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2회]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 장 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청량리
2021-10-10 17:41
373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영화대로 42길, 2]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주도권도 완전히 미국 할리우드로 넘어가 버리게 된다. 이때 등장한 누벨바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넓게는 유럽영화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였다. 영화의 탄생지인 유럽이 불과 50년도 안 되서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 하기 바빠진 상황, 젊은 비평가들은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봉건 중세시대에 대한 반성으로 ‘르네상스’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재건과 부흥의 실마리를 찾고자했던 움직임처럼, 누벨바그 역시 1920년대 ‘러시아 몽타주이론’과 함께 영화 속 카메라 자체의 미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통해 영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찾으려 했다. ‘무엇을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는 과연 가능한가? 늘 그렇듯,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낳는다.

 

그들, 누벨바그는 영화에 대한 비평 활동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도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에 적합한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영화 두 번 보기, 영화로 글쓰기, (직접)영화 만들기. 국내 영화비평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인 정성일 평론가가 직접 찍은 영화 <카페 느와르>(2009)가 관객과의 만남에 성공했는지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그건 영화에 대한 정성일의 ‘사랑’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한 평가는 고다르의, 아니 어쩌면 누벨바그들의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러브레터인지도 모른다.

 고다르의 편지 내용을 보자면, 영화 속에서 공간과 시간을 조작하는 흥미로운 장면 둘이 있는데, 첫 번째는 아파트에서 미셸(장 폴 벨몽도)이 파트리샤와 함께 머무는 장면이다. 미셸의 머릿속에는 파트리샤(진 세버그)와의 잠자리만이 가득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만, 화면은 며칠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이리저리 편집되어 나눠진다. 두 번째는 자동차에서 미셸이 파트리샤를 태우고 파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이다. 왼편에서 미셸은 목소리만 들리고 화면은 파트리샤의 얼굴을 고정해서 잡는다. 역시 차 안의 대화는 계속되지만 파트리샤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거리는 끊임없이 ‘점핑’한다.

소리(대화)는 현재진행형인 시간 속에 있는데, 화면(공간)은 그와 상관없이 편집, 나열되다 보니 머릿속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건 멀미가 일어나는 상황과 유사하다. 눈(화면)으로 인식하는 화면과 귀(공간감, 균형)가 느끼는 진동이나 움직임이 서로 다르게 뇌로 전달될 때 멀미가 발생한다. 앞의 두 장면은 일부러 시공간의 감각을 깨뜨려 관객의 편안한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중 총 맞은 미셸이 비틀거리는 장면

 

 

허나 이 영화에서 앞서 소개한 점프컷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에 총을 맞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어가는 미셸의 뒷모습이다. 피를 흘리며 이리저리 넘어질 듯한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가 함께 흔들리며 따라간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장 폴 벨몽도의 ‘등’연기는 일품이다. 게다가 넘어질 듯 위태로운 두 다리는 관객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그러나 몇몇의 눈부신 장면을 제외하면, 자동차와 여자에 집착하고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미셸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날, 침대 위에서 파트리샤가 윌리엄 포크너의 글 <야생종려나무, The Wild Palms>을 인용하면서 미셸에게 묻는다. 당신은 슬픔(grief)과 무(無, nothing)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 슬픔은 어리석은 것이며, 이것저것 복잡하다면서 미셸은 무(無)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고다르에게 미셸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선택한 ‘nothing’은 바로 고다르의 선택이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대모이자 고다르의 친구인 80대의 아녜스 바르다가 30대의 젊은 아티스트 JR과 함께 만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에서 그녀가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후반부 장면이 있다. JR과 함께 고다르의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바르다는 고다르를 회상한다. “그는 고독한 철학자야. 그는 영화를 창조하고 영화계를 바꿔놨지. 창조자이자 탐구자야. 영화계엔 그런 사람이 필요해. 지금도 좋아하지만 서로 못 봐.”

약속한 시간에 고다르의 집에 도착했으나 문은 잠겨있었다. 대신 바르다에게 보내는 암호만이 유리문에 적혀 있다. ‘카페 두아르네네즈에서. 그리고 <해변에서>’ 해석하면 이렇다. ‘바르다, 당신이 온 걸 알고 있어. 그리고 우린 아직 자크 드미를 기억하고 있지’ 먼저 세상을 떠난 자크 드미는 바르다의 남편이자 고다르의 친구였다. 노년의 친구가 어렵게 기차를 타고 찾아왔으나 고독한 그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새로운 영화이론의 정립과 함께 기존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하며 스스로 영화가 되어야했던 장 뤽 고다르.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 역시 자신만을 위한, 한 편의 영화로 만들고 있는 듯했다. 제작, 각본, 감독, 그리고 관객 고다르. 허나 다르게 말하면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영화적 집착이었을까?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 아녜스 바르다와 JR

 

 

미셸은 차를 훔치고 운전하고 도망 다니며 돈을 훔치거나 받으러 돌아다닐 때도 늘 혼자였다. 경찰이 쏜 총을 맞고 비틀거리다 거리에 쓰러져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눈을 감기듯 철저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관계의 부재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고독에 가까웠다. 미셸의 죽음은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이 그 표면적 원인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다르가 미셸의 고독한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부패한 기성세대, 알제리 독립전쟁이 드러낸 프랑스 사회의 추악한 이면들, 과거의 고전적 답습으로만 이어지는 영화계와의 결별선언이자 사회적 원인고발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인터뷰 장면에서 파트리샤가 어느 작가에게 인생의 목표를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불사조가 된 다음에 죽는 겁니다.” 불생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만 생(生)·사(死)를 반복하는 고다르의 고독한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망설’ 루머를 뚫고 2018년 영화 <이미지의 책>으로 칸 영화제에서 깜짝 등장한 장 뤽 고다르. 스마트폰의 인터뷰 영상화면으로나마 그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글 : 청량리)

 

 

댓글 6
  • 2021-10-11 07:42

    1928년생인 아네스 바르다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났고

    1933년생인 장 폴 벨몽드는 지난 달에 세상을 떠났지요.

    그의 부고를 신문에서 접하면서 저도 <네 멋대로 해라>와 누벨바그와 아네스 바르다와  고다르를 떠올렸어요.

    그리고 나의 노년이 어떻게 될까, 도 생각해봤죠..ㅋㅋㅋ

     

    아주 잘 읽었습니다^^

  • 2021-10-11 08:04

    어렵지만, 이제 막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

  • 2021-10-11 08:40

    영화대로 42길 로고 이미지 멋집니다!

    바르다의 영화에서 고다르가 하는 짓을 보면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참 괴퍅하고 기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그게 그의 삶이고 생각이고 스타일이었군요.

    바르다도 섭섭해하지 않고 충분히 이해했을 것 같네요.ㅎ

  • 2021-10-11 10:07

    얼마 전에 고다르를 만나지 못해 울음을 터트리는 바르다의 모습을 보며 저런 노년을 맞고 싶다는 소화를 남긴 젊은 여성의 글을 읽었다. 그때 저런 노년이란 감정이 살아있는 노년일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고다르보다 바르다가 더 생각나네. 이상하다. 왜 그럴까?

  • 2021-10-11 19:55

    저는 아직 이 영화를 선뜻 보지 못했는데,

    굉장히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관계의 부재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고독에 가까웠다.-

    미셸의 이야기지만 고다르를 설명하는 것 같은 이 부분이 유독  마음에 남습니다.

     

  • 2021-10-19 00:02

    젊은 친구와 전혀 이질감없이 친한 바르다, 먼 길 온 친구를 바람맞추는 고다르!

    두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20
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타고난 기혈이 약해요. 허약체질이에요. 비위가 약해서 잘 못 먹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쓸 수가 없죠. 게다가 내성적이고 치밀해서 스트레스에 약하군요." 얼마 전 동네 한의원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피곤이 쌓이고 기력이 바닥을 쳐 거의 좀비처럼 며칠을 지낸 후 죽지 않으려면 산에라도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맘을 바꿔 아무 데나 가장 가까운 한의원으로 간 날이었다. 그날 난 부황, 뜸, 침, 3종 세트의 치료를 받고 겨우 회생했다.   타고난 기혈이 약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도 오랫동안 꽤 많은 일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아니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그다음에 번아웃되는 식의 삶은 나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기운을 정미롭게 쓰는 방식을 터득해왔다. 인간관계는 단순하고 쇼핑, 관광 같은 번다한 일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지인의 생일 등 기념일을 챙기는 이벤트 따위는 거의 안 한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바로바로 잊어버리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불필요한 동선을 만들지 않는 것, 감정의 잉여를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저질 체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양껏 하면서 살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올해 ‘삑사리’가 났다. 부실하나마 수십 년간 잘 지탱해온 삼발이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느낌이다. 자주 열이 났고 두통이 왔으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졌고, 잇몸은 ‘맛이 갔다’. 별 것 아닌...
"타고난 기혈이 약해요. 허약체질이에요. 비위가 약해서 잘 못 먹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쓸 수가 없죠. 게다가 내성적이고 치밀해서 스트레스에 약하군요." 얼마 전 동네 한의원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피곤이 쌓이고 기력이 바닥을 쳐 거의 좀비처럼 며칠을 지낸 후 죽지 않으려면 산에라도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맘을 바꿔 아무 데나 가장 가까운 한의원으로 간 날이었다. 그날 난 부황, 뜸, 침, 3종 세트의 치료를 받고 겨우 회생했다.   타고난 기혈이 약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도 오랫동안 꽤 많은 일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아니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그다음에 번아웃되는 식의 삶은 나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기운을 정미롭게 쓰는 방식을 터득해왔다. 인간관계는 단순하고 쇼핑, 관광 같은 번다한 일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지인의 생일 등 기념일을 챙기는 이벤트 따위는 거의 안 한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바로바로 잊어버리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불필요한 동선을 만들지 않는 것, 감정의 잉여를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저질 체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양껏 하면서 살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올해 ‘삑사리’가 났다. 부실하나마 수십 년간 잘 지탱해온 삼발이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느낌이다. 자주 열이 났고 두통이 왔으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졌고, 잇몸은 ‘맛이 갔다’. 별 것 아닌...
문탁
2021.10.12 | 조회 41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영화대로 42길, 2]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영화대로 42길, 2]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청량리
2021.10.10 | 조회 373
지난 연재 읽기 지원의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정크스페이스, 뒤편으로 쫓겨난 흐름들     공기순환의 N차방정식   내가 열 평 남짓 되는 작은 식당의 인테리어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공기의 순환’이다. 작은 가게인 만큼 요리를 위해 불을 쓰면 가게 내부가 금세 후끈 달아오르고, 물만 끓여도 습도가 몇 분 만에 60%를 상회한다. 음식을 하면서 발생하는 냄새와 연기도 큰 문제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주방에서 발생하는 열과 습기, 냄새와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팬fan을 단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 공간은 매우 ‘골 때리는’ n차방정식에 돌입하게 된다.   작은 가게의 미닫이 혹은 여닫이문을 열기가 어려웠던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열과 습도를 가게 내부에서 외부로 방출하는 팬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가져가지 않고, 가게 내부의 공기를 밖으로 가져간다. 내부의 공기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외부의 공기가 내부로 들어와 줘야만 한다. 누구도 가게 내부가 진공상태가 되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만약 조그만 가게에 출입문을 제외하고 별도의 창이 없다면, 밖으로 나가는 공기만큼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출입문을 밀며 들어온다. 다시 말해 팬을 틀면, 마치 여닫이문을 누가 당기고 있는 것처럼 가게 내부 방향으로 빨려 들어오는 상태를 유지하며 공기가 유입된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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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2021.10.07 | 조회 610
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그때의 내 심정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였을까? 한동안 페이스북에 심란한 문장들을 올렸다. “오르막길 내리막길마다 생각이 바뀌고 지금 나는 뭔가를 비우는 중인가 채우는 중인가?”, “눈물이 났다. 이 슬픔은 뭔가? 생각해보니 아쉬움이다. 이제 뭔가 좀 해볼만하다는 감이 왔는데,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게 아쉽다.” 이런 글이 올라간 다음엔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청계산을 오르내리며 내가 너무 ‘인간적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을 땐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했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이 미끄러워서 짜증이 났고, 내 인생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라는 자학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수월히 내리막길을 내려올 땐 인생의 내리막길은 참 빠르구나! 하는 허무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울창한 나무와 푸르른 잎사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내 마음은 홀로 재난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감정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 마음을 내심 모르는 척하려고도 했다.   국사봉에서 이수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었을 때 쏴아악 쏴아악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쏴아악 쏴아악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바람소리가 너무 좋아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기우뚱 휘청이며 내는 바람소리는 죽비소리처럼 시원하게 들려왔다. ‘별거 아냐’,...
  그때의 내 심정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였을까? 한동안 페이스북에 심란한 문장들을 올렸다. “오르막길 내리막길마다 생각이 바뀌고 지금 나는 뭔가를 비우는 중인가 채우는 중인가?”, “눈물이 났다. 이 슬픔은 뭔가? 생각해보니 아쉬움이다. 이제 뭔가 좀 해볼만하다는 감이 왔는데,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게 아쉽다.” 이런 글이 올라간 다음엔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청계산을 오르내리며 내가 너무 ‘인간적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을 땐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했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이 미끄러워서 짜증이 났고, 내 인생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라는 자학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수월히 내리막길을 내려올 땐 인생의 내리막길은 참 빠르구나! 하는 허무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울창한 나무와 푸르른 잎사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내 마음은 홀로 재난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감정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 마음을 내심 모르는 척하려고도 했다.   국사봉에서 이수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었을 때 쏴아악 쏴아악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쏴아악 쏴아악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바람소리가 너무 좋아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기우뚱 휘청이며 내는 바람소리는 죽비소리처럼 시원하게 들려왔다. ‘별거 아냐’,...
겸목
2021.09.27 | 조회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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