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2회] 양생의 방법, 호시탐탐(虎視眈眈)

봄날
2021-09-27 02:33
688

** 주역공부 4년차. 여전히 해석도 어렵고 뜻을 알아내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나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추동하는 주역은 매력적인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 감동을 함께 나누려 용기내어 글을 쓴다. 봄날이 픽(pick)한 주역의 말들!

 

, 貞吉 觀頤 自求口實(이 정길 관이 자구구실)

이(頤)는 곧게 하면 길하니, 길러주며 스스로 음식[口實]을 구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初九 舍爾靈龜 觀我朶頤 凶(초구 사이영귀 관아타이 흉)

초구는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서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

六二 顚頤 拂經 于丘頤 征 凶(육이 전이 불경 우구이 정 흉)

육이는 거꾸로 길러주기를 구하니 바른 도리에 위배되고, 언덕에서 길러주기를 구하여 가면 흉하리라

六三 拂頤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육삼 불이정 흉 십년물용 무유리)

육삼은 기르는 곧은 도에 위배되기 때문에 흉하여 십년이 되어도 쓰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六四 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육사 전이 길 호시탐탐 기욕축축 무구)

육사는 거꾸로 길러주기를 구하나 길하니, 호시탐탐하여 하고자함을 좇고 좇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六五 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육오  불경 거정 길 불가섭대천)

육오는 바른 도리에 위배되나 곧음에 거하면 길하지만, 큰 내를 건너서는 안 된다

上九 由頤 厲 吉 利涉大川(상구 유이 려 길 이섭대천)

상구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길러지므로 위태롭게 여기면 길하니,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

 

호랑이의 눈으로 엑스텐을 쏘다

무관중이라는 전대미문의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운동경기 외의 모든 접촉은 금지되었고, 관중의 뜨거운 응원은 사라졌다. 어쨌건 그 난리 속에서도 ‘양궁DNA’를 타고 났다는 우리의 양궁선수들은 금밭을 일구었다. 나는 스포츠 경기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양궁이나 사격같은, 정적인 경기는 더욱 재미없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우연히 양궁경기를 보게 됐는데, 한발 한발 신중하게 활을 쏘는 과정의 긴장감이 의외로 흥미로웠다. 정해진 화살을 다 쏘고 동점을 이룬 사수들은 이제 마지막 한 발로 승부를 내려 하고 있었다. 도쿄의 바람은 활은 물론이고 사수의 몸을 휘청거리게 만들만큼 거칠었다. 그것을 이겨내면서 오직 과녁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는 그들의 눈빛은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한 남자양궁선수는 사대(射臺)에 들어서면 맥박수가 뚝 떨어진단다. 살기 위해서는 꼭 뛰어야 하는 맥박이기는 하나, 깃털처럼 미세한 떨림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세밀한 과녁 겨냥에는 맥박도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맥박수를 줄이면서까지 집중해서 얻으려는 것은 ‘텐(10)’이라는 점수이다. 그런데 텐(10)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텐은 아니다. 양궁 과녁의 10점을 표시하는 원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원이 있다. 그 작은 원안에 화살이 꽂히면 ‘엑스텐(X10)’이라고 한다. 엑스텐과 텐의 점수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엑스텐은 텐이라는 점수에 궁사의 실력에 대한 일종의 권위가 더해진다. 나에게는 이 엑스텐을 기대하며 과녁을 노려보는 궁사의 눈빛과, 산뢰이괘(山雷頤卦)의 육사효(六四爻)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눈빛이 오버랩되었다. 산뢰이괘의 육사효는 “전이 길 호시탐탐 기욕축축 무구(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이다.우리가 자주 듣는 ‘호시탐탐’이라는 말이 바로 주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호시탐탐’이라는 말은 흔히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원래의 의미가 퇴색해서 다른 뜻으로, 혹은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전전긍긍(戰戰兢兢)’이라는 말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가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 말은 폭정 속에서도, 현자들이 다가올 위험에 대해 신중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좋은 의미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시탐탐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

 

양생의 도, 산뢰이괘

 

이괘(頤卦)의 이(頤)라는 글자는 턱을 상징하고, 기른다(養)는 의미도 가진다. 여기서 기른다는 것은 양적 성장보다 ‘생명을 보존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괘는 위 아래의 강건한 양효를 턱에, 가운데 네 개의 음효를 음식물이나 말(言)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명체는 입을 통해 영양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입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영양이면 살지만, 독이 들어가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리고 생명체마다 ‘기름’에 득이 되는 것과 독이 되는 것이 각각 다르다. 그러니 무엇이 영양이 되고 독이 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늘 바르게 영양을 취하라는 것이 이괘의 괘사에 나오는 ‘정길(貞吉)’의 의미이다. 또한 이괘의 ‘기름(養)’은 남을 기르는 일과 더불어 나 스스로를 기르는 일을 함께 말한다. 남을 기르는 일과 나를 기르는 일은 원래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먹는 음식, 내가 한 말, 나의 지혜가 나에게는 영양이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지 않는지 총체적으로 살피는 것. 그렇게 총체적인 삶의 방식, 양생(養生)의 도를 안내하는 것이 이괘이다.

 

주역의 효들은 상괘와 하괘의 효끼리 대응하는 관계가 있는데, 초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상효가 각각 짝지워져서 서로 이끌리는 것으로 풀이한다. 가령 이괘에서 초구와 육사는 정응(正應)관계라고 해서 양-음으로 만나면 같은 성질(양-양 혹은 음-음)끼리 만나는 것보다 바람직한 관계로 푼다.

 

그러나 괘에 따라서 정응관계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령 이괘의 초구는 자신이 양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는데도(주역에서 양효는 강건한 힘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자신과 이해관계에 있는 윗사람(육사)을 부러워하며 턱을 벌리고만 있다. 초구의 효사에 나타나는 신령스런 거북(靈龜)은 초구가 원래 장착하고 있는 능력이다. 거북은 오래 전부터 영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초구 스스로 양생을 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힘을 가진 것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바깥의 유혹에 이끌린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초구가 자신의 힘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의타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정응관계가 오히려 부정적이다. 뜻을 세우고 굳세게 밀어붙일 수 있는 양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시적인 다이어트 식품에 한눈을 팔거나, 근육질 트레이너에 자신을 투영해버리는 것이 초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이(顚頤), 거꾸로 기른다는 것은

 

그렇다면 초구와 호응하는 짝인 육사는 어떠한가. 음의 성질을 가진 육사는 전이(顚頤), 즉 거꾸로 기르는 덕을 발휘한다고 한다. 거꾸로 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때 나오는 것이 ‘호시탐탐’이다. 호시탐탐은 호랑이가 사냥을 하기 위해 몸을 최대한 낮추는 모양을 가리킨다. 먹잇감을 잡기 위해서 호랑이는 그런 자세로 상대를 집요하게 노려본다. 그러니까 전이는 호랑이가 자신이 잡을 상대를 노려보는 것처럼, 기르는 상대를 잘 살피기 위해 몸을 낮춰 관찰하는 것이다. 상괘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낮추고 충분히 하괘의 아랫사람을 살피는 것. 양생으로 이끌되 자신이 기획한 양생의 깃발을 들고 초구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초구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피고 그의 역량에 맞게 양생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바로 전이이다. 전이(顚頤)는 육이효에도 등장하는데(六二 顚頤 拂經 于丘頤 征 凶), 육사효의 전이가 길(吉)한 반면, 육이의 전이는 흉하다. 육사가 아랫사람을 잘 살펴서 그를 양생으로 이끄는 전이를 수행한다면, 육이는 그저 초구가 가진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이 윗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초구에게 이끌려 가기 때문이다. 이때의 전이는 기르고 기름을 받는 관계가 역전된 것이므로 흉하다.

 

일상의 단단함과 호시탐탐이 만나다

 

처음에 내가 호시탐탐하는 호랑이와 과녁을 노려보는 궁사의 눈빛에 경외감을 느낀 것은, 목표를 향한 백 퍼센트의 집중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한 번이라도 저렇게 목표에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하는 자괴심이 나를 덮쳤던 것이다. 나를 기르는 것도 대충, 자식들을 기르는 것도 대충이었던 삶을 정면으로 보면서 나는 이괘의 초구처럼 그저 부러워만 하고 턱을 늘어뜨렸던 것만 같아서 ‘그래, 나도 한번 호시탐탐해보자’는 당치도 않은 의욕을 다졌었다.

 

하지만 나는 육사효를 곰곰이 따져 보면서 호시탐탐은 ‘기욕축축(其欲逐逐)’과 함께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욕축축은 하고자 하는 바를 계속해서 쌓아간다는 의미이다. 양궁선수들은 엑스텐을 쏘기 위해 평소 하루에 천 개의 화살을 쏜다고 한다. 처음부터 ‘쏘기만 하면 엑스텐’을 만든 건 아니었을 것이다. 경기에서 엑스텐을 쏘는 궁사의 적중력은 천 개의 화살을 쏜 하루하루가 쌓여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내가 우선 감탄하고 따를 것은 과녁을 노려보는 양궁선수의 호시탐탐이 아니라, 천 개의 화살을 쏘는 그의 일상의 노력, ‘기욕축축’이어야 하지 않을까.

 

혼자 하는 양생은 없다

 

주역의 괘 중에 ‘기름(養)’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괘로 몽괘(蒙卦)가 있다. 몽괘는 어린아이를 키우듯 미숙한 것을 깨우쳐서 완성해가는 기름을 말해주는 괘이다. 그래서 기르는 주체와 길러지는 주체가 뚜렷하다. 하지만 이괘의 기름은 분명한 역할 구분도, 기르는 방법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애매하고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이괘의 기름, 양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양생이라는 말 속에는 개인 차원에서의 ‘생명 보전’외에, 복잡다단한 인간관계 전체를 다루어 ‘좋은 삶’으로 이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양생이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다면 그 방법은 피해야 한다. 아니, 애초부터 자신과 이웃이 함께 잘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양생인 것이다. 그래서 산뢰이괘의 하괘의 효사에 흉(凶)이, 상괘의 효사에 길(吉)이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하괘의 세 효는 자신의 양생을 꾀하는 데 급급한 반면, 상괘의 세 효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양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양생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호시탐탐이다. 호랑이가 몸을 낮추고 먹이의 움직임을 관찰하듯이, 이웃 사람의 상황과 역량을 살피고 또 살피는 것. 양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혼자 하는 양생은 양생이 아니다.

 

댓글 7
  • 2021-09-27 10:57

    호시탐탐 양생의 도를 익혀가겠습니다. 주역 멋진 책이네요~

  • 2021-09-27 22:25

    내가 먹는 음식, 내가 한 말, 나의 지혜가 나에게는 영양이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지 않는지 총체적으로 살피는 것. 그렇게 총체적인 삶의 방식, 양생(養生)의 도를 안내하는 것이 이괘이다.

    :이웃의 상황을 살피는 호시탐탐 못지않게 '나'를 호시탐탐 살피기 위한 음식, 말, 지혜의 살핌도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히네요^^ 그렇게 총체적인 삶에 대한 감각을 위한 호시탐탐^^ 좋네요~

  • 2021-09-28 09:01

    <니까야>에 도를 닦는 출가자가 가져야 하는 일곱 가지 인식 중에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이 있더라고요

    맛에 대한 갈애로부터 마음이 물러서고 움츠리고 외면하고 그곳으로 손을 뻗치지 아니하여 그것에 대한 평온이나 혹은 혐오감이 확고해진다... 

    음식은 나누면 된다고 생각한 나에게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라는 과제가 되었는데 여기 양생을 말하는 산뢰이괘도 어쩌면 맥락이 닿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봄날샘의 주역이야기 갈수록 기대되는데요?^^

  • 2021-09-28 10:57

    ‘호시탐탐’의 진짜 의미를 알아 가네요~  ‘기욕축축’도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양생의 도는 늘 ‘함께’ 가능하고 꾸준하고 낮은 자세여야 가능하다!

    ‘환대’의 의미도 이럴 듯합니다~~~

    주역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네요!!!

  • 2021-09-28 11:44

    가물가물 잊혀져가는 주역인데 이렇게 한번씩 글로 만나니 좋네요. 호시탐탐 노려보지 않고 잘 살펴볼게요~

  • 2021-09-29 22:14

    젊은시절 내욕심만 차리고 살았던 것이 흉하긴 하지만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21-10-08 03:42

    우와~ 멋지십니다!!! 

    기욕축축!! 

    이웃을 살피는 양생!!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20
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타고난 기혈이 약해요. 허약체질이에요. 비위가 약해서 잘 못 먹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쓸 수가 없죠. 게다가 내성적이고 치밀해서 스트레스에 약하군요." 얼마 전 동네 한의원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피곤이 쌓이고 기력이 바닥을 쳐 거의 좀비처럼 며칠을 지낸 후 죽지 않으려면 산에라도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맘을 바꿔 아무 데나 가장 가까운 한의원으로 간 날이었다. 그날 난 부황, 뜸, 침, 3종 세트의 치료를 받고 겨우 회생했다.   타고난 기혈이 약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도 오랫동안 꽤 많은 일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아니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그다음에 번아웃되는 식의 삶은 나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기운을 정미롭게 쓰는 방식을 터득해왔다. 인간관계는 단순하고 쇼핑, 관광 같은 번다한 일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지인의 생일 등 기념일을 챙기는 이벤트 따위는 거의 안 한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바로바로 잊어버리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불필요한 동선을 만들지 않는 것, 감정의 잉여를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저질 체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양껏 하면서 살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올해 ‘삑사리’가 났다. 부실하나마 수십 년간 잘 지탱해온 삼발이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느낌이다. 자주 열이 났고 두통이 왔으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졌고, 잇몸은 ‘맛이 갔다’. 별 것 아닌...
"타고난 기혈이 약해요. 허약체질이에요. 비위가 약해서 잘 못 먹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쓸 수가 없죠. 게다가 내성적이고 치밀해서 스트레스에 약하군요." 얼마 전 동네 한의원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피곤이 쌓이고 기력이 바닥을 쳐 거의 좀비처럼 며칠을 지낸 후 죽지 않으려면 산에라도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맘을 바꿔 아무 데나 가장 가까운 한의원으로 간 날이었다. 그날 난 부황, 뜸, 침, 3종 세트의 치료를 받고 겨우 회생했다.   타고난 기혈이 약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도 오랫동안 꽤 많은 일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아니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그다음에 번아웃되는 식의 삶은 나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기운을 정미롭게 쓰는 방식을 터득해왔다. 인간관계는 단순하고 쇼핑, 관광 같은 번다한 일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지인의 생일 등 기념일을 챙기는 이벤트 따위는 거의 안 한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바로바로 잊어버리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불필요한 동선을 만들지 않는 것, 감정의 잉여를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저질 체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양껏 하면서 살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올해 ‘삑사리’가 났다. 부실하나마 수십 년간 잘 지탱해온 삼발이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느낌이다. 자주 열이 났고 두통이 왔으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졌고, 잇몸은 ‘맛이 갔다’. 별 것 아닌...
문탁
2021.10.12 | 조회 41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영화대로 42길, 2]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영화대로 42길, 2]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청량리
2021.10.10 | 조회 371
지난 연재 읽기 지원의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정크스페이스, 뒤편으로 쫓겨난 흐름들     공기순환의 N차방정식   내가 열 평 남짓 되는 작은 식당의 인테리어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공기의 순환’이다. 작은 가게인 만큼 요리를 위해 불을 쓰면 가게 내부가 금세 후끈 달아오르고, 물만 끓여도 습도가 몇 분 만에 60%를 상회한다. 음식을 하면서 발생하는 냄새와 연기도 큰 문제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주방에서 발생하는 열과 습기, 냄새와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팬fan을 단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 공간은 매우 ‘골 때리는’ n차방정식에 돌입하게 된다.   작은 가게의 미닫이 혹은 여닫이문을 열기가 어려웠던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열과 습도를 가게 내부에서 외부로 방출하는 팬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가져가지 않고, 가게 내부의 공기를 밖으로 가져간다. 내부의 공기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외부의 공기가 내부로 들어와 줘야만 한다. 누구도 가게 내부가 진공상태가 되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만약 조그만 가게에 출입문을 제외하고 별도의 창이 없다면, 밖으로 나가는 공기만큼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출입문을 밀며 들어온다. 다시 말해 팬을 틀면, 마치 여닫이문을 누가 당기고 있는 것처럼 가게 내부 방향으로 빨려 들어오는 상태를 유지하며 공기가 유입된다. 이렇게...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정크스페이스, 뒤편으로 쫓겨난 흐름들     공기순환의 N차방정식   내가 열 평 남짓 되는 작은 식당의 인테리어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공기의 순환’이다. 작은 가게인 만큼 요리를 위해 불을 쓰면 가게 내부가 금세 후끈 달아오르고, 물만 끓여도 습도가 몇 분 만에 60%를 상회한다. 음식을 하면서 발생하는 냄새와 연기도 큰 문제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주방에서 발생하는 열과 습기, 냄새와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팬fan을 단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 공간은 매우 ‘골 때리는’ n차방정식에 돌입하게 된다.   작은 가게의 미닫이 혹은 여닫이문을 열기가 어려웠던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열과 습도를 가게 내부에서 외부로 방출하는 팬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가져가지 않고, 가게 내부의 공기를 밖으로 가져간다. 내부의 공기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외부의 공기가 내부로 들어와 줘야만 한다. 누구도 가게 내부가 진공상태가 되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만약 조그만 가게에 출입문을 제외하고 별도의 창이 없다면, 밖으로 나가는 공기만큼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출입문을 밀며 들어온다. 다시 말해 팬을 틀면, 마치 여닫이문을 누가 당기고 있는 것처럼 가게 내부 방향으로 빨려 들어오는 상태를 유지하며 공기가 유입된다. 이렇게...
지원
2021.10.07 | 조회 608
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그때의 내 심정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였을까? 한동안 페이스북에 심란한 문장들을 올렸다. “오르막길 내리막길마다 생각이 바뀌고 지금 나는 뭔가를 비우는 중인가 채우는 중인가?”, “눈물이 났다. 이 슬픔은 뭔가? 생각해보니 아쉬움이다. 이제 뭔가 좀 해볼만하다는 감이 왔는데,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게 아쉽다.” 이런 글이 올라간 다음엔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청계산을 오르내리며 내가 너무 ‘인간적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을 땐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했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이 미끄러워서 짜증이 났고, 내 인생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라는 자학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수월히 내리막길을 내려올 땐 인생의 내리막길은 참 빠르구나! 하는 허무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울창한 나무와 푸르른 잎사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내 마음은 홀로 재난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감정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 마음을 내심 모르는 척하려고도 했다.   국사봉에서 이수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었을 때 쏴아악 쏴아악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쏴아악 쏴아악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바람소리가 너무 좋아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기우뚱 휘청이며 내는 바람소리는 죽비소리처럼 시원하게 들려왔다. ‘별거 아냐’,...
  그때의 내 심정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였을까? 한동안 페이스북에 심란한 문장들을 올렸다. “오르막길 내리막길마다 생각이 바뀌고 지금 나는 뭔가를 비우는 중인가 채우는 중인가?”, “눈물이 났다. 이 슬픔은 뭔가? 생각해보니 아쉬움이다. 이제 뭔가 좀 해볼만하다는 감이 왔는데,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게 아쉽다.” 이런 글이 올라간 다음엔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청계산을 오르내리며 내가 너무 ‘인간적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을 땐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했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이 미끄러워서 짜증이 났고, 내 인생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라는 자학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수월히 내리막길을 내려올 땐 인생의 내리막길은 참 빠르구나! 하는 허무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울창한 나무와 푸르른 잎사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내 마음은 홀로 재난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감정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 마음을 내심 모르는 척하려고도 했다.   국사봉에서 이수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었을 때 쏴아악 쏴아악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쏴아악 쏴아악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바람소리가 너무 좋아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기우뚱 휘청이며 내는 바람소리는 죽비소리처럼 시원하게 들려왔다. ‘별거 아냐’,...
겸목
2021.09.27 | 조회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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