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진달래
2021.07.23 | 조회 54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에세이 개요에 대해 조원들끼리 서로 코멘트를 해주는 자리에서 지원이는 백신에 대해 써보라며 자기 관심사를 내게 토스했다. 난 흔쾌히 그 주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내 속에 여러 입장이 혼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백신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고 그런 와중에 ‘약사’라는 내 직업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더는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과학적으로도 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스트라제네카에도 화이자에도 문의를 했는데 상당히 모호한 답변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문의 과정에서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의문에 이어 이 사태가 단지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문제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범세계적 백신 정책은 전체주의마냥 한결같고 백신의 개발과 도입과정도 이례적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절차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통해서 이 상황을 포스트휴먼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 한다.       유전자 백신이 연 세상   사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작년에 팬데믹이 시작되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본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조류독감의 유행을 염려하고 있었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가능성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약사연수교육을 받던 중에 WHO 보고서와 질병 X(1)에...
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에세이 개요에 대해 조원들끼리 서로 코멘트를 해주는 자리에서 지원이는 백신에 대해 써보라며 자기 관심사를 내게 토스했다. 난 흔쾌히 그 주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내 속에 여러 입장이 혼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백신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고 그런 와중에 ‘약사’라는 내 직업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더는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과학적으로도 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스트라제네카에도 화이자에도 문의를 했는데 상당히 모호한 답변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문의 과정에서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의문에 이어 이 사태가 단지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문제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범세계적 백신 정책은 전체주의마냥 한결같고 백신의 개발과 도입과정도 이례적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절차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통해서 이 상황을 포스트휴먼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 한다.       유전자 백신이 연 세상   사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작년에 팬데믹이 시작되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본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조류독감의 유행을 염려하고 있었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가능성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약사연수교육을 받던 중에 WHO 보고서와 질병 X(1)에...
둥글레
2021.07.21 | 조회 36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차명식       몇 번째 시간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문탁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양상을 말씀하시면서 그중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그 많던 메갈은 어디로 갔을까’를 꼽으셨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기점으로 여겨지던 메갈리아 웹사이트가 동력을 상실한 지금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의 변환은 급작스러운 발상이라기보다는 이번 양생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대문자 남성’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하여 여성 주체를 재구성하여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며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버틀러는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여성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상으로서의 여성을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면서 남성에 대하여 말할 때는 대개 단일한 주체이자 동일자로서만 호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근대적 인간주체가 백인-성인-남성의 형상을 가졌으며 수 세기 동안 남성적 주체가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면서 동일자의 법을 집행해 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 특히 젊은 세대에서 젠더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가져와 적용하려 할 때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차명식       몇 번째 시간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문탁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양상을 말씀하시면서 그중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그 많던 메갈은 어디로 갔을까’를 꼽으셨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기점으로 여겨지던 메갈리아 웹사이트가 동력을 상실한 지금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의 변환은 급작스러운 발상이라기보다는 이번 양생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대문자 남성’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하여 여성 주체를 재구성하여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며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버틀러는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여성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상으로서의 여성을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면서 남성에 대하여 말할 때는 대개 단일한 주체이자 동일자로서만 호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근대적 인간주체가 백인-성인-남성의 형상을 가졌으며 수 세기 동안 남성적 주체가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면서 동일자의 법을 집행해 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 특히 젊은 세대에서 젠더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가져와 적용하려 할 때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명식
2021.07.13 | 조회 340
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조금이라도 일어나서 돌아다녀야 한다     문탁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공부는 엉덩이의 힘으로 한다”이다. 그만큼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공부에는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가 좋아야 공부를 잘한다는 말이 아니어서 좋았다. 누구나 엉덩이의 힘만 있다면 공부를 해나갈 수 있는 거구나! 희망이 생기는 말이었다. 실제 루쉰을 공부할 때는 루쉰에 푹 빠져서 고3 때보다 오래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엉덩이 힘이 진짜 발휘될 때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동영상(영화나 드라마 등)을 시청할 때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며 30대 초에 TV를 없앴지만 외국어 공부를 핑계로 일드, 미드를 보느라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지금은 OTT 스트리밍 서비스를 보기 위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침대로 향한다. 이젠 엉덩이의 힘도 필요 없는 시절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누워서 보거나 비스듬히 앉아서 보거나.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의자 위에서나 침대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 컨디션이 급속히 저하되곤 한다. 공부도 몰아서 하고 나면 몸이 안 좋아진다. 처음엔 이런 습관이 안 좋은 이유는 단지 밤 시간에 잠을 푹 못 자서라 생각했다. 그러다 ‘인문의역학 세미나’에서 읽은 빌 브라이슨의 『바디, 우리 몸 안내서』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여러 래퍼런스를 종합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놀랍게도,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나머지 시간에 운동을 얼마나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조금이라도 일어나서 돌아다녀야 한다     문탁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공부는 엉덩이의 힘으로 한다”이다. 그만큼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공부에는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가 좋아야 공부를 잘한다는 말이 아니어서 좋았다. 누구나 엉덩이의 힘만 있다면 공부를 해나갈 수 있는 거구나! 희망이 생기는 말이었다. 실제 루쉰을 공부할 때는 루쉰에 푹 빠져서 고3 때보다 오래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엉덩이 힘이 진짜 발휘될 때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동영상(영화나 드라마 등)을 시청할 때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며 30대 초에 TV를 없앴지만 외국어 공부를 핑계로 일드, 미드를 보느라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지금은 OTT 스트리밍 서비스를 보기 위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침대로 향한다. 이젠 엉덩이의 힘도 필요 없는 시절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누워서 보거나 비스듬히 앉아서 보거나.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의자 위에서나 침대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 컨디션이 급속히 저하되곤 한다. 공부도 몰아서 하고 나면 몸이 안 좋아진다. 처음엔 이런 습관이 안 좋은 이유는 단지 밤 시간에 잠을 푹 못 자서라 생각했다. 그러다 ‘인문의역학 세미나’에서 읽은 빌 브라이슨의 『바디, 우리 몸 안내서』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여러 래퍼런스를 종합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놀랍게도,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나머지 시간에 운동을 얼마나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둥글레
2021.07.13 | 조회 36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와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와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musa
2021.07.12 | 조회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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