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에게 장례를! (아젠다 2호 / 20200719)
문탁
2020-07-20 20:09
161
소위 ‘조국 사태’ 때였다. 딸의 대학 입학문제가 불거졌고 한쪽에서는 마녀사냥이라고 다른 쪽에서는 ‘내로남불’이라고 난리가 났다. 그때는 일부 대학교에서 반(反)조국 촛불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최순실과 정유라에게 분노한 것과 비슷한 것일까? 주변의 청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지방대에 다니는 조카는 “저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그 이야기 거의 안 해요.” 직장생활을 하는 20대 딸에게 물었다. 그 반응도 의외였다. “우리는 예능 나부랭이나 만드는 사람들이야. 조국 이야기 같은 건 한 마디도 안 해.” 길드다 청년들은? 다섯 명 중 두 명은 대화 내내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그러니 할 이야기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의연 사태’ 때도 비슷했다. 이번엔 후원금 문제가 불거졌는데 싱글이고 대학교수인 여동생은 ‘배신감’을 호소하고 당장 시민단체에 대한 모든 후원을 끊겠다고 펄펄 뛰었다. 반면 대안학교 학부모인 남동생은 ‘가짜뉴스’에 분노하며 정의연 30년 활동은 어떤 경우에도 폄하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된 페이스북에서는 이런 양극단의 주장이 거의 분, 초 단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서슬 퍼렇게 ‘페삭’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도 청년들의 의견이 궁금했던 나는 스무 살 언저리 청년들과의 모임에서 “너넨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이번에도 대부분은 묵묵부답. 역시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이번 ‘박원순 사태’ 때 주변 청년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직관적으로 분노했다. 누군가는 이런 사회에서 절대 아이 같은 건 낳을 수 없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장례식에 내 지방세를 쓰지 말라”고 했다. 길드다 청년들은 자기 SNS에 ‘조문하지 않겠다’는 글을 공유하거나 피해자가 직접 쓴 글을 게시했다.
우리 세대는 좀 불편하다. ‘이념적이고’ ‘논리적이고’ ‘길게 말하고’ ‘인용을 즐기고’ ‘근거를 갖고 이야기하는’ 우리 세대는 그들의 즉자적이고 내지르는듯한 어법에 익숙하지 않다. 하여 내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 박원순에 동정적이든 박원순을 개탄하든 – 자식들과 한바탕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청년, 걔들은 너무 ‘싸가지’가 없다!
갑자기 오래 전인 1979년 10월 26일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 학교를 가는 길에 “박정희 대통령 사망”의 신문 호외를 본 나는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와서 ‘달뜬’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박정희가 죽었대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난생처음 따귀를 맞았다. 금지옥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너무 ‘싸가지’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은 더 내달린다. 우리 부모세대들은 한국전쟁에서 생존했고, 산업화를 이루었고, 대한민국을 보릿고개에서 구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뼈와 살을 국가에 갈아 넣었다. 박정희의 과(過)가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에 박정희의 공(功)까지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가 부정당하는 것은 박정희와 함께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자신들 각자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 산업화 세대를 지금 우리는 ‘태극기 부대’라고 부른다.
아, 근데 뭔가 비슷한 일이 지금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세대는 독재와의 투쟁에서 생존했고, 민주화를 이루었고, 대한민국을 권위주의에서 구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사회를 위해 바쳤다. 우리도 무수한 실수를 저질렀겠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 세대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만들어온 역사를, 우리의 그 곡진한 삶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너희 청년들은 ‘싸가지’가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한다. 20년 후 우린 혹시 태극기 대신 인터내셔널기(旗)(범PD진영) 혹은 한반도기(범NL진영)를 광화문에서 흔들면서 “우리가 어떻게 만든 남북평화인데, 우리가 어떻게 만든 민주사회인데...” 라면서 행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이건 최악의 시나리오. 절대 꾸고 싶지 않은 악몽!!
그러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간명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청년/여성들 앞에서 더 이상 우리 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떠드는 짓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세대는 이미 서로 편들고 감싸고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김어준 모친 상가에 놓여있는 수많은 국회의원들의 근조기가 그걸 웅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피해자의 삶도 중요하다 (ooo lives matter)”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여성/청년들 앞에서 정말이지 "박원순 같은 사람은 당장 100조 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다”(김동춘)같은 헛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디테일한 맥락은 다를지라도) 우린 비슷한 잘못을 너무 많이 되풀이하고 있다.
언젠가 조한혜정 선생이 근대학교는 이미 뇌사상태에 빠졌는데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하고 장례를 치루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오래 되어서 정확한 단어나 문장은 생각나지 않는다.) 깊이 공감했었다. 그 말을 빌려 말하면 우리는, 소위 386은 이미 뇌사상태에 빠졌는데 아무도 사망선고를 안하고 공식적으로 장례를 치루지 못해 이런 사회적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 ‘쪽’을 수습할 수 있을 때 우리 스스로 우리의 몰락을 선언하고 청년들에게 우리 장례를 지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기꺼이 퇴장하고 빠르게 몰락하고 미련 없이 인사하자. 굿바이 386! 다시는 응답하지 말기를! 다시는 소생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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