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박세당의 장자읽기

여울아
2023-11-13 02:13
203

박세당의 장자 읽기

『남화경주해산보』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절대자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도가철학의 관점에서 장자철학을 살펴보았다. 시즌4에서는 조선 유학자 박세당의 “장자 읽기”를 통해 유학자들이 어떻게 금서였던 “장자”에 접근하고 해석했는지 “장자의 도”를 중심으로 도가철학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박세당은 누구인가

 

내가 박세당에 대해 관심을 둔 이유는 요즘 한창 재미있게 보는 사극 <연인> 때문이다. 남우조연으로 나오는 남연준은 박세당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로서 “수찬”이라는 관직을 수행했다는 점까지 닮아있다. 그러나 이후 이 둘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수찬은 경연을 담당하고 왕을 자문하는 역할과 더불어, 국가의 모든 편찬을 주관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 편찬에도 참여한다. 드라마에서 남연준은 명과 주자학의 신봉자이자 의리와 지조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의 대표주자이다. 그러하기에 병자호란 당시 사절단(서장관)으로 청에 문안인사를 다녀오라는 인조의 명을 거절하고 투옥된다. 그렇다면 박세당은 어떠한가. 그는 32세에 등용되어 8년 여 간 관직생활을 지냈으며, 이때 수찬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쟁으로 자식을 잃자 수락산 자락으로 들어가 수차례 벼슬을 내리는 왕명에도 불구하고 은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 등 각각의 해설서 『사변록』을 지었으며, 특히 『도덕경』과 『장자』의 해설서를 둘 다 지은 최초의 조선시대 유학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조반정의 공신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정2품을 지냈다. 비록 그는 이른 나이(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어 등용이 늦어졌으나 대대로 명망가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은둔생활 도중 그가 (1668년 혹은 1669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간 서장관의 자격으로 청의 수도 연경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청에 가기를 거부하고 투옥된 남연준과 은둔을 깨고 청에 다녀와 견문록 <서계연록>을 남긴 박세당. 그렇다면 이들의 행보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쇠퇴하고 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이 등장하는 시기는 현종과 숙종 때의 일이다. 박세당은 현종 9년에 청에 다녀왔고, 십여 년 뒤 숙종 6년(1680년)에는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라는 장자 해설서를 주해했다.

 

8997918052_1.jpg *남화경은 장주의 존호이다

 

여기서 나는 『장자』에 대한 오해를 한 가지 짚고 싶다. 『장자』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금서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에게는, 소론파(친청) 박세당의 『남화경주해산보』가 이후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모름지기 금서란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통용되는 것이 국룰 아닐까? 그런데 『남화경주해산보』는 국립중앙도서관 등지에 필사본뿐 만 아니라 현종 때 활자본까지 각각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장자』는 당시 금서가 아니라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장자』 간행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자. 조선시대 초기부터 조정은 『장자』를 간행하여 공식적으로 배포했다. 1425년 『세종실록』에는 문신들에게 『장자』를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40여년 뒤 세종은 『장자』뿐만 아니라 『주역』, 『노자』, 『열자』 등을 나누어주고 기한을 정해 다 읽게 했다고 한다. 역시 공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세종답다. 그는 기꺼이 금단의 선을 넘어 성리학뿐만 아니라 노장계열의 책들까지 신하들이 폭넓게 공부하도록 독려했던 것이 아닐까. 1474년(성종5년)에는 세종 때 사신들이 중국에서 구해온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를 동활자로 찍어 배포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의 오해와 달리, 『장자』는 조선의 군주와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선조, 효종과 같은 왕뿐만 아니라 노장을 이단이라 배척했던 노론파(송시열의 제자 한원진)에서도 장자 주해서를 낼 정도였다. 이 당시 독서록에는 “곽상, 여혜경, 초횡의 주가 전해지고 있지만 오직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와 박세당의 집주가 성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희일은 송대 정이 계열의 도학자로서 유학을 근본으로 도가와 불교를 해석해내고자 시도한 인물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임희일을 유학자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전통문화사 『장자』 서문 14p) 그러하기에 박세당은 조선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유학 안에서 장자의 언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1703년 박세당은 <사변록>에 담긴 주자학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던 도중 죽는다.

 

장자의 도는 절대자유가 아니라 대소지변(大小之辨)이다

 

지금 저 들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는 큰일을 할 수 있지만, 쥐를 잡지는 못한다. 지금 그대가 큰 나무가 있는데 그 쓸모없음을 걱정하니, 어찌 무하유(無何有) 고을, 광막 들판에다 심어놓고, 슬렁슬렁 그 곁에서 거닐거나 자유롭게 그 아래에 누워 놀거나 하지 아니하는가? (『박세당 장자읽기』 「소요유」 62p)

 

나무, 황야, 자연, 숲, 햇빛, 풍경, 가지, 옥외

 

『장자』 「소요유」편 마지막 에피소드는 무하유지향이다. 여기서 장자와 혜시는 쓸모없음에 대해 논쟁한다. 지난 1234에서 나는, 도가철학의 대가들이 이 장면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진고응은 대자유로, 유소감은 절대자유로 해석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박세당은 어떠할까? 먼저 장자가 혜시에게 무하유지향으로 응수한 까닭을 살펴보자. 이전 장면에서 혜시는 장자에게 “가죽나무는 크기만 하지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장자는 들소가 작은 생쥐는 잡지 못하지만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대꾸함으로써 큰 것의 쓸모를 대변한다. 이에 대해 박세당은 배우는 자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장자에게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유하자면, 큰 것은 장자 자신이고 작은 것은 혜시라는 것. 그는 “쓸모없이 큰 사람(쓸모없음)이야말로 소요(무하유지향)를 즐기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작은 것보다 큰 것의 가치를 우위에 둔다. 이는 앞서 붕새(큰새)가 작은 매미와 비둘기에게 비웃음을 받을 때,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남들에게는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다(絶異)”는 그의 주해와 일맥상통한다.

 

박세당은 「소요유」편 첫 번째 붕새우화에서부터 마지막 무하유지향까지 “큰 것과 작은 것의 분변(大小之辨)”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대소지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착된다. 하나는 크든 작든 모두 충분하다(자족하다)는 (곽상의)입장과 다른 하나는 큰 것의 가치를 지향하는 입장이다. 박세당은 요임금과 허유(고대 은자)의 에피소드에서 후자의 입장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뱁새가 깊은 숲에 둥지를 지어도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생쥐가 황하 물을 마셔도 자기 배를 하나를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군주시여! 나는 천하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방 담당자가 비록 제사음식 마련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축관(祝官)이 제사상을 넘어가서 그의 일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박세당의 장자읽기』 「소요유」 42p~46p)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뱁새는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생쥐는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천하가 필요 없다고 허유는 일축한다. 이에 대해 진고응은 『노장신론』에서 허유가 탐욕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224p). 이와 반대로 박세당은 오히려 허유가 자만하여 요임금보다 자신을 높이고 있다고 비난한다. 박세당에게 제사음식을 만드는 일은 “비천”하고 제사 축문을 읽는 일은 “존귀”한 일이다. 따라서 주방 담당자가 요리를 못한다고 해서 축관이 그를 대신해서 요리를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박세당은 이를 “가령 요임금이 천하를 잘 다스리지 못하더라도 허유 자신은 대신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며, 허유가 요임금을 요리사로 낮추고, 자신을 축관으로 높인 것으로 해석했다. 진고응은 허유 편에 서서 세속적 인간들의 공명심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는데 비해, 박세당은 “덕의 크기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가의 대표성인 요임금의 뜻을 허유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박세당에게 장자는 “고원함이 지나쳐 방자한 사람”일 뿐이다. 이렇듯 박세당(큰 뜻)과 도가철학(대자유)은 큰 것을 지향하는 데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기 추구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별의식(분별)은 어떻게 『제물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장자의 도는 만물제동이 아니라 이일분수이다

 

도는 무엇에 은폐되기에 진짜와 가짜가 있으며, 말은 무엇에 은폐되기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의논이 있는가? 도는 어디엔들 존재하지 않겠으며, 말은 어디에 존재한들 옳지 않겠는가? (『박세당 장자읽기』 「제물론」 94p)

 

박세당에게 시비분별의 원인은 도가 은(隱)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은폐(隱蔽)”라고 번역한 이유는 곽상이 주석에서 “은폐”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도가 “숨어있다”, “은폐되어있다”라는 해석의 시초는 후한시대 대학자 정현의 『예기』로부터이다.(『친절한 강의 중용』 북드라망 우응순 106p) 그는 君子之道, 費而隱(군자지도 비이은)을 “도가 어긋나면(費) 숨겨진다(隱)”고 풀이했다. 이와 달리 주희는 『중용』 12장에서 “도의 쓰임은 일상에 퍼져있지만, 도의 본체는 은미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고 풀이했다. 정현과 주희의 차이는 무얼까? 정현은 도가 어떤 이유로 인해 잘 은폐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주희는 도가 그 자체로 파악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이라고 해석했다. 박세당의 “費”주해는 “도가 어디에 간들 없는 데가 없다(道無所往而不存)”고 함으로써 주희의 해석을 따르고 있지만, “隱”주해는 번역자가 곽상의 “은폐”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주고 있다. 여기서 『장자』의 원문은 “도가 무엇으로 인해 은폐되는 것”을 강조하는 정현의 주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박세당의 입장은 “도의 본체는 그 자체로 오묘하여 알 수 없다”는 주희의 해석에 가깝다.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저자 김시천은 이렇듯 곳곳에서 성리학의 기본 개념들이 『장자』로부터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주자가 『장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 못했으며, 특히 박세당이 성리학의 태극, 체용론, 이기론 등에 영향을 받아 『장자』를 풀이했다고 평가한다.(167p) 나는 박세당의 주해를 다음과 같이 읽고 싶다. “도는 어디든 있지만 그 본체를 파악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 옮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생겨난다.”

 

박세당은 배우는 자의 길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루기 힘든 큰 것보다는 쉽게 이룰 수 있는 작은 것(小成)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지(小知)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지에 눈이 가려져 도를 잃게 된다. 이렇듯 시비논쟁에 휘말리게 되면 이 둘이 하나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대소지분 때문에 시비논쟁이 시작된다는 주장과 달리, 박세당은 오히려 대소지분의 도가 제물론의 ‘시비 없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빗방울, 시트, 무당벌레, 물방울, 이 슬, 이슬 방울, 비말, 곤충

 

옳다는 것을 옳다고 해주고 옳지 않다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해준다. 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이다...(중략) 사물은 본래 그러한 바가 있고 사물은 본래 옳은 바가 있다. 무슨 사물이든 그렇지 않은 사물이 없고 무슨 사물이든 옳지 않은 사물이 없다.(『박세당 장자읽기』 「제물론」 107p)

 

박세당은 만물제동(萬物齊同)이 아니라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견해이다. 김시천은 만물제동이 오늘날의 “만물 평등”이라는 뜻에 가까운 거라면 이일분수는 ‘하나의 이치’를 지향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박세당의 해석이 임희일의 입장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171p) 그럼에도 박세당은 왜 임희일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성리학의 이일분수 개념을 여기에서 연결시켰을까? “날개 달린 놈은 날아다녀야 맞고(然), 발굽 있는 놈은 달리는 것이 맞다(然). 그는 이들이 맞다고 하는 바에 대해 맞다고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맞지 않다고(不然)하는 바에 맞지 않다고(不然) 응해준다. 이렇듯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옳은 것이 사물에 본성(본정)이다. 그의 입장에서 맞지 않은 것이 없고 옳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는 모두 하늘의 이치(天理)이기 때문이다.” 이일분수란 이렇듯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지만 이치는 하나라는 것. 따라서 그는 이 하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알면 시비논쟁이 사라지고(시비 없음) 도가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만물은 모두 같지 않다. 서로 다양한 생김새와 본성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에게 ‘생명의 정수(精髓)’는 오직 하나라는 것, 이것이 제물론에 대한 박세당의 해석이다. 만물제동을 주장하는 도가철학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무언가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는 방식의 유가해석을 비판하고, 오히려 이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시비논쟁으로 이어진다는 입장이다. 

 

...................................

 

도가철학의 『장자』를 만났을 때와 달리, 나는 박세당의 『장자』가 낯설지 않아서 당황했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이토록 조선시대 유학자 박세당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는 『장자』를 읽기 전 먼저 『사서』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쌤을 통해 『장자』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작년 <장자세미나>에서 나는 왜 장자 철학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의문은 유학자들 또한 장자를 읽는 문제의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사기』의 장자 해석과는 거리를 두고, 『장자』의 “일상성”에 주목함으로써 『장자』를 정치적으로 읽어내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나의 책 읽기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 체화된 '장자의 유학화'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앞으로 『장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도가철학이면 어떻고 유학자의 시선이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나는 학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대학원생도 아닐뿐더러, 누구도 내게 학문적 정밀함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올 한해 1234를 통해 나는 『장자』 「소요유」편의 주제를 자유라거나 혹은 대지(大知)라고 말할 때 그 자장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장자』를 읽을 때마다 맥을 잡지 못했던 이유. 가령 「소요유」편은 도가철학으로 읽고, 「양생주」편은 유학 안에서 읽을 때 발생하는 모순을 나의 언어로 메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장자』를 만나는 것이 나의 숙제이다.

 

댓글 1
  • 2023-11-14 15:22

    뱁새와 생쥐 역시 천하로군요!
    이이불이, 서로 다른 둘은 둘이 아닌 것인가요?
    역시 장자가 새삼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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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3.11.26 | 조회 23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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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조회 345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우현
2023.11.21 | 조회 22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조회 30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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