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행복 꼭 필요할까요

스르륵
2023-11-21 10:53
316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지겹게도 해시태그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모두모두 행복하세요! 라고 말이다.

 

 

 

 

긍정하라, 행복할지니

 

긍정심리학의 관점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혁명적이고 참으로 유익한 이 작업을 지지하는 프로그램을 더 많은 재단과 정부가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해한 ‘행복’이 『해피크라시』에서 비판적으로 전유되는 과정의 선두에는 무엇보다 ‘긍정심리학’이 있다. 일루즈의 설명에 따르면, ‘긍정심리학’이란 ‘인간의 긍정적 특징을 잘 이끌고 잠재력을 최대한 키울 수 있도록 도와 개인의 행복에 일조하게 한다는, 즉 긍정적 태도와 행복에 관련된 주제로 20세기 말 미국 심리학회(APA, 마틴 셀리그먼)에서 강력하게 부흥한 새로운 심리학 사조다. 긍정심리학이 기존의 심리학과 다른 점은, 전통적인 심리학이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 같은 인간의 ‘약점’에 집중했다면, 긍정심리학은 개인의 ‘강점’, 즉 지극히 긍정적인 심리와 감정 상태에만 초점을 맞춘다. 즉 고통치료 전략에 만족해선 안되고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제법 귀에 익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본주의심리학’,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자존감 운동’, 그리고 21세기 ‘자조문화(self-help)’와 ‘심리 치유’를 생각나게 한다. 하여 긍정심리학은 이 연장선상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 마음의 밝은 면인 주관적 안녕감, 긍정적 감정, 진정성, 낙관주의, 회복 탄력성 등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이고, 기분좋은 아우라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하여 문제는 긍정심리학의 이러한 빅픽쳐가 (일루즈가 보는 것처럼) 꼭 그렇게 나쁜 그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더 기분좋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나? 무엇보다 행복은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니라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라는데? 어차피 이데올로기란 것이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판타지를 생산해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긍정심리학의 이런 의도는 오히려 권장할 만하게 보인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이거 좋은거 아닌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탄생

일루즈에 의하면 긍정심리학의 ‘행복 프로젝트’는 창시 불과 몇 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고, 자아와 영성, 그리고 자기 개선 능력과 정신에 관련된 문제들에 도움을 줍니다’, ‘행복의 양은 측정 될 수 있습니다(공리주의는 실패했지만)’ 이 홍보에 이끌려 세계 곳곳의 학회가 신설되고, 국제적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행에 부응하려는 전 세계 언론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중은 물론 자신만의 꿍꿍이를 가슴에 품은 정치, 경제, 교육 등의 각 분야 주체들이 긍정심리학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심리적 행복의 복음은 인종적 분열, 사회적, 성적 격차로 피폐해진 사회에서 사회적 유대를 대체했다.

 

수 많은 사설기관과 공공기관들이 긍정심리학의 너그러운 돈줄과 주요 고객이 되어주었다. 코카콜라, 구글, 인텔, 포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제너럴 밀스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 내면을 탐험하며 심리적 실마리와 의지를 찾아내려는 노동자를 격려해주는 동시에 ‘생산성’ 향상의 기대를 품은 채 행복학과 손을 잡았다. 정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은 화폐단위로 측정되던 비용과 효율의 딱딱한 지표들을 ‘행복’이라는 유연한 지표 즉, ‘행복지수’, ‘웰빙지수’로 대체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국민 생활의 지속적인 하락과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행복’을 말할 수 있기 위해, 혹은 국민이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만 하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은 서둘러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의 시대를 열었고, ‘행복부’를 신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의 흐름은 의료계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다양한 질병과 부정적인 측면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기존 의료 매뉴얼에 대응해, 인간의 덕성과 강점만을 강조하고 분류하는 긍정심리학의 ‘정신건강메뉴얼’은 관련 업계는 물론 여러 방면으로 그 영향력이 퍼져나갔고, 교육계에서는 행복 개념에 기초한 학습프로그램들이 (예를 들어 영국 초등학교의 90%, 중등 교육 기관의 70%) 역량 증진과 감정관리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신자유주의 교육문화에서는 ‘비판’이나 ‘추론’보다 인맥과 경영에 더 치우치는 ‘기업가 정신’이 에 더 환영을 받았고, 17개국 수 천개의 학교가 국제긍정교육네트워크와 연결되어 긍정교육에 귀의했다.

‘긍정적인 정신 건강'에 기초한 자기 계발의 '코칭' 기법들은 스포츠과학, 디자인, 신경과학, 동물 복지, 인문학 등등 우리 일상의 전반을 아우르며 퍼져나갔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에 의거하여 유엔은 '세계 행복의 날(3월20일)'을 정했고, OECD는 각국의 공공정책에서 '웰빙지수' 선택을 강력히 권고했다. 행복과 웰빙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열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이제 행복은 자명하고 측정가능한 ‘선’이 되어 우리 모두가 다다르고 힘써야 할 지고한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고 일루즈는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행복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당위가 됨으로써 어떤 ‘특정한’ 좋은 삶을 행복으로 환원하여 읽어나갈 위험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복은 ‘행복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행복이라는 역습

이제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스러움 그 자체도, 순박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위로도 아니며, 운명, 상황, 혹은 생의 무탈함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심리 상태들의 전체를 의미한다. 하여 ‘해피크라시‘란, 행복의 강박적 추구라는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시민권'의 개념이자, 새로운 ‘지배적 전략’이자, 새로운 ‘정치적 의사결정’, 그리고 새로운 ‘경영방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이라는 어떤 ‘공격‘을 받으며 살게 된 건 아닐까?

자본주의와 긍정 이데올로기의 콜라보는 ‘노력하면 행복 할 수 있어’를 외친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얼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평소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라’는 윤리적 금언들은 실은 알고 보면 국가와 기업들이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신자유주의 경제의 불확실성과 공공 정책의 결함을 노동자 개인의 ‘긍정적인’ 내면에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실업률, 불평등과 차별, 소득의 재분배, 빈곤과 교육 등의 사회 구조적 문제는 쉴새없이 자신을 진단하고 만들어 나가는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이고 유연한’ 영수들의 어깨에 각자 도생의 책임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루즈는 묻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가 모든 상황에 앞선다는 말, 환경보다 자아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 시대가 어떻든 열쇠는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그 기분 좋았던 ‘아우라’는 어쩌면 노동을 ‘개인의 프로젝트’로 떠넘기고, 교육을 ‘개인의 재능과 자질’의 문제로 해석하고, 건강을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로 변모시키면서, ‘사회적 진보’ 조차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어떤 문제라기보다 그저 ‘개인적 번영’의 문제로 환원시킨 자기 개선의 강박과 행복염려증의 주범이 아닐까.

하여 알고 보면 ‘긍정하라, 행복할지니’의 진정한 속내는 ‘노력하지 않는 너는 문제가 있어’다. ‘자기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해피크라시에서는 ‘비정상인’이다. 그런데 자기 개선에 열심인 사람역시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이라는 의미속에 내재되어있는 자아의 불완전성이라는 환영에 끊임없이 시달리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영수들이 느낄 바로 이 ‘자아의 불완전성’은 기업들의 완벽한 챤스인 ‘셀링포인트’가 된다. 그러하기에 시장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완벽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긍정을 강조하는 행복학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강박의 정상화’, 즉 최선의 자기 만들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명령’이다.

하여 『해피크라시』를 읽으며. 왜 그토록 많은 기업들이 ‘긍정적 태도’를 중시했는지, 왜 교육 현장에서 수년전부터 ‘기업가 정신’ 프로젝트가 성황이었는지, 나는 솔로의 솔로들은 왜 행복과 긍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지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이 일루즈의 설명처럼, 진화론, 심리학, 신경과학, 철학의 개념들을 끌어와 급조한 ‘지극히 미국적인 신념’을 가짜 과학의 어법으로 다시 쓴 것일 뿐이라 해도, 또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행복학이 행복산업에 포획되어버린 ‘강박적’ 자기 계발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나는 잠옷을 입고 출근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구글의 ‘긍정기업문화’가 여전히 멋있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우리 시대 ‘영수들’이 여전히 눈물겹다. 어렵다,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행복은 좀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기 전의 그 순간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로 바꿔 본다면 답이 좀 쉽지 않을까. 그리고 일루즈가 강조하는 것처럼, 행복의 ‘참다운’ 이미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최고의 자아’에 도달해야 할 의무같은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행복 이데올로기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고통과 고난이라는 부정값없이 긍정값으로만 홀로 구성될 수 없음도 상기한다면, ‘언제나 더 큰 행복이 필요하다’는 해피크라시의 거대한 유혹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걸까? 만약 필요하다면 어떤 행복이 필요한 걸까. 행복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복을 ‘자명하게’ 정의하고, 측정하고, 증명하고, 수치화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언제나 ‘어떤’ 희망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희망은 만들어지고 처방되어지는 것이 아닌 어떤 ‘비판적인 분석’에 기초한 희망이다. 그리고 ‘사회 정의’에 기초한 희망인 동시에 ‘가부장적이지 않은 정치’에 기초한 희망일 것이다. 하여, 행복이란 것이 일루즈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정의’와 ‘앎’에 기초한 희망으로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는 것이 맞다.

댓글 4
  • 2023-11-22 08:09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놈의 행복, 긍정, 힐링 타령...이주 지긋지긋하다싶었는데...제가 삐딱해서 그런것 만은 아니었군요. 헤헤

    • 2023-11-23 09:42

      오호...토토로의 댓글이 더 흥미롭군요. ㅎㅎ

      전...나카자와 신이치가 행복에 대해 설명한 게 늘 맘에 남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순수증여)가 내 인생에 난입(?! = happen) 순간,
      다시 말해 접신하는 순간!!

  • 2023-11-24 18:38

    최근에는 청년 토론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 주제는 '자유'였는데, '자유는 주인의식이다', '자유는 (마음의) 평화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등 의견이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토론이 진행되는 내내 어떤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어떤 당위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란 전제 위에서 논의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애초에 자유는 추구해야하는 무엇인걸까?'라는 질문이 작게 마음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어요. 마땅히 자유로우면 좋은 거 아닌가? 라는 결론 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요. 주제는 다르지만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생각이 깊어지네요...
    아직도 어떤 부분 때문에 턱턱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2023-11-26 11:51

      그러게요. 이런 자유 저도 궁금하네요~

한문이예술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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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3.11.30 | 조회 381
AI 시대가 열렸다 인공지능(AI)이 인류의 삶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우려가 현실화 된다. 러시아가 올해 초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적을 식별해 전투하는 AI 기반의 무인전투차량 ‘마르케르’(Marker)를 투입하며 AI의 판단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시대가 열렸다. 우려하였던 것처럼 AI 알고리즘의 활동반경이 챗GPT로 지식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이제 고도화된 AI는 자유와 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들과도 좋든 나쁘든 간에 상호작용을 시작했다. AI를 더는 기술과 편리의 영역으로만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AI를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은 어떤가.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고 결과는 인간의 의지에 좌우된다는 낙관론이 여전히 과학계를 지배한다. ‘AI 윤리’는 (인간의, 프로그래머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영향은 아직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AI를 상대하는 이런 인류의 안일함에 반기를 든다. 저명한 기술철학자인 저자는 “AI는 하나부터 열까지 정치적”이라고 지적한다. AI 알고리즘을 정치적 맥락에서 개념화하는 골든타임을 놓치면 인간이 AI에 권력을 뺏기고 종속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린다. 이 책은 프란츠 카프카가 100여 년 전 쓴 소설 『소송』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던 요제프 K를 소환하면서 시작한다. 그와 비슷하게 최근 미국의 평범한 흑인 남성이 고급 의류 매장에서 물건을 훔쳤단 혐의로 가족 앞에서 강압적으로 경찰에게 체포됐다 풀려난 사건을 환기시킨다. 안면인식 알고리즘 시스템의 결함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를 두고 형사는 “컴퓨터가 틀렸나 봅니다”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다. 여러 인구 집단 중 백인 남성의 얼굴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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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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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정군
2023.11.26 | 조회 358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우현
2023.11.21 | 조회 227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조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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