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행복 꼭 필요할까요

스르륵
2023-11-21 10:53
307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지겹게도 해시태그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모두모두 행복하세요! 라고 말이다.

 

 

 

 

긍정하라, 행복할지니

 

긍정심리학의 관점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혁명적이고 참으로 유익한 이 작업을 지지하는 프로그램을 더 많은 재단과 정부가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해한 ‘행복’이 『해피크라시』에서 비판적으로 전유되는 과정의 선두에는 무엇보다 ‘긍정심리학’이 있다. 일루즈의 설명에 따르면, ‘긍정심리학’이란 ‘인간의 긍정적 특징을 잘 이끌고 잠재력을 최대한 키울 수 있도록 도와 개인의 행복에 일조하게 한다는, 즉 긍정적 태도와 행복에 관련된 주제로 20세기 말 미국 심리학회(APA, 마틴 셀리그먼)에서 강력하게 부흥한 새로운 심리학 사조다. 긍정심리학이 기존의 심리학과 다른 점은, 전통적인 심리학이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 같은 인간의 ‘약점’에 집중했다면, 긍정심리학은 개인의 ‘강점’, 즉 지극히 긍정적인 심리와 감정 상태에만 초점을 맞춘다. 즉 고통치료 전략에 만족해선 안되고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제법 귀에 익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본주의심리학’,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자존감 운동’, 그리고 21세기 ‘자조문화(self-help)’와 ‘심리 치유’를 생각나게 한다. 하여 긍정심리학은 이 연장선상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 마음의 밝은 면인 주관적 안녕감, 긍정적 감정, 진정성, 낙관주의, 회복 탄력성 등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이고, 기분좋은 아우라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하여 문제는 긍정심리학의 이러한 빅픽쳐가 (일루즈가 보는 것처럼) 꼭 그렇게 나쁜 그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더 기분좋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나? 무엇보다 행복은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니라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라는데? 어차피 이데올로기란 것이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판타지를 생산해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긍정심리학의 이런 의도는 오히려 권장할 만하게 보인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이거 좋은거 아닌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탄생

일루즈에 의하면 긍정심리학의 ‘행복 프로젝트’는 창시 불과 몇 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고, 자아와 영성, 그리고 자기 개선 능력과 정신에 관련된 문제들에 도움을 줍니다’, ‘행복의 양은 측정 될 수 있습니다(공리주의는 실패했지만)’ 이 홍보에 이끌려 세계 곳곳의 학회가 신설되고, 국제적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행에 부응하려는 전 세계 언론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중은 물론 자신만의 꿍꿍이를 가슴에 품은 정치, 경제, 교육 등의 각 분야 주체들이 긍정심리학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심리적 행복의 복음은 인종적 분열, 사회적, 성적 격차로 피폐해진 사회에서 사회적 유대를 대체했다.

 

수 많은 사설기관과 공공기관들이 긍정심리학의 너그러운 돈줄과 주요 고객이 되어주었다. 코카콜라, 구글, 인텔, 포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제너럴 밀스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 내면을 탐험하며 심리적 실마리와 의지를 찾아내려는 노동자를 격려해주는 동시에 ‘생산성’ 향상의 기대를 품은 채 행복학과 손을 잡았다. 정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은 화폐단위로 측정되던 비용과 효율의 딱딱한 지표들을 ‘행복’이라는 유연한 지표 즉, ‘행복지수’, ‘웰빙지수’로 대체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국민 생활의 지속적인 하락과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행복’을 말할 수 있기 위해, 혹은 국민이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만 하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은 서둘러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의 시대를 열었고, ‘행복부’를 신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의 흐름은 의료계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다양한 질병과 부정적인 측면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기존 의료 매뉴얼에 대응해, 인간의 덕성과 강점만을 강조하고 분류하는 긍정심리학의 ‘정신건강메뉴얼’은 관련 업계는 물론 여러 방면으로 그 영향력이 퍼져나갔고, 교육계에서는 행복 개념에 기초한 학습프로그램들이 (예를 들어 영국 초등학교의 90%, 중등 교육 기관의 70%) 역량 증진과 감정관리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신자유주의 교육문화에서는 ‘비판’이나 ‘추론’보다 인맥과 경영에 더 치우치는 ‘기업가 정신’이 에 더 환영을 받았고, 17개국 수 천개의 학교가 국제긍정교육네트워크와 연결되어 긍정교육에 귀의했다.

‘긍정적인 정신 건강'에 기초한 자기 계발의 '코칭' 기법들은 스포츠과학, 디자인, 신경과학, 동물 복지, 인문학 등등 우리 일상의 전반을 아우르며 퍼져나갔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에 의거하여 유엔은 '세계 행복의 날(3월20일)'을 정했고, OECD는 각국의 공공정책에서 '웰빙지수' 선택을 강력히 권고했다. 행복과 웰빙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열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이제 행복은 자명하고 측정가능한 ‘선’이 되어 우리 모두가 다다르고 힘써야 할 지고한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고 일루즈는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행복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당위가 됨으로써 어떤 ‘특정한’ 좋은 삶을 행복으로 환원하여 읽어나갈 위험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복은 ‘행복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행복이라는 역습

이제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스러움 그 자체도, 순박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위로도 아니며, 운명, 상황, 혹은 생의 무탈함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심리 상태들의 전체를 의미한다. 하여 ‘해피크라시‘란, 행복의 강박적 추구라는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시민권'의 개념이자, 새로운 ‘지배적 전략’이자, 새로운 ‘정치적 의사결정’, 그리고 새로운 ‘경영방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이라는 어떤 ‘공격‘을 받으며 살게 된 건 아닐까?

자본주의와 긍정 이데올로기의 콜라보는 ‘노력하면 행복 할 수 있어’를 외친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얼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평소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라’는 윤리적 금언들은 실은 알고 보면 국가와 기업들이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신자유주의 경제의 불확실성과 공공 정책의 결함을 노동자 개인의 ‘긍정적인’ 내면에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실업률, 불평등과 차별, 소득의 재분배, 빈곤과 교육 등의 사회 구조적 문제는 쉴새없이 자신을 진단하고 만들어 나가는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이고 유연한’ 영수들의 어깨에 각자 도생의 책임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루즈는 묻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가 모든 상황에 앞선다는 말, 환경보다 자아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 시대가 어떻든 열쇠는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그 기분 좋았던 ‘아우라’는 어쩌면 노동을 ‘개인의 프로젝트’로 떠넘기고, 교육을 ‘개인의 재능과 자질’의 문제로 해석하고, 건강을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로 변모시키면서, ‘사회적 진보’ 조차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어떤 문제라기보다 그저 ‘개인적 번영’의 문제로 환원시킨 자기 개선의 강박과 행복염려증의 주범이 아닐까.

하여 알고 보면 ‘긍정하라, 행복할지니’의 진정한 속내는 ‘노력하지 않는 너는 문제가 있어’다. ‘자기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해피크라시에서는 ‘비정상인’이다. 그런데 자기 개선에 열심인 사람역시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이라는 의미속에 내재되어있는 자아의 불완전성이라는 환영에 끊임없이 시달리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영수들이 느낄 바로 이 ‘자아의 불완전성’은 기업들의 완벽한 챤스인 ‘셀링포인트’가 된다. 그러하기에 시장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완벽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긍정을 강조하는 행복학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강박의 정상화’, 즉 최선의 자기 만들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명령’이다.

하여 『해피크라시』를 읽으며. 왜 그토록 많은 기업들이 ‘긍정적 태도’를 중시했는지, 왜 교육 현장에서 수년전부터 ‘기업가 정신’ 프로젝트가 성황이었는지, 나는 솔로의 솔로들은 왜 행복과 긍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지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이 일루즈의 설명처럼, 진화론, 심리학, 신경과학, 철학의 개념들을 끌어와 급조한 ‘지극히 미국적인 신념’을 가짜 과학의 어법으로 다시 쓴 것일 뿐이라 해도, 또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행복학이 행복산업에 포획되어버린 ‘강박적’ 자기 계발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나는 잠옷을 입고 출근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구글의 ‘긍정기업문화’가 여전히 멋있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우리 시대 ‘영수들’이 여전히 눈물겹다. 어렵다,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행복은 좀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기 전의 그 순간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로 바꿔 본다면 답이 좀 쉽지 않을까. 그리고 일루즈가 강조하는 것처럼, 행복의 ‘참다운’ 이미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최고의 자아’에 도달해야 할 의무같은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행복 이데올로기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고통과 고난이라는 부정값없이 긍정값으로만 홀로 구성될 수 없음도 상기한다면, ‘언제나 더 큰 행복이 필요하다’는 해피크라시의 거대한 유혹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걸까? 만약 필요하다면 어떤 행복이 필요한 걸까. 행복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복을 ‘자명하게’ 정의하고, 측정하고, 증명하고, 수치화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언제나 ‘어떤’ 희망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희망은 만들어지고 처방되어지는 것이 아닌 어떤 ‘비판적인 분석’에 기초한 희망이다. 그리고 ‘사회 정의’에 기초한 희망인 동시에 ‘가부장적이지 않은 정치’에 기초한 희망일 것이다. 하여, 행복이란 것이 일루즈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정의’와 ‘앎’에 기초한 희망으로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는 것이 맞다.

댓글 4
  • 2023-11-22 08:09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놈의 행복, 긍정, 힐링 타령...이주 지긋지긋하다싶었는데...제가 삐딱해서 그런것 만은 아니었군요. 헤헤

    • 2023-11-23 09:42

      오호...토토로의 댓글이 더 흥미롭군요. ㅎㅎ

      전...나카자와 신이치가 행복에 대해 설명한 게 늘 맘에 남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순수증여)가 내 인생에 난입(?! = happen) 순간,
      다시 말해 접신하는 순간!!

  • 2023-11-24 18:38

    최근에는 청년 토론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 주제는 '자유'였는데, '자유는 주인의식이다', '자유는 (마음의) 평화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등 의견이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토론이 진행되는 내내 어떤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어떤 당위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란 전제 위에서 논의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애초에 자유는 추구해야하는 무엇인걸까?'라는 질문이 작게 마음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어요. 마땅히 자유로우면 좋은 거 아닌가? 라는 결론 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요. 주제는 다르지만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생각이 깊어지네요...
    아직도 어떤 부분 때문에 턱턱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2023-11-26 11:51

      그러게요. 이런 자유 저도 궁금하네요~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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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2.29 | 조회 29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31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86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84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우현
2024.02.05 | 조회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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