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인공지능은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 - 마크 코켈버그

가마솥
2023-11-2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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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가 열렸다

인공지능(AI)이 인류의 삶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우려가 현실화 된다. 러시아가 올해 초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적을 식별해 전투하는 AI 기반의 무인전투차량 ‘마르케르’(Marker)를 투입하며 AI의 판단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시대가 열렸다. 우려하였던 것처럼 AI 알고리즘의 활동반경이 챗GPT로 지식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이제 고도화된 AI는 자유와 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들과도 좋든 나쁘든 간에 상호작용을 시작했다. AI를 더는 기술과 편리의 영역으로만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AI를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은 어떤가.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고 결과는 인간의 의지에 좌우된다는 낙관론이 여전히 과학계를 지배한다. ‘AI 윤리’는 (인간의, 프로그래머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영향은 아직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AI를 상대하는 이런 인류의 안일함에 반기를 든다. 저명한 기술철학자인 저자는 “AI는 하나부터 열까지 정치적”이라고 지적한다. AI 알고리즘을 정치적 맥락에서 개념화하는 골든타임을 놓치면 인간이 AI에 권력을 뺏기고 종속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린다.

이 책은 프란츠 카프카가 100여 년 전 쓴 소설 『소송』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던 요제프 K를 소환하면서 시작한다. 그와 비슷하게 최근 미국의 평범한 흑인 남성이 고급 의류 매장에서 물건을 훔쳤단 혐의로 가족 앞에서 강압적으로 경찰에게 체포됐다 풀려난 사건을 환기시킨다. 안면인식 알고리즘 시스템의 결함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를 두고 형사는 “컴퓨터가 틀렸나 봅니다”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다. 여러 인구 집단 중 백인 남성의 얼굴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 알고리즘 편향성이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종차별을 비롯한 구조적 불평등을 악화시킨 사례이다. 저자는 인공지능은 알고리즘과 데이터는 중립적이라는 프로그래머들의 주장과 달리 여러 형태의 편향이 내재되었고 정치적이라고 잘라 말한다.

 

인공지능은 정치적이다.

이 책은 분량은 적은데(293쪽), 책의 마지막 참고문헌이 22쪽에 달할 정도로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등장한다(대략 400여명). 그 내용은 자유, 인종차별, 노예상태, 정의, 불평등, 민주주의, 권력, 기후변화, 동물권 등 오늘날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인공지능과 로봇에 제기되는 문제와 관련지어 다루면서 그 위험성과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종일관 ‘디스토피아적 서사’를 유지하는 저자는 AI 알고리즘과 빅데이터가 우리에게 주는 편리에 대해 비판적, 성찰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전개하는 저자의 초점은 인공지능에 대해서 윤리적 논의만으로 부족하며, 기술철학과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광범위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하고, 지금 바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와 기술을 함께 사고하는 이것이야말로 목숨이 달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사는 지역사회와 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행동하고 대응하라는 요청이다. 이제는 그렇게 할 때이며, 꼭 필요한 일이다. 만일 이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공지능 같은 기술이 이미 인간에게, 그리고 정치에 대하여 하고 있는 일로부터 비판적, 성찰적 거리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는 인공지능 및 인공 권력에 무력한 피해자가 될 것이다(p.291)".

1장은 자유라는 정치원리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고 자율성을 기만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침범한다. 인공지능이 소비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의미하는 자유주의적 ‘넛지(nudging)’가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조종하는 지 보여준다.

2장에서는 평등과 정의 측면에서 인공지능과 데이터 과학, 로봇의 정치적 영향력과 자동화 및 디지털화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공지능을 통한 불평등과 불공정 문제, 성차별, 인종차별 등 편향과 차별을 다룬다. 인터넷 상에서 majority가 생산한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하여 얻는 인공지능은 minority의 의사/지식을 반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3장에서는 인공지능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측면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우리를 조종하는 거대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은 주보프가 지적했듯이 민주적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미 우리가 구글, 아마존, 그리고 또 다른 거대 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누가 지배해야 하는지는 이론적인 질문일 뿐이다. 이 점에서 인공지능에는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인 것이 있다(p.159).”

4장에서는 규율과 감시, 지식, 권력관계에 관한 푸코 이론을 가져와, 인공지능과 관련지어 그 영향을 살펴본다. 인공지능이 유도하는 조작 등을 살펴보고 자본주의 맥락에서 사람들을 평가·분류·감시하는 데이터 과학을 재조명한다. AI는 죄수들을 감시하는 파놉티콘처럼 인간들의 활동과 생각을 조종할 수 있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고 규율하게 하는 인간을 보여 준다. CCTV에서 시작한 안면인식기술, 인터넷에서 봇(bot)을 만들어 여론몰이를 하는 사례 등을 든다.

5장에서는 AI세상에서 비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인간만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동물, 환경, 인공지능의 정치적 지위에 관해 논하고, 동물권과 환경이론, 인공지능과 로봇 윤리, 전통적 인간 중심의 정치적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인공적인 초지능자들이 인간을 대체할 거라고 주장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제기하는 주장들을 연관 지어 논한다. 저자의 이 부분에 대한 주장은 앞장들에 비해서 나에게는 다소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AI의 어떤 점이 이런 문제를 야기할까? - 블랙박스모델과 데이터 편향

AI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술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두어 가지 정도의 기술적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인공지능은 믿을 수 있는 기관의 감독하에 뚜렷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소위 기계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기계학습의 알고리즘을 경쟁적으로 찾아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훈련 데이터를 활용한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뿐 아니라 대량의 빅데이터(Big Data) 속에서 인간이 발견해 내지 못한 특성과 패턴을 찾아내는 비지도 학습(Unsupervised Learning)과 보상을 통해 스스로 패턴을 찾아내게 유도하는 강화학습(Reinforce Learning)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닉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는 기계’를 만들고 활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할 뿐, 작동 프로세스와 그것이 초래할 영향력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패턴을 찾아낸다. 생물학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해온 난제인 단백질 분자구조에 대해서도 인공지능은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결과가 어떠한 프로세스를 걸쳐서 도출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인공지능이 수억 개의 매개변수와 인공신경망(ANN)을 거쳐서 만들어낸 프로세스는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로세스가 철저히 베일에 쌓인 인공지능 모델을 블랙박스 모델(Blackbox Model)이라고 한다.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컴퓨팅 파워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한 요즘,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델은 대부분 이 블랙박스 모델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인공지능 모델 개발은 훈련과 검증 그리고 테스트라는 과정을 거친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인간의 개입없이 인공지능이 스스로 패턴과 유사성을 찾아내는 비지도학습 모델도 존재하지만, 지도학습과 강화학습에는 여전히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는 훈련 데이터의 레이블링(Labeling)과 선정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편향(Human Bias)이 인공지능에 반영될 위험이 여전히 존재함을 뜻한다. 예를들어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류인종(Majority) 에 대한 데이터가 소수인종(Minority)에 대한 데이터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편향은 고스란히 인공지능의 학습결과에 반영되어, 주류인종에 유리한 결과만을 도출하게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또 다른 인공지능 인종차별자(AI Racist)를 탄생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쩌라고......

저자는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예상되는 위험한 세상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 것의 근본은 현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이 축적한 폐해가 인공지능으로 일부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범위가 광범위하고 깊이가 깊을 뿐더러 신속히 전개되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기술/정치 철학적 접근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치유하는 것은 역부족일 듯하다. 다만, 이러한 접근으로 현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주위를 환기시키고 방향성을 잡기에는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의 우려를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는데, 이렇게 광범위한 철학적 접근을 가능케 하는 소개서를 접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

문탁에서 우리 집까지 가려면 30km 속도제한 CCTV가 4개, 속도 방지턱 32개에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한다. 그 중 14개는 가짜 방지턱으로 속아 주어야 한다.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이라도 볼라 치면 수시로 내가 좋아할만한 상품이 뜬다. 이제는 어떻게 알았지?하고 놀랍지도 않는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삶에 광범위하게 들어 와 있고,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기술철학과 정치철학의 접목과 같은 거대 담론은 내 역량 밖일 것인데, 어쩌란 말인가?

저자는 푸코의 ‘자아에 대한 기술‘을 꺼내어 기술철학과 접목한 한 가지 tip을 보여 준다.

 

“개인들이 자신만의 수단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몸과 영혼, 생각, 행위, 존재 방식에 일정 수로 작동하게 해서 영향을 미치게 허용하여 특정한 행복, 순수함, 지혜, 완벽함, 즉 불멸의 상태를 얻기 위해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푸코 1988)”

 

저자는 현대 기술철학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에서는 못하는 ‘성찰’의 능력을 정치철학적 관점에서의 인공지능의 극복방안으로 가져온다. 푸코의 주장으로부터, 자기를 돌보고 구성하면서 미덕을 갖게 하는 ‘글쓰기’를 인간 자아에 대한 물질적 기술로 제안한다. ‘공부’와 ‘글쓰기’.

이런 의미에서 이번 1234에서, “1박2일3달4번이 좀 적은 거 아닌가요?”라고 발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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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예술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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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1.11 | 조회 2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봄날
2024.01.08 | 조회 346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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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12.11 | 조회 386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진달래
2023.12.05 | 조회 292
한문이예술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동은
2023.11.30 | 조회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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