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우현
2023-11-2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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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존재해 왔다.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는 갈수록 젊은 세대들의 명철함이 떨어진다며 한탄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태어난 세대를 기반으로 사회를 분석하려는 ‘세대적 사고’는 주로 특정 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만들고, 지나친 일반화와 각종 오해들을 낳는다.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세대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날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대적 사고를 폐기하고 나이에 따른 구분을 멈추어야 할까? 그럼에도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세대 갈등은 언제나 있어왔다

 인구학자 노먼 라이더는 세대에 따른 사회의 변화를 ‘인구학적 신진대사’라고 표현한 바 있다. 사회는 변화가 불가피한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하고 전임자가 지속적으로 철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끝없는 야만인의 침략’의 의해 두 진영 사이의 문화적 긴장이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연구들과 발굴되는 기록들을 토대로 사회에서의 세대 갈등은 필연적이고, 비슷한 구도로 반복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야만인의 침략’과 함께 발생하는 도덕적 공황 상태는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이 등장하기 거의 한 세기 전인 1906년에는 “싸구려 소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또한 지금의 MZ세대들에 대한 비판처럼, 20년 전에는 밀레니얼 세대들도 나약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비판을 똑같이 받았었다. 그런 걸 보면 역사적으로 ‘새로운 젊은이’들과 ‘보수적인 어른들’의 갈등은 항상 있어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결론은 각 세대들의 특수성을 지운 채 오늘날의 세대 갈등을 그저 역사의 반복으로만 치부하게 된다. 이에 『세대 감각』의 저자 바비 더피는 보다 유연한 세대적 사고를 위해 세 가지 영향을 구분하여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시대적 영향’으로, 전염병이나 전쟁 같은 큰 사건들을 통해 영향을 받은 세대의 분위기를 말한다. 두 번째는 ‘코호트(cohort)적 영향’이다. 이는 각 세대들의 조건에서부터 형성된 태도, 신념, 행동의 영향을 파악한다. 마지막으로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하는 환경과 신체조건 등을 설명하는 ‘생애 주기적 영향’이 있다. 더피는 이 세 가지 영향을 토대로 자산, 주거, 건강, 문화, 정치, 사생활 등 다양한 방면에서 오늘날의 세대 갈등이 왜 심화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짚는다.

 

‘절망’의 세대

 그렇다면 MZ세대만의 특성은 무엇일까? 책에서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거친 분석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점은 더 이상 세대의 진보가 생활 수준의 진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자산은 갈수록 줄고, 주거 환경 또한 안 좋아지고 있다. 유럽의 한 기관에서는 1945년 이전에 출생한 ‘전쟁 전 세대’와 1945~65년에 출생한 ‘베이비 부머’, 1966년~79년에 출생한 ‘X세대’,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 총 네 개의 코호트를 대상으로 평균 실질 가처분 소득(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 주거비를 공제한 소득)을 비교했다. 그들이 30대였을 때, 40대였을 때, 60세였을 때 각각의 소득을 비교한 결과 세대가 내려갈수록 소득은 계속 감소했다. 이 밖에도 더피는 주거나 행복지수에 대한 통계, 교육 수준과 의료 수준은 높아지는 반면에 노동 환경과 수익은 줄어들었다는 통계 등 다양한 자료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급의 편차는 커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해석을 이끌어 냈다.

 그에 따라 미국 젊은 세대들의 자살률은 꾸준히 증가했다. 1990년대부터 2017년까지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들의 자살률은 약 3배가 증가해 왔다. 반면 대학을 졸업한 백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각 코호트들의 상황이 시대를 거듭할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50년대에 출생한 코호트보다 60년대에 출생한 코호트가 자살,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률이 50퍼센트 높았고, 70년대에 출생한 코호트는 60년대 출생한 코호트보다 다시 두 배가 높았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은 이 현상을 ‘절망의 죽음’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20세기에 일어난 건강과 생활수준에서의 진보는 세기말까지 계속됐다. 사람들은 진보가 계속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갖게 되었고 그들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자녀들의 삶에도 진보라는 축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그뿐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래의 발전 속도가 너무나 꾸준하게 오래 지속된 나머지 미래 세대가 현 세대보다 더 잘 살 것이라는 전망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세대 감각』, 바비 더피, 어크로스, 153쪽

 

그러니까 세대 진보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금융위기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MZ세대를 ‘절망의 세대’라고 보고 있다.

 

소셜 미디어와 ‘세대 전쟁’

 하지만 유독 이런 절망의 분위기가 오늘날 MZ세대 전반의 분위기로 확산되고, 세대 격차에 따른 갈등이 가속화되는 원인은 다른 시대적 영향에 있다. 스마트 기기들의 등장과 소셜 미디어의 환경이 그것이다. 스마트폰은 전 세대에 걸쳐 빠르게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과거 산업혁명기의 발명들이 광범위하게 채택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스마트폰이 세계적으로 채택되는 데에는 1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한 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4명은 한 달 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반려견이나 파트너를 만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자료들은 스마트폰에 대한 현대인들의 애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미 스마트폰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스마트폰 보유 여부와는 다르게 스마트폰 사용에 있어서는 세대별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영국의 통신 규제 기관인 오프컴에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밀레니얼 세대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매주 평균 약 1500분(약 25시간)에 달했다. 그러나 X세대의 사용 시간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55세 이상의 집단은 다시 그 절반인 300분정도의 주간 사용시간을 보여주었다. 이는 스마트폰 자체는 대중화 되었지만, 스마트폰이 삶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코호트마다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소셜 미디어는 어떨까? 프랑스에서는 Z세대 10명 중 9명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반면 전쟁 전 세대는 7퍼센트, 베이비부머들은 19퍼센트 정도가 소셜 미디어를 사용했다. 젊은 세대와 나이든 사람들이 기술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실제 생활에서의 단절을 유발하는 핵심 원인이라고 더피는 보고 있다. 게다가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의 종류도 각각 다르다. 소셜 미디어는 각자가 개인과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정체성에 민감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와 같은 네트워크를 공유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세대 별로 각각 다른 플랫폼을 이용하게 된다.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페이스북은 전쟁 전 세대와 베이비부머의 이용률이 가장 높은 앱이었고, 다른 앱에 비해 세대 간 사용 편차가 가장 적은 앱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스타그램은 Z세대의 70퍼센트, 밀레니얼 세대의 50퍼센트가 사용하고 있었고, 전쟁 전 세대는 1퍼센트, 베이비부머는 8퍼센트 정도만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세대 간 사용률의 편차가 두 번째로 큰 앱이었다.(참고로 제일 격차가 큰 앱은 미국의 인기 메신저 ‘스냅챗’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셜 미디어가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은 소셜 미디어가 세대 간의 차이를 ‘깨어 있음의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 성평등, 동성애 등에 관한 인식의 차이를 ‘깨어 있음’과 ‘뒤처짐’으로 구분 짓고, 미디어는 조회수를 위해 그게 곧 세대들의 특징인 것처럼 범주화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세대 갈등을 단순한 ‘인구학적 신진대사’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는 카카오스토리와 네이버 밴드의 사용률이 높아 주로 이 다섯 플랫폼의 통계를 비교한다.(출처 : 노컷뉴스)

 

 

타자화 :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대 갈등을 MZ세대의 ‘절망’과 소셜 미디어가 엮이면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징조라고까지 봐야할까? 더피는 기본적으로 세대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세대 갈등에 관해 다방면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더피에겐 세대 갈등이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심화될 수 없다고 낙관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며, 언젠간 Z세대들도 ‘노인 세대’의 위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지원을 줄이고 젊은이들에게 집중하자는 식의 의견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노인 세대가 됐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게 하며, 극단적인 갈등의 상황을 억누른다. 가족과 유대를 떠올리며 다른 세대와도 유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더피는 ‘인터넷 세계’와 각종 통계자료를 비교하면서, 인터넷에서 비춰지는 것만큼 세대 갈등이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1984년에 진행한 설문에서 ‘정부가 노인들에게 적절한 기준의 생활을 보장해 줄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90퍼센트 이상이 동의했다. 이는 2016년에 진행한 동일한 질문에도 결과가 같았으며, 세대별 격차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몇 년 전 팬데믹 시기에도 온라인상에서는 세대 갈등이 심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더 타임스>에 실린 한 젊은이의 편지처럼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며 노인 세대를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며 낙관한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오늘 신문을 펴다가 81세가 되신 우리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 코로나19로 심각한 상황이 되면 호흡기를 떼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양식이 있는 결정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아직 수학 개인 지도를 하시고, 주민 협회를 운영하시고, 개들과 손주들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시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크리스마스 케익을 만드신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80세 이상 노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사회에 대한 그들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애정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필요합니다.

『세대 감각』, 바비 더피, 어크로스, 331쪽

 

 더피에 따르면 오늘날의 문제는 꼭 세대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내가 조금 더 두드러지게 느끼는 문제는 문화의 파편화와 타자화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갈수록 빨라지는 기술 발전과 소셜 네트워크의 영향은 각 세대뿐 아니라 각 세대 안에서도 수많은 집단을 만들었다. 더 이상 대부분의 가족이 TV의 같은 채널을 보지 않으며, 50세를 넘긴 유재석은 마지막 ‘국민 MC’가 되었다. 이제는 각자의 핸드폰에서, 각자의 알고리즘으로 나타나는 그들만의 ‘국민 MC’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나와 다른 집단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화를 통한 혐오와 개인주의는 세대 갈등뿐 아니라 젠더 갈등, 계급 갈등, 동물권 갈등 등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파편화되고 있기에, 우리는 세대 간 유대의 사례를 보며 낙관할 게 아니라 더피의 말대로 ‘다방면으로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세대적 사고’에서 가능성을 찾고 싶다. 이렇게 파편화되는 과정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더피가 짚었듯이 죽지 않은 한 우리는 모두 늙는다. 젠더 갈등, 동물권 갈등 등에서 요청하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상상력은 꼭 필요하지만, 신체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이 다르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런 점에서 세대적 사고를 통한 필연적인 나이 듦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기 좋은 수단이 아닐까? 누구나 생애 주기적 공통 감각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절망이 아닌 상상력이 넘치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댓글 1
  • 2023-11-23 09:37

    뭔가, 늙어가는 나와 더 사이좋게 지내보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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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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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84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84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우현
2024.02.05 | 조회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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