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2회] 풍지관(風地觀), 잘 보면 알게 된다

봄날
2023-11-12 22:34
220

다섯 달 동안 주역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발표회를 치렀다. 준비하면서 이번엔 좀 색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에세이를 발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퍼포먼스나 전시같은 형식을 택했다. 나도 몇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민화를 이용해 주역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8개의 소성괘를 민화기법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민화로 주역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민화 작품이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태극모양이거나 3획의 검은색 막대그림은 주역을 아는 사람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러니까 8개의 소성괘가 가진 물상을 그린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말로 소성괘의 물상을 제대로 그려보리라는 욕심도 생겼다.

 

하늘, 땅, 연못, 번개(우레), 불, 물, 산, 바람의 물상을 가진 소성괘를 가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하늘을 그냥 파랗게, 땅을 그냥 황토색으로 칠하는 것은 소성괘를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산, 번개 등을 형상화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를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바람은 기체의 움직임 자체이니 육안으로 볼 수는 없고, 불거나 멈추는 데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발생과 소멸 또한 예측할 수 없다. 형체없는 자연물의 형상화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다가 마침 손괘에 배속된 자연물에 나무도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나무에 이는 바람’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람을 다시 보게 됐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공기의 흔들림으로, 내 피부에 닿는 감각으로 바람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분명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인식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바람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왜 풍지관괘(風地觀卦)를 ‘주역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참된 인식의 과정, 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관(觀)이라는 글자는 자세히 보다, 보이다, 나타내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 등등의 뜻을 가진다. 이런 뜻을 가진 글자가 관(觀) 하나만은 아니다. 볼 견(見)자도 있고, 나타낸다는 뜻의 보일 시(示)자도 있다. 하지만 관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꿰뚫어본다는 뜻을 포괄한다. 이른 바 통찰(通察)을 뜻하는 글자가 바로 관이다. 괘명은 그 괘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므로 관괘는 본격적인 ‘통찰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괘이다.

 

풍지관괘의 물상은 ‘땅 위에 부는 바람’이다. 상괘가 바람이고 하괘가 땅이니, 땅위의 모든 사물을 바람이 훑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혹자는 이 바람이 천둥과 비를 동반하는 태풍같은 바람이라고 해석하지만 나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때의 바람이, 땅위의 사물을 찬찬히 스캔하듯 훑고 지나가는 산들바람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단전에서는 이때의 ‘봄(觀)’을 대관(大觀), 즉 크고 넓게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동시에, 시야를 넓혀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소성괘의 성질을 가지고도 괘의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데, 대관할 수 있는 것은 상괘, 즉 윗사람이 공손함의 덕을 가진 손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체를 조망하는 대관(大觀)과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내면을 비우는 자세는 참된 인식과정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게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크게 보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려니와 자신을 낮추라는 것도 너무 추상적이다. 관괘의 괘사에 매우 구체적인 힌트가 있다.

 

“관은 (제사를 위한) 손을 씻고 (제사를 위한) 음식을 올리지 않는 것이니, 믿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듯 보리라(觀 盥而不薦 有孚 顒若)”

 

관괘는 아래에 있는 네 개의 음효가 위의 두 개의 양효를 우러러보는 형태를 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양효가 제사를 지내는 주체라고 생각하고 괘사를 풀어보자. 관이불영의 관(盥)은 제사를 앞두고 손을 씻고 제주(祭酒)를 땅에 부어 신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천(薦)은 제사음식을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사를 위해서 손을 씻었는데, 정작 제사음식은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괘사를 이해하려면 행해지는 ‘일’보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변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이천은 변하는 요체가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즉, 제사를 올리기 전에는 오로지 제사를 통해 하늘에 간절히 소망하고 정성들일 것만 생각하는데, 막상 제사과정을 따라 절을 하고 음식을 올리다 보면 과정의 번다함으로 인해 “그 마음이 처음 손을 씻을 때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제사가 많이 간소화되고 각자의 집안에 맞게 제사를 치른다. 그러나 그 형식과 마음가짐의 관계는 똑같다. 제사를 위해 가족이 모이고,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사를 지내려는 마음이 희석되고, 제사의 절차나 음식에 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오가다 보면 제사를 앞두었을 때의 마음가짐과는 딴판으로 흐를 수 있다. 관괘의 괘사가 실제 제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제사는 그저 비유일 뿐, 어떤 일이건 시작 전의 마음가짐과 진행되는 과정의 그것이 일관되는지가 중요하다.

 

요컨대 사람들이 보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마음이다. 괘사의 뒷부분 유부옹약(有孚顒若)은 구오가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임함으로써 드러나는 결과 혹은 효능이다. 옹(顒)은 ‘우러러본다’라는 뜻의 글자로, 구오의 마음가짐만으로도 사람들이 감화되는 모양이다. 구오의 역할은 하늘을 보고 자연, 즉 천지가 운행하는 이치를 봐서 안 다음, 아래로 굽어보고 백성들을 (바람처럼) 살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래의 네 음효들은 구오를 우러러보고 그것을 믿고 따른다. 제사과정을 말했을 뿐인데, 관괘는 우주의 운행원리를 인간사회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앎을 이끄는 여러 개의 시선

그러고 보면 관괘의 괘사와 효사에는, 상대로 하여금 앎에 이르게 하는 ‘보여줌’과 스스로의 앎에 다다르는 ‘봄’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사에서는 이렇게 앎으로 귀결되는 여러 개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각 효의 관(觀)은 ‘보는 사람’이다. 아래 네 음효의 시선은 모두 구오를 향한다. 하지만 각 효가 가진 기질이나 상황에 따라 그 봄은 때로는 능력의 모자람이나, 부분적인 것을 전체인 것처럼 아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령 초육의 효사는 “어린아이가 보는 것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지만, 군자는 부끄럽다(初六 童觀 小人无咎 君子吝)”인데, 이 동관(童觀)은 보고 듣는 것이 아직 많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또 육이에는 규관(闚觀)이 등장한다(六二 闚觀 利女貞). 이것은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을 처음이자 끝인 것처럼 아는 것, 즉 부분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육이는 자신의 시선이 닿는 것을 파악하는 것보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서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한편 네 음효의 제일 위에 있는 육사는 구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존재로서 바야흐로 구오의 신임을 받아 중요한 역할을 할 존재이다. 왜냐 하면 육사는 다른 음효들과 달리 구오가 이루어낸 업적을 제대로 판단하고 그와 함께 하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육사의 효사는 “육사는 나라의 빛을 봄이니, 왕에게 손님대접을 받음이 이롭다(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이다. 왕에게 손님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국사를 다루는 중요한 자리에 등용된다는 뜻이다. 육사는 구오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오가 이루어놓은 그 나라의 빛, 즉 문화의 찬란함을 제대로 본다. 관국지광은 현대의 ‘관광’의 출처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관광은 그 뜻이 아주 협소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광은 보는 것, 소비하는 것에 치중해서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의 역사나 문화, 예술 등을 깊게 살피는 것에 소홀해졌으니 아쉽기만 하다.

 

참된 인식은 나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구오와 육삼의 효사에 등장하는 관아생(觀我生)이 그것이다. ‘나의 생김을 본다’ ‘혹은 내가 낳은 것을 본다’로 해석하는 이 관아생은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관아생은 나를 본다는 것이다. 육삼의 관아생(六三 觀我生 進退)은 자신의 생김을 봄으로서 나아감과 물러남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 또 구오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대번에 군자의 앎에 이르는 존재이다(九五 觀我生 君子无咎). 요컨대 스스로를 보는 것은 참된 지혜를 얻는 첩경으로서, 관괘가 말하려는 ‘참된 인식’을 위한 성찰의 방식이다.

 

민화를 그리면서 바람을 다시 보게 되었듯, 관괘를 들여다보며 ‘과연 제대로 보고, 참된 인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내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과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보고 있을까 자문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표면적인 ‘봄’에 치우쳐서 통찰적 시각을 얻지 못한다. 아는 것이 많지 않아 어리석은 동관(童觀)이나, 부분적이고 치우친 앎인 규관(闚觀)에 머무르는 때가 많을 것이다.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관아생(觀我生)없이 관괘의 괘사가 말하는 ‘눈을 들어 천지의 도를 보고 아래를 굽어살펴 사람들에게 베푸는’ 군자의 통찰지를 얻기는 힘들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그것이 절대 오를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관괘를 통해 주역은 어린 아이의 봄에서 자기 지평안에서의 봄으로, 나라의 빛을 봄으로 인식의 역량을 키워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시선을 나에게 집중하고 다시 군자되기에 도전!

 

댓글 1
  • 2023-11-15 09:38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봄날님. 소성괘 8괘의 상을 그린 민화, 깜짝 놀랬더랬어요 ㅎㅎ
    관괘는 위정자들이 민초들을 살피는 괘로 많이 해석되죠.
    봄날샘은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에 더 많이 비중을 두고 해석하셨네요.
    봄날샘의 군자되기 도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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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3.11.26 | 조회 23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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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조회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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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3.11.21 | 조회 22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조회 30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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