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필연을 긍정하는 것은 소극적이지 않다, 유소감의 『장자철학』

봄날
2023-11-20 14:31
225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변혁의 시대였고, 천자국으로서의 주(周)나라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각국의 제후들이 서로 왕이라 다투고 서로 패자를 자임했다. 전통적 가치관은 무너지고, 매일매일 생명을 이어가는 일조차 불투명한 시대였다. 장자는 통치계급의 패덕이 만든 당대의 혼란상을 “어리석은 임금과 어지러운 신하”라는 짧은 문구로 정리했다.

이 시대에 장자가 택한 삶의 방법은 “밖으로는 변하나 안으로는 변하지 않는 것(外化而內不化)”이었다. 이 문구는 장자사상을 잘 반영한다는 생각이 든다. 밖으로 변한다는 것은 만물과 함께 변하고 주어진 환경을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한다. 또 안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道)와 일체가 되어 어떤 외적인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령 <대종사>에서는 친구가 된 네 선비가 어떻게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자신의 왼팔이 변해 닭이 되는 자연의 변화에, 그러면 새벽을 알리겠다는 안명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외화와 내불화는 완전히 일치해서 하나의 생활태도의 두 측면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같은 모순성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의 현실에 대한 태도는 소극적인데 반해,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데는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장자철학의 소극성은 안명무위(安命無爲)로 표현된다. <덕충부>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그 명에 편안해 하는 것은 오직 덕 있는 자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했고 <제물론>에는 책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숨쉬는 것이 마치 자신의 형체를 잊은 듯한 남곽자기가 등장한다. 모두 자신의 명을 받아들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잊은 듯한 모습을 묘사한다. 장자는 이렇게 안명의 극치를 사유한다. 장자 서술의 여러 부분에서 “마음은 식은 재와 같고 몸은 마른 나무와 같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유소감은 이 상태가 소극의 극단이라고 한다.

앞에서 말했던 장자의 소극적 태도가 ‘밖으로 변한다’는 외화에 대응한 것이라면, “안은 변하지 않는다(內不化)”는 것은 부동심(不動心), 내면의 평정을 말한다. 천지개벽이 되고 설령 죽음 같은 큰 변화 앞에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 희노애락 같은 감정이 들끓지 않고 무심무정(無心無情)한 상태가 부동심이다. 이렇게 보면 외화와 내불화는 동시적인 태도이다.

 

“닭으로 변하고 탄환으로 변하고 소나 말이 되고, 죽고 사는 것이 모두 외화인데, 이런 변화 속에서 조금도 마음이 동화되지 않으면 이것이 내불화이다. 외화와 내불화는 한 생활 태도의 두 가지 표현으로 한 문제의 두 측면이기도 하다. 외화는 환경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고, 환경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외물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내심의 평정을 보장한다.....장자가 보기에 외화는 내불화의 조건이고 내불화는 외화의 목적이다.”(『장자철학』253p)

 

현해, 마음의 해방

장자철학의 완전한 체계는 현실적(객관적) 필연에서 나오는 운명론과 정신적(이상적) 자유를 말하는 소요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앞에서 소극적으로 현실의 필연성을 이야기한 것과 반대로, 장자는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매우 적극적이고 저돌적이다. 장자의 글 속에는 신인(神人), 지인(至人), 진인(眞人)이 많이 나온다. 이들이 바로 장자가 그린 이상적인 자유인의 모습이다.

 

“지인(至人)은 자기를 의식하지 않으며, 신인(神人)은 성과를 의식하지 않으며, 성인(聖人)은 이름을 의식하지 않습니다.”(『낭송장자』<소요유(逍遙遊)>)

 

이들을 수식하는 문장은 장자 곳곳에 들어있다. 그들은 잠자도 꿈을 꾸지 않고 깨어도 근심이 없고, 호흡이 깊고도 깊다고 하는가 하면, 사물이 (그들을)상하게 할 수 없고, 하늘까지 닿는 큰 홍수도 빠뜨릴 수 없고, 쇠나 돌이 녹아 흐르고 토산이 타더라도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정신적인 경지는 부동심(不動心), 무심무정(無心無情)이다. 현실을 긍정하는 객관적 필연성에서 출발해서 완전한 정신의 자유로 가는데 있어 이러한 마음을 얻는 것이 관건이다. 무심무정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고, 좋고 나쁨이 없다. 이러한 시비와 호오(好惡)의 감정이 없으면 자체의 본성을 상하게 않게 된다. 이같은 태도는 자신의 신체을 보존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된다. 무심무정하면 시비나 현실에서 벗어나 초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현해(懸解)의 경지이다. <양생주(養生主)>에는 “그때그때 마음을 편히 갖고 변화에 순응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다. 옛사람은 이것을 일러 현해(懸解)하고 했다”는데, 현해란 곧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풀려난다는 뜻이다. 무엇에서 풀려나는 것일까. 하나는 ‘현실의 변화’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쁨이나 슬픔같은 일체의 감정’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부동심, 무심무정으로 통과하려는 지향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장자가 정신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말하지만, 그 정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데는 필연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껏 장자가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궤변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철학의 모순은 현실세계를 한편으로 하고, 정신세계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세계에서 펴는 장자의 이상적 인간의 모습은 바로 현실세계를 딛고 이룰 수 있는 것이므로 현실과 동떨어져서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장자는 이렇게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현해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으로 여러 가지 수양적 태도를 묘사한다. <대종사(大宗師)>에는 마치 정신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의 단계를 말하는 듯한 부분이 나온다.

 

“성인의 도를 성인의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 알리기는 쉽다. 나는 지켜서 그것을 알려주니 3일 후에 천하를 잊을 수 있었으며, 이미 천하를 잊을 수 있으니까...7일 후에 만물을 잊을 수 있었으며, 이미 만물을 잊었으니...9일 후에 생(生)을 잊을 수 있었으며, 이미 생을 잊으니 그 후에 조철(朝徹)할 수 있었으며, 조철한 이후에 견독(見獨)할 수 있었고, 견독한 이후에 고금(古今)을 초월할 수 있었으며, 고금을 초월한 이후에 불사불생(不死不生)에 들 수 있었다.”(『장자철학』164p)

 

비슷한 정신수양의 단계로 ‘좌망(坐忘)’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 좌망은 형체를 떠나고 지혜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또한 심재(心齋)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며 나아가 마음으로 듣지 않고 기(氣)로 듣는 것, 즉 마음을 텅 비워 현상을 감응하는데서 그치고 만물이 오가는대로 내버려두는 경지이다.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현실에서의 감정과 시비와 선악을 벗어날 때, 장자가 바라는 지극한 정신적 자유상태, 소요(逍遙)에 이른다.

 

매일매일 소요하며 노닌다는 상상

유소감은 소요론(逍遙論)이야 말로 장자철학의 중요한 특색이라고 말한다. ‘소요’라는 말은 고전 이곳저곳에 쓰였는데, 모두 ‘이리저리 별뜻없이 왔다갔다 한다’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장자의 소요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있다. 이 말을 편안하고 한가롭게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는 의미로 쓰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장자의 그것에는 육체의 배회나 소요가 들어있지 않다. 또한 <소요유>라는 편명처럼 장자의 소요는 ‘놀다’라는 의미의 ‘유(遊)’자와 결합하여 더욱 극적인 느낌을 준다. 장자의 소요유는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신의 세계에서 마음껏 자유로움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현실세계에서 어찌할 수 없던 운명의 필연에서 벗어난 상태가 현해이고, 현해로부터 정신의 자유로 한 걸음 들어섰다고 한다면, 이제 그렇게 현실에서 해방된 정신이 누리는 자유는 어디까지일까?

 

“지금 자네는 큰 나무를 가지고도 그것이 쓸모없다고 걱정하고 있네. 왜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곳(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그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주변을 느긋하게 어슬렁거리거나 나무 아래에서 유유자적 낮잠이나 청하지 않는가?”(낭송장자』<소요유(逍遙遊)>)

 

유소감은 “소요유의 주체는 마음이고 노니는 곳은 환상 속의 무하유지향”이라고 말한다. 그럴듯한 말이다. 소요유의 내용은 장자의 사유가 마음 속의 무궁한 우주속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며 노니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경지에 서서, 자연무위의 경지에서 노닌다...끝없는 도(道)를 체득하여 적정(寂靜)한 데서 노닌다”든지, “우주만물의 법칙을 따르고 육기(六氣)의 변화를 파악하여 무궁한 경지에서 노닌다”든지 하는 것이 가능하다. 구름을 타는 것은 기본이고 “해와 달에 올라타 사해(四海)밖에서 노닐며...속세의 밖에서 노니는 것”도 가능하다. 현실에 비관적이고 절망해서 세상을 떠나려 했던 장자는, 마음의 세계로 들어오자마자 낙관주의자로 변화한다. 사람들이 장자에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현실을 뛰어넘는 마음과 정신의 쾌락을 시원하게 보여줌으로써 즐거움과 신비스러움에 더해 일종의 자유분방한 미적 감흥을 충분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장자가 다르게 읽혔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에서 벌어지는 이 신비하고 환상적인 장면이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이 지점에서, 장자의 철학을 ‘유심론(唯心論)’이라고 비판하는 소리가 나온다. 나도 처음 장자를 읽었을 때, 마음 세계의 스케일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흥, 마음으로는 뭐를 못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장자철학』을 읽으면서 무하유지향에서 소요하는 정신적인 이상형을 그린 장자가, 과연 유소감의 말대로 피세(避世)적 세계관과 비정치적 사유에 그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왜냐 하면 이번에 읽은 장자에서, 나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장자의 비관적 언설 속에, 당대의 ‘어리석은 임금과 어지러운 신하’에 의해 벌어지는 혹독한 사회상이 고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는 개인적이고, 정신적이어서 현실을 개혁하는 등의 현실적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유소감의 비판은 지극히 단선적이지 않은가. 이것은 모든 권리에서 멀어지고 모든 소통에서 떨어져버린 사람에게 “왜 힘들여 소리쳐서 알리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목소리를 낸 탓에, 바로 그 현실로부터 영원히 스러질 수도 있는데, 그것을 ‘의로운 죽음’이라고 추켜세우고, 입을 닫은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맞을까?

대만 국립중앙대학의 정종모 교수는 그의 논문 “장자의 소요유와 정치적 자유”에서 장자의 안명을 이렇게 해석했고, 다시 장자를 읽는다면 나는 그의 주장을 따라 안명론과 소요론을 새롭게 읽어보고 싶다.

 

“결국 안명(安命)과 부득이(不得已)는 언뜻 보면 현실에 순응하라는 숙명론을 말하는 것 같지만, 핵심은 자신의 내면적 본성과 이치에 순응하라는 의미이다. 즉 그것은 외부적 강압에 대한 순응이나 현실적 한계에 대한 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러한 속박과 한계를 넘어 자기의 본성과 가치를 발휘하라는 권고이다. 장자에게 필연의 강조는 외부적 속박을 감안해서 자유의 영역을 적당히 양보하라는 보수적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원리와 개체의 자유의지를 궁극적으로 합일시키라는 적극적 권고인 것이다.”

 

댓글 1
  • 2023-11-23 09:51

    전 " 外化而內不化" (지북유)가 좀 어렵게 느껴져요.
    유소감처럼 해석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도 들고유.

    잘 읽었어요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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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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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정군
2023.11.26 | 조회 360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우현
2023.11.21 | 조회 22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조회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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