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엄마를 돌보는 중이다

인디언
2023-11-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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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돌보는 중이다

『어머니를 돌보다』(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를 읽고

 

일어나보니 5시 40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30분쯤 명상을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엄마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다. 살펴보니 오른쪽 손이 많이 부어 고무장갑 손가락처럼 팽팽하다. 손가락을 주무른 후 주무시고 있는 엄마 몸을 왼쪽으로 돌려본다. 혹시나 좀 나을까 하고.

엄마 식사준비를 해놓고 가보니 일어나시려는 중이다. 요즘 들어 일어나고 걷는 게 더 힘들어지셨다. 가능하면 혼자 하실 수 있게 기다리는데, 이제는 거의 혼자 하기는 힘들다. 부축을 해서 몸을 일으켜 세워도 제대로 앉아있지를 못하신다. 한 팔로 등을 받치고 다른 팔로 다리를 침대에서 내린다. 엄마 팔 아래에 내 팔을 넣고 부축해 일어나게 한 후 보행기에 의지해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 입구에서 보행기를 치우고 여기저기 부착해놓은 손잡이를 잡고 변기까지 가서 겨우 앉으신다.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손을 놓으면 안 된다. 화장실에서 나와 보행기를 잡으려는 순간 엄마가 주저 않으셨다. 내가 한 팔을 붙잡고 있어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내 허리에 충격이 왔다. 나도 주저앉았다. 엄마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붙잡고 앉아서 잠시 쉬었다가 뒤에서 껴안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내 몸을 벽에 기대야 가능한 일이다. 뒤에서 엄마를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식탁까지 왔다.

 

엄마랑 함께 산지 4년째고, 파킨슨과 치매 진단을 받은 건 2년이 좀 지났다. 처음에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감정처리 때문에 힘들었고 병에 대한 이해, 엄마와 나에 대한 이해를 거쳐 좀 편안해졌는데, 올해 여름부터 완전히 국면전환이다. 인지문제만이 아니라 이제는 몸이 문제다.

 

처음 내가 읽은 책은 이 책이 아니었다. 『치매에서의 자유』(안드레아스 모리츠)라는 책이었는데, 자연요법으로 치매(알츠하이머병)를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제약업계와 주류의료계가 그들의 이익 때문에 치매를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이라며 환자들을 속이고, 그들의 치료가 오히려 치매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치매를 완치할 수는 없지만 지혜로운 식생활, 생활습관, 운동으로 치매를 예방할 수 있고 치매에 걸리더라도 완화와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특별히 글을 쓸 만한 느낌이나 감동이 생겨나지 않았다. 늦었지만 책을 바꾸기로 했고, 내가 좋아하는 정희진이 “나는 책을 한 번 이상 읽는 일이 드문 독자다. 그러나 이 책만큼은 쿵쾅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여러 번 읽었다. 몸에 새겨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고 쓴 걸 보고 『어머니를 돌보다』를 큰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어머니를 돌보다(Mother Care)』는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린 틸먼이 11년간 자신의 어머니를 돌본 경험을 사실적으로 쓴 책이다.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어머니에 대한 딸의 의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딸, 결국에는 맞이하게 되는 죽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양가감정. 어머니를 돌보는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나이 듦과 병듦, 필수 노동으로서의 돌봄, 그리고 그 끝에 놓인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을 냉철하게 보여준다. 또 불법이민자를 간병인으로 고용하면서 돌아보게 된 윤리적 문제, 노인환자를 대하는 의료시스템의 문제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가 이 책을 쓴 목표로 직접 말한 것처럼 “당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위로를 건네거나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위로 받았고 도움이 될 만한 것들도 얻었으며 동시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틸먼의 어머니는 처음에 알츠하이머병이라고 진단되었으나 나중에는 정상뇌압수두증으로 밝혀졌다. 같은 MRI를 보고 4명의 의사가 다른 진단을 내렸다. 수두증은 20%정도만 제대로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증세가 우리 엄마와 거의 비슷했다. 혹시 엄마가 수두증일 수도 있을까? 생각할 만큼.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 즉, 병명은 달라도 나타나는 증상은 비슷할 수 있는 걸까?

엄마는 어느 날은 거의 하루 종일 주무시고, 또 다른 날은 밤에도 거의 안 주무신다. 어느 날은 보행기를 의지해 혼자 걸어 나오시고 또 다른 날은 혼자서는 꼼짝도 못하신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전반적으로는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딱딱해지는 느낌이다. 노인에게는 신체활동이 필수적이라는데 거의 신체활동을 하지 못한다. 실제로 노인들의 생존은 신체활동에 달려있다는데...... 암울하다. 말씀하시는 것도 이제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요즘 엄마와 나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부모가 거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가족은 놀랍고 당혹스럽고 지속적이고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린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대면하지 않은 문제들이다. 이런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삶에 관한 사실들의 크기와 깊이와 영향력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 엄마도 틸먼의 어머니처럼 예고 없이 중병(파킨슨, 치매)에 걸렸고 최근에 악화된 엄마의 상태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떤 것이 엄마를 돕는 올바른 방법인지 매일 매일이 긴박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상황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도 알 수가 없어 두렵고 답답하다.

 

“어려운 의학적 문제들, 확신의 부족, 선택지와 가능성이 적거나 없다는 느낌. 무거운 장애물이 당신을 약하게 만든다. 실제로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오로지 그런 것들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담대하게.”

 

그렇다. 누구라도 이 일을 완벽하게 제대로 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얼마 전 엄마가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발톱이 거의 빠지려고 하고 염증이 생겨서 발톱을 빼고 농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남편과 아들이 휠체어를 빌려서 겨우겨우 정형외과에 갔는데 “우리는 재활의학과라 이런 거 안 해요.”라고 엄마의 치료를 거절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환자가 힘들게 병원까지 왔는데 이렇게 거절을 해야 했을까? 이건 진료거부가 아닐까? 할 수만 있으면 소송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른 정형외과에 갔더니 거기서는 또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힘든 노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엑스레이를 찍었다. 치료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그러나 병원 수입에는 필요한 그런 진료였다. 노인 환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상황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오늘 엄마가 그동안 다니던 병원에서 진료의뢰서와 검사자료 등을 챙겨왔다. 다음 주에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서. 병원을 옮기는 이유는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데 의사는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주무시고 기운이 없는 엄마가 혹시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건 아닌지 물어도 그에 대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처방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의사도 모르기는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병원을 옮긴다고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해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다. 그런데 벌써 걱정이다. 흔히 병원을 옮기면 이전 병원의 자료를 다 제출하지만 그 병원에서 모든 검사를 다시 받는다. 거동이 불편한 엄마로서는 보통 큰 일이 아니다. 병원에서 온 문자에는 ‘당일 검사가 어렵다’는 문구도 있다.

 

“노인 환자는 의학계에서 가망이 없는 짐짝으로 여겨진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의사, 간호사, 병원으로부터 최선의 서비스를 받아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반드시 저돌적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이 말을 깊이 새긴다. 틸먼이 말한 것처럼 의사의 ‘기대’를 따지고 살펴볼 것이다. 엄마의 회복 능력을 판단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의사이고, 그 의사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엄마가 도움을 받을 수도, 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검사에 대해서도 저돌적으로 의견표명을 할 생각이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는 검사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두 달 전에도 MRI검사를 했는데 이 자료로 판단할 수 없고 새롭게 검사를 해야만 진단과 치료가 가능한 것인지 따져 물을 것이다. 처방하는 약에 대해서도, 제안하는 치료방법에 대해서도 따져 묻고 싶다. 치료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의료시스템이라 해도 할 수 있는 만큼 전문가와 의료종사자에게 맞서야만 한다.

 

 

틸먼의 어머니는 간병인과 함께 자신의 아파트에 살고 틸먼과 언니는 같은 도시에 살면서, 다른 자매는 좀 떨어진 도시에 살면서 어머니 돌봄에 동참하고 있다. 세 자매는 어머니 돌봄과 관련하여 모든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며 서로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돌본다. 간병인은 처음 1년간은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명을 바꾸었지만, 한 사람이 10년 동안 어머니와 살며 보살피는 행운이 있었다. 나는 자매가 아니고 혼자 엄마를 돌보고 같은 집에 함께 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간병인이 있어서인지 그의 경험은 거의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머니는 간병인에게 의지했다. 어머니가 간병인에게 더 많이 의지할수록 나는 더 행복해졌다. 더 많은 시간을, 자유를 얻었다.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멀어지면서 나는 어머니의 것이 아닌 공기를 마셨다. 그것이 곧 자유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11년이나 어머니를 돌봐온 틸먼은 6-7 년째쯤 되었을 때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싶었다. 어머니가 병을 얻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심리 상담을 받아왔는데 심리상담사는 일찍부터 어머니를 좋은 요양원에 보내라고 권했다. 틸먼은 6-7 년쯤 되니 기력이 쇠했고 ‘원통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노인을 싫어했고, 8 년째가 되었을 때 요양원에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양가감정이 그 안에 살았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싶은 마음도.

지난 추석연휴에 나는 거의 10일 동안 엄마의 매일을, 매 시간을, 몸을, 식사를 전담했다. 엄마를 돌봐주는 고모가 휴가를 갔기 때문이다. 고모의 휴가가 내게는 고역이었다. 잠을 못자서 괴로웠고 몸은 지쳤다. 밤에는 엄마가 화장실을 가지 않기를 바랐다. 참 고약한 딸이다. 추석연휴에 작은집 사촌 동생이 다녀갔다. 집에 모시고 있던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냈다고 했다. 요양원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아버지를 면회하고 우리 집에 들른 것이었다. 작은아버지는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계시다며 요양원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추석휴가가 끝나고 돌아온 고모는 부쩍 요양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요양원에서 6개월 동안 일해 본 경험으로 고모는 요양원이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고모는 기회가 있으면 엄마에게도 요양원 이야기를 한다. 나는 마땅치 않지만 뭐라 말도 못하고 있다. 엄마는 요양원에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엄마라면. 그런데 나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지. 이렇게 묶인 삶을 내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나는 어머니를 다른 사람들이 돌봐주기를 원했다. 집안일과 잡무를 다른 사람들이 해주기를 바랐다. 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일이 내게는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끊임없는 걱정이 공기 속에 존재하고 불길한 예감이 일상의 구성요소가 된다. 도망가고 싶다. 요즘 나의 소원은 혼자 사는 것이다!

 

                                             

 

미국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이 여자들을 돌본다는 점에서. 그런데 미국에서 그 일을 하는 건 대부분 유생인종의 여성이고, 그들은 백인 환자들의 휠체어를 밀고 그들을 돌본다. 10년간 틸먼의 어머니를 돌본 간병인은 인도에서 온 여성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유색인종 여자를 고용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적이다. 틸먼은 말한다. “내가 정신이 맑을 때, 응급 상황이 아닐 때, 그것은 좀처럼 떨쳐내기 힘든 윤리적 문제였다.... 나는 이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내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역사에 저항하는 방법임을 알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면, 그렇게 내 삶을 바꿨다면 특권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냥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면 나는 24층에 있는 어머니 아파트의 여러 창문 중 하나에서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돌봄에 대해 ‘좋은 딸 역할 연기’였다고, ‘진심이 담겨있지 않고 대신 양심은 담겨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어떤가?

 

몇 개월 동안의 발작으로 어머니의 기력과 체력이 약해지고 뭔가를 하려는 의욕도 떨어졌을 때 틸먼은 어머니가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이를 “호기심 어린, 무심한, 안도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지켜보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해왔던 뜨개도, 그림그리기도, 외출도, 운동도 하지 않았고 “겨우 존재만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엄마도 이런 상태이긴 하다. 그렇게 즐겨하는 화초 가꾸기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TV도 보지 않는다.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정말 “겨우 존재만” 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아직은 엄마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댓글 6
  • 2023-11-07 13:07

    쌤, 말씀드리기 굉장히 조심스럽긴 하지만...그리고 이미 알아보셨을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보바스 전문상담 받아보셨나요? 제가 예전에 혹시나 하고 부모님땜에 알아본바로는 노인병원은 보바스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집도 가까워서 매일 가볼 수 있고, 부모님들도 의외로 전문가들과 계시는 걸 훨씬 편안해하신다고 하더라구요.

    • 2023-11-12 11:54

      샘 고맙습니다 ~
      필요하면 알아볼께요 ^^

  • 2023-11-09 08:36

    마음이 무겁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디언샘 고맙습니다!

  • 2023-11-09 18:48

    무리가 간 허리는 괜찮으세요??
    인디언샘의 고뇌가 느껴져서 무겁게 읽히네요..

    • 2023-11-12 11:54

      네 괜찮아요 ㅎ

  • 2023-11-14 15:14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샘의 글을 읽으며 막연히 나도 그런 상황이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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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3.11.26 | 조회 23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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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조회 344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우현
2023.11.21 | 조회 22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조회 30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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