽었어요~^^

  • 2020-05-14 15:16

    아이구나..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니 다음 글이 벌써 걱정이 되네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0-05-14 16:28

    되게 웃긴게 이때는 말한마디 나눠본적 없는 게으르니님 옆에옆에서 제가 웃고 있어요...
    공동체에는 관심도 그다지 없었고 일본어만 하러 다니던 때였네요. 월요일이었죠ㅋ
    그런데 이 일은 저에게도 기억에 남는 일로 있답니다.
    단지 게으르니님이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쫑파티가 있구나 싶은...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웃자고 덤비는 사이가 되었네요ㅋㅋ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또 웃자고 덤비게 다음글 기다릴게요... 흐흐흐

  • 2020-05-14 17:05

    많은 댓글에서 문탁인들의 기린샘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저랑 비슷한 점이 많아서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재밌고 다음이 막~~~~기대되요^^

  • 2020-05-14 21:13

    기린샘의 첫 이미지가 저에게는 주학의 선생님으로 각인되었었는데,
    작년부터는 새은이말대로 '문탁의 주모'로 느껴집니다요. ㅎㅎ

    "주모~~~~여기 걸죽한 국밥하나 말아주고, 막걸리 추가요~~"

    2탄을 기다리며.......

  • 2020-05-14 21:35

    맞아요. 주학의 선생님, 문탁의 주모, 텃밭지기,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웹진 기자,
    다시 돌아온 등산동아리 열성회원 등등 기린의 스펙이 빵빵하네요^^

  • 2020-05-16 00:59

    게으르니샘을 한동안은 일부러 기린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도 같다.
    백일수행처럼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게으르니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으르게가그린그런기린그림이야기가 궁금하다.

  • 2020-06-04 16:51

    저도 게으르니샘이 익숙해서 기린샘이라고 잘 불러지지 않던데.ㅎㅎ 이야기 재밌어요. 기린샘 스토리 궁금합니다. 기대할께요^^

  • 2020-06-13 07:23

    게으르니...
    이동네 이사온 2014년에 문탁 요가반에 잠시 나갔을때 별명을 듣고 웃음을 지었던 생각이 납니다.
    쌤이랑우리 둘째딸과 겹치는 모습은 왜일까요...ㅎㅎ
    오랜만에 뵈었을때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었지요.
    와~
    정말 살이 빠지니 사람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이젠 "기린쌤".

    별명이 바뀐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쌤의 솔직한 이야기가 애잔하면서도 내안의 게으름이 어떻게 변신했는지 스치기도 합니다.
    결혼하고 아이낳고 날마다 먹고 먹여 살려야하기에 동동대던 시절이 게으름을 물리치게 했었나?
    혼자 살았더면 나도 게으름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을것 같네요.
    쌤의 100일 수행이 100일 만에 끝난게 난 결혼이라는 수행으로 끝이 없나봅니다...
    쌤의 글을 보면 댓글을 안달 수 없네요.

    기린쌤 홧팅!!!

지난 연재 읽기 뚜벅뚜벅 마을경제학
  [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8] 공유지는 살아있다   생소한 단어 ‘공유지’는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훅 들어왔다. 작업장을 만들고 일년쯤 지나서이다. 좁은 공간에서 어느 날은 빵을 굽고 어느 날엔 미싱을 돌리면서 복작복작 거리다보니 공간부족에 대한 어려움이 하나둘 늘어났다. 거기에 더해 다양한 꿈들이 새록 새록 생겨나고 있었다. 청년들이 공연도 하고 아지트를 벌일 수 있는 곳,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더 많은 이들고 만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이 커져 갔다. 문탁네트워크 맞은 편에는 걸핏하면 간판이 바뀌는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새로 개업하고 좀 지나면 문 닫는 날이 점점 늘어나는 패턴이 반복되는 그런 가게자리였다. 아마도 짐작컨대 넓은 홀을 다 채울 만큼 장사가 잘 되지 않으니 차라리 영업을 안 하는게 덜 손해인 상황이 반복되는 듯 했다. 장사가 지지리도 안 되는 그 자리에 문탁의 세 번째 활동공간을 만들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보증금이며 공사비용까지 따져보면 이제껏 벌여온 일들과는 규모가 다른 일이 될 게 뻔했다. 월세며 각종 공간유지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넓은 공간에 마음껏 활동을 펼치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걸 상상하니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공간을 계약한 뒤 준비단계에서 마을카페, 마을쌀롱 등으로 칭해지던 공간은 언제부턴가 공유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가을, <마을공유지 파지사유>는 문탁네트워크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었다.     공유지 X – file   개업 이후 파지사유에서는 가지각색의...
  [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8] 공유지는 살아있다   생소한 단어 ‘공유지’는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훅 들어왔다. 작업장을 만들고 일년쯤 지나서이다. 좁은 공간에서 어느 날은 빵을 굽고 어느 날엔 미싱을 돌리면서 복작복작 거리다보니 공간부족에 대한 어려움이 하나둘 늘어났다. 거기에 더해 다양한 꿈들이 새록 새록 생겨나고 있었다. 청년들이 공연도 하고 아지트를 벌일 수 있는 곳,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더 많은 이들고 만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이 커져 갔다. 문탁네트워크 맞은 편에는 걸핏하면 간판이 바뀌는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새로 개업하고 좀 지나면 문 닫는 날이 점점 늘어나는 패턴이 반복되는 그런 가게자리였다. 아마도 짐작컨대 넓은 홀을 다 채울 만큼 장사가 잘 되지 않으니 차라리 영업을 안 하는게 덜 손해인 상황이 반복되는 듯 했다. 장사가 지지리도 안 되는 그 자리에 문탁의 세 번째 활동공간을 만들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보증금이며 공사비용까지 따져보면 이제껏 벌여온 일들과는 규모가 다른 일이 될 게 뻔했다. 월세며 각종 공간유지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넓은 공간에 마음껏 활동을 펼치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걸 상상하니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공간을 계약한 뒤 준비단계에서 마을카페, 마을쌀롱 등으로 칭해지던 공간은 언제부턴가 공유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가을, <마을공유지 파지사유>는 문탁네트워크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었다.     공유지 X – file   개업 이후 파지사유에서는 가지각색의...
뚜버기
2020.07.10 | 조회 576
지난 연재 읽기 둥글레의 인문약방
[둥글레의 인문약방 / 12화]     인문약방, 여기가 로두스다!     약사가 되기 싫었다 나는 약사라는 직업에 그다지 소명의식이 없었다. 약대 대신 미대에 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그 어떤 과목보다 미술 시간에 집중했다. 미술로 먹고 살 자신이 없어서 엄마가 권한 약대에 갔지만 미술은 내게 못다 이룬 꿈이었다. 약사가 되어서 돈을 벌게 되면 그 돈으로 미술을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다. 실제로 스물아홉 되던 해에 국내 미술 대학원 두 곳에 지원했다. 한 곳은 무참하게 떨어졌고 다른 한 곳은 전문과 과정으로 합격했다. 서류전형인 곳에서는 인터뷰 내내 미술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받았고, 시험을 치른 곳은 탈락자가 한 명도 없어서 이건 뭔가 싶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유학을 가서 제대로 공부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났다. 학비가 비싼 미국에서 공부할 방법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미국 약사가 되는 것 밖에 별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미국 약사 면허를 따겠다고 세 가지 시험을 패스하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인턴 약사에 지원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하느라 미국을 세 번이나 다녀 왔다. 결국 미국에 가지 않게 되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미술을 공부하려고 한 이유는 뭘까? 그렇게나 약사라는 일이 하기 싫었던 것일까? 한참 뒤에야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생각해 보면 미술은 내게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변명’ 같은 것이었다. ‘미술을 하지 못해서 내가 불행하구나!’라는 생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면 떠오르곤 했다. 8년 전 오빠가 불의의...
[둥글레의 인문약방 / 12화]     인문약방, 여기가 로두스다!     약사가 되기 싫었다 나는 약사라는 직업에 그다지 소명의식이 없었다. 약대 대신 미대에 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그 어떤 과목보다 미술 시간에 집중했다. 미술로 먹고 살 자신이 없어서 엄마가 권한 약대에 갔지만 미술은 내게 못다 이룬 꿈이었다. 약사가 되어서 돈을 벌게 되면 그 돈으로 미술을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다. 실제로 스물아홉 되던 해에 국내 미술 대학원 두 곳에 지원했다. 한 곳은 무참하게 떨어졌고 다른 한 곳은 전문과 과정으로 합격했다. 서류전형인 곳에서는 인터뷰 내내 미술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받았고, 시험을 치른 곳은 탈락자가 한 명도 없어서 이건 뭔가 싶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유학을 가서 제대로 공부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났다. 학비가 비싼 미국에서 공부할 방법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미국 약사가 되는 것 밖에 별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미국 약사 면허를 따겠다고 세 가지 시험을 패스하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인턴 약사에 지원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하느라 미국을 세 번이나 다녀 왔다. 결국 미국에 가지 않게 되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미술을 공부하려고 한 이유는 뭘까? 그렇게나 약사라는 일이 하기 싫었던 것일까? 한참 뒤에야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생각해 보면 미술은 내게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변명’ 같은 것이었다. ‘미술을 하지 못해서 내가 불행하구나!’라는 생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면 떠오르곤 했다. 8년 전 오빠가 불의의...
둥글레
2020.07.02 | 조회 615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공부 좀 했다    나는 공부 ‘좀’ 하는 학생이었다. 우리 집에서 사남매 중에 내가 상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조회시간에 교단 앞에 불려 나가 상도 받아서 동네에서도 소문 좀 났었다. 그래서인가 살면서 내가 공부를 좀 한다는 자신감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성적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고 당시에 학력고사 점수로 응시한 대학은 모두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1년짜리 기획 세미나 ‘내공프로젝트’ 모집 공지가 올라왔을 때 은근 두근거렸다. 기왕 공동체로 출근까지 하게 된 마당에 강도 높은 공부로 내공을 키울 수 있다니 출근길이 새삼 보람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공 프로젝트는 이문서당과 학이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문서당에서는 원문강독으로 『논어』를 읽고 학이당은 중국고대사상사 세미나와 글쓰기였다. 일주일에 이틀을 꼬박 공부하는데 활용해야 했다. 『논어』를 원전으로 강독해주시는 우샘의 음성은 무거운 경전의 말씀도 편안하게 들리는 힘이 있었다. 강독을 하시다 “우리 아들 키울 때” 라시며 교육에 유용한 꿀팁이라도 전수해주시면 동학들의 호응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전을 강독하시면서 우리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주석을 짚어 주실 때는 오랜 경륜의 내공이 느껴졌다.   학이당은 1년 동안 고대의 중국 사상 중 유학을 중심으로 천 년 간의 사유를 다루는 커리큘럼으로 짜져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없어서인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첫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읽는다고 읽는데 안 읽혔다. 우리가 너무 난감해하자 문탁샘은 배경지식을 부족한가 싶어서 『십팔사략』을 봐라, 『사기』를 읽자며 계속 참고 도서를 제시했다....
공부 좀 했다    나는 공부 ‘좀’ 하는 학생이었다. 우리 집에서 사남매 중에 내가 상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조회시간에 교단 앞에 불려 나가 상도 받아서 동네에서도 소문 좀 났었다. 그래서인가 살면서 내가 공부를 좀 한다는 자신감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성적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고 당시에 학력고사 점수로 응시한 대학은 모두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1년짜리 기획 세미나 ‘내공프로젝트’ 모집 공지가 올라왔을 때 은근 두근거렸다. 기왕 공동체로 출근까지 하게 된 마당에 강도 높은 공부로 내공을 키울 수 있다니 출근길이 새삼 보람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공 프로젝트는 이문서당과 학이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문서당에서는 원문강독으로 『논어』를 읽고 학이당은 중국고대사상사 세미나와 글쓰기였다. 일주일에 이틀을 꼬박 공부하는데 활용해야 했다. 『논어』를 원전으로 강독해주시는 우샘의 음성은 무거운 경전의 말씀도 편안하게 들리는 힘이 있었다. 강독을 하시다 “우리 아들 키울 때” 라시며 교육에 유용한 꿀팁이라도 전수해주시면 동학들의 호응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전을 강독하시면서 우리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주석을 짚어 주실 때는 오랜 경륜의 내공이 느껴졌다.   학이당은 1년 동안 고대의 중국 사상 중 유학을 중심으로 천 년 간의 사유를 다루는 커리큘럼으로 짜져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없어서인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첫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읽는다고 읽는데 안 읽혔다. 우리가 너무 난감해하자 문탁샘은 배경지식을 부족한가 싶어서 『십팔사략』을 봐라, 『사기』를 읽자며 계속 참고 도서를 제시했다....
기린
2020.06.24 | 조회 642
지난 연재 읽기 아젠다 사장칼럼
  올해 나는 길드다에서 <청년철학학교>를 시작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은 문탁 프로그램에 길드다 청년들을 참여시켰는데 이제부터는 길드다에서 독자적으로 철학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들뢰즈, 논어, 장자를 기본으로 하여 최소한 각 1년씩 ‘제대로’, ‘빡세게’ 읽히리라. 하여 6년 정도가 지나면 사유의 ‘검은 띠’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파란 띠’는 딸 수 있게 훈련시키리라.        자, 그러면 올해는 작년에 이어 들뢰즈를 좀 더 읽혀야겠다! 청년들에게 제안했다. “작년에 『천의 고원』을 읽었으니 올해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 들뢰즈 책 몇 권을 더 읽자!” 그리고, 나의 제안은 공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청년들은 나에게 문탁의 커리큘럼은 너무 올드하다고, 자신들은 좀 더 최신 이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헐~~ 얘들아 이 분들은 올드한 분들이 아니라 클래식한 분들이야. 그리고 원래 클래식은, 베토벤이 그렇듯이 당대엔 가장 신박한 스타일이었어. 그래도 청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청년들은 올해 ‘포스트 휴머니즘’을 읽겠다고 했다. 가져온 목록들을 보니 텍스트도 저자들도 낯설었다. 그래? 그럼 난 잘 모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커리큘럼을 짜봐. 그렇게 <2020 길드다 청년강학원>이 만들어졌다. (청년들은 ‘철학학교’라는 이름이 ‘구리다’고 ‘강학원’으로 바꿨다.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건데^^) 첫 번째 시즌은 <미디어와 신체>라는 주제로 슈타이얼, 키틀러, 위베르만을 읽는단다. 얼핏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는데 세상에나 공지를 올리자마자 스무 명이나 신청을 했다. 심지어 서울 강북, 일산에서도 청년들이 왔다.     히토 슈타이얼    ...
  올해 나는 길드다에서 <청년철학학교>를 시작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은 문탁 프로그램에 길드다 청년들을 참여시켰는데 이제부터는 길드다에서 독자적으로 철학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들뢰즈, 논어, 장자를 기본으로 하여 최소한 각 1년씩 ‘제대로’, ‘빡세게’ 읽히리라. 하여 6년 정도가 지나면 사유의 ‘검은 띠’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파란 띠’는 딸 수 있게 훈련시키리라.        자, 그러면 올해는 작년에 이어 들뢰즈를 좀 더 읽혀야겠다! 청년들에게 제안했다. “작년에 『천의 고원』을 읽었으니 올해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 들뢰즈 책 몇 권을 더 읽자!” 그리고, 나의 제안은 공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청년들은 나에게 문탁의 커리큘럼은 너무 올드하다고, 자신들은 좀 더 최신 이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헐~~ 얘들아 이 분들은 올드한 분들이 아니라 클래식한 분들이야. 그리고 원래 클래식은, 베토벤이 그렇듯이 당대엔 가장 신박한 스타일이었어. 그래도 청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청년들은 올해 ‘포스트 휴머니즘’을 읽겠다고 했다. 가져온 목록들을 보니 텍스트도 저자들도 낯설었다. 그래? 그럼 난 잘 모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커리큘럼을 짜봐. 그렇게 <2020 길드다 청년강학원>이 만들어졌다. (청년들은 ‘철학학교’라는 이름이 ‘구리다’고 ‘강학원’으로 바꿨다.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건데^^) 첫 번째 시즌은 <미디어와 신체>라는 주제로 슈타이얼, 키틀러, 위베르만을 읽는단다. 얼핏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는데 세상에나 공지를 올리자마자 스무 명이나 신청을 했다. 심지어 서울 강북, 일산에서도 청년들이 왔다.     히토 슈타이얼    ...
문탁
2020.06.20 | 조회 98
지난 연재 읽기 둥글레의 인문약방
[둥글레의 인문약방 / 11화]     현대판 만병통치약, 진통제     첫 직장인 종합병원에 다닐 때 동기 중 한 명이 웬만하면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해서 속으로 비난한 적이 있다. ‘아니 약학을 공부한 사람이 자신이 공부한 학문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왜 아픈데 참지?’ 난 이해할 수 없었고 되려 그녀가 무식? 해 보였다. 생리통이나 두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녀는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의 대답은 “약은 독이다”라는 원론적인 얘기였다. ‘참내! 그렇지 원래 약은 독이 될 수 있으니 잘 쓰여야 하는 거고 그래서 약학이 있는 거야!!!’ 속으로 외쳤다. 그러던 내가 최근 1~2년 동안 소염진통제를 한 알도 삼키지 않았다. 소염진통제는 감기 초기, 인후염, 염좌나 근육염 등 각종 염증과 두통, 치통, 생리통 등 각종 통증에 효과가 있고 활용도가 높아 약국에서 많이 팔리는 약이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쉽게 또 자주 먹었던 약인데도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약 2년 전 독감 후 기관지염이 심하게 와서 병원들을 전전하다 너무 약을 많이 복용하게 되었다. 그 해 여름부터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더니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그 양상도 대단했다. 엄청나게 가려웠고 긁으면 어마어마한 크기로 합해졌다.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두드러기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한방과 양방을 함께 공부한 나로서는 간에 무리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양의 약을 먹어서 몸에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단식을 했고 혈을 보충해주는 사물탕과...
[둥글레의 인문약방 / 11화]     현대판 만병통치약, 진통제     첫 직장인 종합병원에 다닐 때 동기 중 한 명이 웬만하면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해서 속으로 비난한 적이 있다. ‘아니 약학을 공부한 사람이 자신이 공부한 학문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왜 아픈데 참지?’ 난 이해할 수 없었고 되려 그녀가 무식? 해 보였다. 생리통이나 두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녀는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의 대답은 “약은 독이다”라는 원론적인 얘기였다. ‘참내! 그렇지 원래 약은 독이 될 수 있으니 잘 쓰여야 하는 거고 그래서 약학이 있는 거야!!!’ 속으로 외쳤다. 그러던 내가 최근 1~2년 동안 소염진통제를 한 알도 삼키지 않았다. 소염진통제는 감기 초기, 인후염, 염좌나 근육염 등 각종 염증과 두통, 치통, 생리통 등 각종 통증에 효과가 있고 활용도가 높아 약국에서 많이 팔리는 약이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쉽게 또 자주 먹었던 약인데도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약 2년 전 독감 후 기관지염이 심하게 와서 병원들을 전전하다 너무 약을 많이 복용하게 되었다. 그 해 여름부터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더니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그 양상도 대단했다. 엄청나게 가려웠고 긁으면 어마어마한 크기로 합해졌다.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두드러기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한방과 양방을 함께 공부한 나로서는 간에 무리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양의 약을 먹어서 몸에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단식을 했고 혈을 보충해주는 사물탕과...
둥글레
2020.05.21 | 조회 531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