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3회] 택천쾌, 지금은 결단할 때

봄날
2024-01-08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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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겨누었고 화살은 활을 떠났다. 활을 제대로 겨누었다면 쏜 화살은 목표를 맞추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사 결정으로 나는, 우리 회사는 어떤 목표를 이루게 될까?

 

무엇을 결단하는가

쾌괘에서 결단하는 것은 무엇일까?

쾌괘의 괘상을 보면 무엇을 결단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쾌괘는 아래로부터 다섯 개가 모두 양효이고, 맨 위에 단 하나의 음효가 자리잡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하괘의 세 양효는 하늘(天)을 상징하는 물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양효 중에서도 기운이 센 양효이다. 숫적으로도 5대1이니 쾌괘는 양(陽)의 기운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주역 괘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방법이다. 즉 맨 아래 효는 일의 시작, 태동으로 보며 이효, 삼효로 진행하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보면 쾌괘는 양의 기운이 생기고 자라서 대세적 양상을 보이고, 맨 위의 마지막 음효가 머지않아 사라질 상황으로 설정된 것이다. 마지막 남은 음효 하나마저 사라지면 세상은 순수한 양의 세상, 즉 중천건(重天乾)괘의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쾌괘에서 말하는 결단은 다가오는 양의 시대에 하나 남은 음을 처단하는 것이다. 정이천은 쾌괘의 결단은 군자의 도(道)가 성해져서 소인의 도가 처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가오는 양의 시대는 그러므로 군자의 시대이다. 군자시대의 도래는 대세(大勢)이고, 이것을 막거나 거스를 수는 없다. 우리 회사에 도래할 양의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내가 이사를 결정한 배경을 따져봐야겠다. 앞에서 말한 부채를 갚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회사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으니, 이는 양을 지향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햇볕이 들지않아 어둡고 추운 사무실 환경을 바꿈으로써,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의 질을 좋게 할 필요도 있었다. 사무실의 직원들은 모두 3,40대 청년들이므로 이들이 떠오르는 양들 자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양의 세상의 도래를 위해 화살을 쏘는 것,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은 대세에 부응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결단하는가이다.

 

어떻게 결단하는가

 

夬 揚于王庭 孚號有厲 告自邑 不利卽戎 利有攸往

쾌는 왕의 뜰에서 드날리는 것이니 미덥게 호소하되 위태롭게 여긴다. 읍으로부터 고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롭지 않으며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택천쾌괘의 괘사는 결단의 신중함을 몇 가지 요점으로 정리해준다. 첫째, 결단은 공적으로 해야 한다. 괘사에서 ‘왕의 뜰’은 공적인 것을 가리킨다. 쾌괘의 분위기는 이미 양으로 기울어졌다. 허나 아무리 대세가 기울었다 해도 내맘대로, 임의로 처리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결단의 전과정은 ‘깃발을 휘날리듯이’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공정하게 치르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결단의 주체는 반드시 군자여야 한다. 이때 ‘읍으로부터 고한다’는 괘사의 뜻을 새기는 것이 좋다. 이 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에게 내밀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외부로 확대해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결단의 주체는 (군자처럼)스스로 높은 덕성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다.

 

또한 쾌괘의 괘사는 결단의 주체인 구오, 혹은 군자에게 조심해야 할 두 가지를 더 주문한다. 그것은 ‘지나침’, 즉 ‘과도함’과 ‘방심’이다. 괘사에서 말한 ‘군대를 쓰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것은 ‘벼룩 한 마리를 죽이는데 도끼를 집어드는 것’처럼, 처단의 과정이 과도하게 폭압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기울어진 귀퉁이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음을 처단하는 것이 말 한 마디로도 가능한 상황에서, 지나친 무력의 남용은, 처단의 당위성이 설 곳을 잃게 만든다. 또 ‘미덥게 호소하되 위태롭게 여긴다’라는 괘사 부분은 ‘방심’을 경계하는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운동경기에서 승패가 이미 많이 기울어져 패색이 짙었던 선수가 ‘막판 뒤집기’로 의외의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적지 않게 본다. 또 산에 화재가 났을 때, 완전히 진화한 줄 알았는데 작은 불씨 하나가 다시 살아나 온 산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모두 방심하여 완전히 결단하지 못한 결과 생긴 일이다.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택천쾌에서는 아래에 있는 다섯 개의 양효가 모두 결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제대로 결단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다섯 양이 모두 양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결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동일한 존재는 아니므로 결단의 내용과 방식에서 각각의 양효가 처한 상황이나 능력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거나 그렇지 못하다. 가령 쾌괘의 시작 지점에 있는 초구는 자신의 대세를 이끌 수 있을만큼 성숙되지 못한 깜냥인데, 조급하게 처단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인다.(초구의 효사는‘발꿈치가 강하니 , 가서 이기지 못하면 허물이 되리라’이다) 결단의 순간은 한번으로 끝나며 되돌이킬 수 없다. 충분히 겨누기 전에 활시위를 당기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한편 구사는 초구보다는 분명 결단의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자신이 처한 상황이 결단을 어렵게 만드는 위치에 있다. 구사 바로 위에는 강하게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구오가 있고, 주변에 자신을 도와 함께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모든 결단을 고스란히 온자 힘으로 해내야 하는 중압감을 가진 존재이다. 이럴 때일수록 결단의 정당함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데, 오히려 자신만의 생각으로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이 되기 십상이다. ‘볼기에 살이 없어 행함을 머뭇거리니, 양을 끄는 것처럼 하면 뉘우침이 없겠으나, 말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는 구사의 효사는 종종 독단에 치우친 결정을 하는 인간의 모습에 경고를 전한다.

 

결국 구오만이 제대로 음을 처단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역은 말한다. 구오는 어떻게 결단할 수 있을까?

 

九五 莧陸夬夬 中行 无咎

구오는 현륙을 결단하고 결단하면 중(中)을 행함에 허물이 없으리라.

 

‘현륙’이라는 식물을 가지고 ‘군자의 결단함’을 상징한 것은, 결단이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하며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대변한다. 현륙은 오늘날 비름나물 같은 들풀의 일종이다.비름나물은 줄기에 물이 많아 통통하고 쉽게 부러지는 성질을 가진다. 주역에서 물은 음의 성질에 배속되므로 현륙은 곧 상육을 가리킨다. 손쉽게 부러지는 모습은, 약할대로 약해진 마지막 음을 양이 처단할 때의 손쉬움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런데 효사의 뒷부분에 ‘중도를 행한다’는 ‘중행(中行)’을 넣은 것에는 깊은 뜻이 있다. 구오가 비록 결단의 주체이고 군주이지만, 상육과 매우 가까운 자리인 만큼 결단의 과정이 구오에게 쉽지는 않다. 상육과 구오는 각각의 삶의 여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곁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던 존재이므로, 구오의 결단은 상육과 그간의 관계를 모두 끊어내는 일을 말한다. 결단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비름나물의 줄기를 ‘톡’ 부러뜨리듯 쉬운 일인데, 그 마음 먹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결단은 실패할지도 모른다. 주자는 거듭해서 구오가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지 경고한다. “구오가 쾌괘의 때에 결단하는 주체가 되었는데, 상육의 음과 매우 가까우니, 현륙과 같이 하여 만약 결단하고 결단하되 또 지나치게 포악하게 하지 않게 하여 중행에 합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나는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인가

주역은 같은 텍스트를 가지고도 많은 해석이 가능하며,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상반된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나는 쾌괘를 해석하는 내내,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단을 해야 하는 구오의 위치에 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대표라는 직함은 무언가를 결정하고, 무언가를 포기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져야 하니까. 마침 몇 달 전 새 직원이 들어오면서 회사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직원들끼리 고객사 응대라든지 회사 홈페이지 개편에 적극적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의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모습에서 택천쾌괘가 상정한 양의 시대, 청년중심 조직의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이사를 결정한 것도 이 움직임에 수반되는 ‘대세에 부응하는 결단’ 같은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나의 결단과정 중에 적지않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을 옮길 때는 무엇보다 구성원들과의 협의를 거쳐야 했다. 모든 일을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괘사 ‘왕의 뜰에서 휘날린다’의 의미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다. 공간을 다른 사람이 먼저 계약할까봐 서둘렀다는 변명의 이면에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직원들과 의견이 달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몇 번의 경험이 있었다. 그들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일을 건너뛰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괘사처럼 공명정대하지도 않았고, 구오처럼 중도를 걷지도 못했다. 오히려 구사처럼 나 혼자만의 생각에 치우쳐 독불장군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사 효사의 ‘말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는 구절이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미루고 남에게 떠넘기면서, 정작 결단의 순간에는 독단으로 움직였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택천쾌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거듭해서 독단의 결단을 반복하면서 구사처럼 행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래하는 청년들의 시대, 내가 구오로서 정말 처단해야 하는 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중도를 행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나날이다.

 

댓글 2
  • 2024-01-08 16:22

    결단이란 말은 굉장히 속도감있게 느껴지지만 쉬운 일이 아니군요. 봄날샘의 고민이 진솔하게 느껴집니다.

  • 2024-01-08 16:58

    봄날 이사장님의 결단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한문이예술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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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1.11 | 조회 263
봄날의 주역이야기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봄날
2024.01.08 | 조회 354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기린
2023.12.11 | 조회 387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진달래
2023.12.05 | 조회 298
한문이예술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동은
2023.11.30 | 조회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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