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변명하지 않는 글쓰기
고은
2023-11-06 11:36
312
변명하지 않는 글쓰기
: <망고와 수류탄>(기시 마사히코)를 읽고
잘 이해하고 잘 전달하기
인터뷰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상대의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전달하기’란 것은 무엇일까? 내게 그것은 때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었고, 또 때론 독자가 동감할 포인트를 짚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살 수 있을까> 원고를 쓰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 글로 인해 인터뷰이들이 곤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인터뷰이들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소수자였고, 이미 자신에 대해 떠들어지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가능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야 그들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세계와 고립시키는 상대주의
기시 마사히코가 쓴 <망고와 수류탄>의 부제는 ‘생활사 이론’으로 오키나와 전후를 연구한 사회학자가 작성한 에세이이자 이론서이다. 저자는 책에서 ‘구축주의’라는 이론을 비판한다.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비판하는 구축주의는 사쿠라이 아츠시라는 사람의 이론이다. 사쿠라이 아츠시가 만들어낸 조사 방법론은 현재 일본에서 사회학 질적조사의 기준이라고 한다. 그는 구축주의 사회 이론을 흡수하여 일본 사회학 생활사 연구에 접목시킨 사람으로, 생활사 연구 자체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애초에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 소수자인 구술자를 이해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만일 사회적 소수자의 말을 번역하려고 든다면 그 과정에서 권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연구자들 역시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푸코 등을 이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그는 동일성으로 차이를 무시하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다.
인터뷰 중 상호작용으로 어떤 이야기가 구축될 뿐이고, 그 내용은 그저 ‘다원적이고 다성적인 이야기’로 이해되면 될 뿐이다. 대화 안에는 구술자들이 처한 ‘진짜’ 현실은 없다. 이야기를 사실관계로 환원하면 무엇인가를 손상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축주의 방법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조사자와 구술자 모두가 인터뷰의 진행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것이 일종의 상대주의라고 비판한다. 만일 이 방법론을 따른다면 조사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구술자의 이야기에서 인용부(“”)를 벗기는 것이 금지된다면, 그저 이야기에 인용부를 씌워둔 채로 여러 가지가 구술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조사자는 무엇이 구술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없게 된다. 소수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하에 이야기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모양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쿠라이는 (...) 일방적 해석이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낸다며 이를 폭력으로 정하고 금지했다. (...) 그 배경에는 구술자의 이야기를 사회나 세계로부터 단절시켜, 그것을 독립된 것으로 취급하는 ‘개념상대주의’ 사고방식이 있다. (...) 그에게 ‘스토리’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세계와 우리들 사이에 독립해서 존재하며, 세계와 우리들을 매개하는 스크린이나 안경과 같은 것이다. (88-89)
가령 내 인터뷰집에 등장하는 이들이 낯선 이들과 어떻게든 함께 살려고 오랜 시간 노력해 왔지만, “타자와 함께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는 “아니요”라고 답했다면 나는 그 간극을 그저 보여주기만 해야 한다. 왜 함께 살아왔음에도 함께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것이 어떤 마음에 나온 말인지 좇아 밝히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비껴가며 그저 말을 전시하는 것이 이 방법론의 최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방법을 따르면 타자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된다고 주장하며, 이 이론에 입각해서 듣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이론의 창시자인 사쿠라이 아츠시 역시 이 이론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며 냉혹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인용부 씌우기와 이야기를 믿기
저자는 사쿠라이 아츠시의 방법론을 비판하며 도널드 데이빗슨이 어떻게 상대주의를 비판했는지 살펴본다. 정확하게는 내용(무슨 말을 했는가)과 형식(어떻게 말했는가)의 이분법을 비판하며 무화시키고자 한다. 조사자와 발화자 사이에 발생하는 ‘번역의 실패’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번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 언어는 인간의 작용으로부터 독립한 개체, 그래서 필연적으로 왜곡하는 개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활동이 있고, 이것이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번역 불가능한 것은 없다.
자세하게 다시 말하자면 데이빗슨에게 언어라는 것이 어떤 활동, 즉 경험이나 실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독립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만약 듣기를 통해 조사자들이 무언가를 조직화한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경험 그 자체이다. 따라서 데이빗슨은 (여러 논리 논증을 통해) 경험에 들어맞는 문장은 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참으로 판명되었다는 것 자체는 이미 번역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참을 판정하는 과정에 번역이라는 행위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이빗슨에 따르면 상대주의의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논지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때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이해 불가능한 발화를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즉 어긋남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 장소에서 즉각 자신의 해석을 수정할 수 있다. 그것을 참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신념이나 해석을 변경한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번역할 수 있게 된다. 즉 인용부를 벗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해석할 수 있다는 논리적인 도식은 누군가가 될 수 있다거나, 누군가에게 다가간다거나, 누군가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해야 한다. 내가 경험하기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관계를 믿을 수 있는 만큼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어떤 때엔 당사자도 미처 몰랐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은 질문을 하는 조사자만도 아니고, 대답을 하는 구술자만도 아니다. 이들은 어떤 시공간에서 그 시공간을 주무르며 무언가를 만들어 간다. 관계가 형성되면 구술자는 물론이고 조사자도 그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조사자는 그곳에서 쉬이 헤어 나올 수 없어서,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일이 만들어진다.
구술의 현장을 발화의 현장만이 아니라 그 앞뒤로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장기간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구술 청취가 구술자와 조사자가 공동으로 인용부를 벗겨 나가는 작업이라는 게 명확해진다. 우리들은 어떤 하나의 혹은 복수의 규범적 관계성 안에 긴 시간에 걸쳐 끌려들어 간다. 이 관계성 안에서는 서로의 발화에 인용부를 달아 둔 채로 놓아둘 수 없다.(60)
구술자와 같은 신념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더라도 관계성 안에서는 상대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정녕 참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번역 가능해진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믿는 것이다. 타자를 이해하고 싶다면 좋고 싫음을 떠나 상대가 옳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여기엔 상대와 나의 신념이 근원적으로 다른지, 같은지를 판단할 자리가 사라진다.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때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라도, 그 이야기를 번역하여 자신의 삶 위 어디엔가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이해하고 잘 전달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나 그 문장 자체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관계 안에서 생성되는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서 믿는 것, 그것이 참이라고 믿음으로써 그 이야기를 번역해 내는 것, 그럼으로써 이 세계 위로 그 이야기를 가져와 인용부를 풀어 해치는 것일 테다.
* 읽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폴 벤느 지음)가 떠오른다. 어린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줬다고 굳게 믿고 즐거워한다. 어쩌면 조사자는 산타할아버지를 믿는 어린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조사자는 오류가 하나도 없는 이야기를 사실로 만드는 근대 과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우선 믿고 보았던 고대 역사가에 더 가까운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내가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것과 만날 지점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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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하면 늘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예전에 <네 멋대로 해라>에서 고복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을 믿는 다는 건, 거짓인 걸 알면서도 믿는 거라고. 종종 공부가 믿음의 문제로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그 믿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입니다. 이게 분명 종교적 믿음과는 다를텐데 말이죠. 그래서 믿음을 회복하는 게 공부의 과정인가, 싶기도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