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정군
2023-09-11 13:49
209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경쟁에서조차 자본주의에게 패배한 셈이다. 맑스가 쿠겔만 박사의 집에서 느꼈던 모욕감은 이미 어떤 징후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구두 닦기 문제’로 대표되는 ‘필요 노동’의 적절한 분배 시스템을 창출하는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1)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에서 아론 베나바브는 지난 읽고쓰기1234에서 리뷰한 바 있는 아론 바스타니의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자동화 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행한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자동화 담론’이 ‘새로운 체제’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해당 담론의 ‘기계의 발달로 탈희소성 사회가 도래하고,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주장은 비판한다. 베나바브의 기본 관점은 ‘희소성’은 이미 거의 극복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오히려 문제는 ‘정치’에 있다는 것이다.

2)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마르크스 평전』, 408쪽, 푸른숲. 

 

‘자동화’는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 기술적 대량실업 가설
오늘날 이른바 ‘자동화 담론3)’이 범좌파진영의 큰 관심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은 ‘기술’로 ‘인간 노동’을 대체함으로써 ‘구두 닦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드디어 인간이 ‘노동’할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처참한 붕괴를 기억하는 좌파들에게 그것은 다시 ‘사회주의’를 상상해 볼 여지를 준다. 좌파만이 아니다. 레이 커즈와일과 앤드루 양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담론은 우파(?) 또는 이미 자본가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실리콘 밸리의 신흥부자들에게도 어필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자동화 담론’은 이 시대의 ‘자본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생산비용 제로의 달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조명이 없어도 가동되는 공장, 산재처리가 불필요한 노동-로봇들, 임금협상이 사라진 24시간 작업장을 마다할 자본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 ‘소비자’가 사라지지 않겠냐고? 괜찮다. 기본소득이 있으니까! 기본소득을 비롯한 사회적 투자 및 보편적 소득과 같은 분배에 대한 결정권은 여전히 ‘생산’을 통제하는 쪽에게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감액한다’, ‘기본소득을 선별적으로 지급한다’ 등등. 기본소득에 관한 어떤 ‘결정’에 대해 무엇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기본소득’이 문제가 됨으로써 사회에 대한 ‘통치권’의 문제는 시야 밖으로 밀려나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문제를 전도시킨다.

기술발달에 따른 생산 자동화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인간 노동이 결국엔 소멸할 것이라는 ‘자동화 가설’은 무엇보다 기술 발달에 따라 노동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만 확증될 수 있다. 그래야 ‘기술적 대량 실업’이 발생하게 될테고, 그에 따라 ‘노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베나바브는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에서 이 가설이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음을 다양한 고용지표 등을 통해 증명한다. 그에 따르면 자동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실업이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실업의 원인은 기술적 발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맑스도 언급한 바 있는) ‘생산력의 과잉’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나바브는 ‘자동화 담론’이 현재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담론적 장場을 열어준다는 점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현재 지표들이 보여주는 바를 본인들의 ‘가설’에 끼워 맞춰 해석한다는 점에서, 따라서 ‘자동화 사회가 오리라’는 기대를 과하게 섞는 다는 점에서 ‘자동화 담론’이 뚜렷한 한계를 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술 발달에 따른 생산성의 증가에서 비롯되는 ‘실업율 증가’는 ‘기술적 대량 실업’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고,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이 생산력 과잉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베나바브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성은 1970년대 이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필요 생산량이 충분히 생산된 상태에서 과잉 생산된 상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단위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이 경쟁에서 탈락한 공장은 문을 닫는다. 남은 공장은 최대한 생산비를 낮춰 시장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쓴다. 기술발달에 따른 공장 자동화는 이러한 경쟁력 확보의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자동화된 공장에서 노동자 1인당 산출량은 전에 없이 증가한다. 그런데 동시에 경쟁에서 패배한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은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선진국 경제는 1990년대, 넓게 잡아 1980년대 중반부터 서비스업 중심으로 체제를 재편한다. 현재 통계를 보면 과거 직업군 전체의 절반을 넘나들던 선진국 경제의 제조업 고용율은 10-20%대로 떨어졌다. 그러면 그 많던 공장 노동자는 어디로 갔을까? 흔한 분석은 ‘서비스업’에서 해당 고용수요를 흡수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어떤 직군도 제조업 만큼 고용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일부는 서비스업 종사자로 흡수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상시적 반실업상태, 불안정 노동자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실업율의 상승을 주도한 것은 기술발달이 아니라 제조업의 쇠퇴, 즉 생산력 과잉에 의한 생산성 저하4)다. 그러므로 ‘자동화 가설’은 시작부터 틀린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은 셈이 된다. 사라질 일자리가 있어야 ‘기술적 대량 실업’이 가능할 텐데, 이미 세계의 일자리는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일자리’가 늘었다고 해야 하나? 왜냐하면 실업율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무슨 일이 되었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3)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류문명을 지탱해왔던 ‘인간 노동’이 ‘기계 노동’으로 대체되며, 그 결과 ‘모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고 했던 맑스의 말이 실현되는 ‘탈희소성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들 일반을 말한다. 대표적인 주장자로 「가속주의자 정치 선언」을 쓴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셔니섹,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쓴 아론 바스타니 등이 있다. 넓게 보아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를 이야기 하는 레이 커즈와일이나, 『보통 사람들의 전쟁』을 쓴 앤드루 양도 ‘자동화주의자’로 꼽힌다. 다만, 커즈와일과 앤드루 양의 경우 전통적인 좌파담론과는 거리가 있다. 

4)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 책세상, 2장 전세계의 탈공업화, 제조업 생산능력 과잉이 가져온 해악.

 

직업 없는 노동자와 일하는 실업자
그렇게 사라진 일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질 낮은 일자리들이다. 독일의 미니잡5), 한국의 비정규직과 알바, 일본의 프리터족, 미국의 파트타임 노동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살아남은 제조업 부분의 경쟁력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 기반이기도 하다. 일례로 ‘도요타 생산방식6)’으로 알려진 ‘적시 생산 체제’를 생각해 보면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도요타는 고정비용 0% 달성을 위해 공장에 잉여 부품과 노동자를 두지 않는 정책을 시행한다. 생산은 실제 수요가 발생하는 순간, 공장 밖에 대기하고 있던 부품 하청회사들의 트럭에 실려 있던 부품과 단기 채용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라인에 투입할 때만 일어난다. 평상시 공장에는 부품도 노동자도 완제품 재고를 최대한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절감한 생산비용은 가격경쟁력으로, 초과이윤으로 다시 자본화된다. 이것이 생산력 과잉시대에 전통적인 제조업 기업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상시적인 반半고용-반실업 상태의 노동자와 하청에서 하청으로, 중간재에서 원자재로 이어지는 수탈구조가 기업의 경쟁력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적시 생산에 동원 가능한 값싼 임금의 거대한 반半실업자군이 그렇게 태어난다. 국가가 이를 규제할 수 있을까? 이를 규제하려는 국가에 대해 자본은 공장 이전이나, 고용축소와 같은 사회적 투자를 철회함으로써 대응한다. 그러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고용마저도 불가능해지고 만다.

 

이는 극단적으로 말해 한 사회의 생활수준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통제력이 사실상 자본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나마 있는 규제마저 완전히 사라진다면, 또는 자본이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더욱 정교하게 구축한다면 어떻게 될까? 필 존스의 『노동자 없는 노동』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노동의 미분화’와 그에 동반되는 끔찍한 결과를 잘 보여준다. 일자리는 매우 잘게 쪼개져서 짧게는 1분 이하, 길게는 1-2시간 단위로 미분화된다. 이때 노동자는 100장의 이미지에서 ‘자동차’를 찾아 클릭하는 ‘일’, 인공지능의 답변의 적합도를 5점 척도로 평가하는 일을 잠깐 하고 1-5달러 사이의 임금을 받는다. 그것도 기업이 발행하는 ‘쿠폰’으로! 자동화주의자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노동’은 여전히 실존한다. 다만 너무 잘게 쪼개져서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노동인지 봉사인지, 고용인지 개인 사업인지 식별되지 않을 뿐이다. 거기 있는 것은 노동자인가 유령인가? 차라리 유령이라면 좋으련만, 여전히 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하루 일정량의 열량공급과 휴식이 필요한 유기체다. 이 분화과정이 지속되었을 때, 일자리와 임금이 필요한 노동자의 상당수는 ‘직업 없는 노동자’, ‘일하는 실업자’라는 역설적인 계급이 될 공산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의 완성태는 봉건영주에 상응하는 기업이 농노에 상응하는 기업 노예군을 분할 통치하는 테크노 봉건사회일 것이다.

 

5) 독일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칭하는 말. 월 520유로(약 75만원)의 두 배를 넘지 않는 범위의 일을 통칭한다. 사회보장 의무는 있으나 소득세 의무는 없다. 2000, 2010년대 유럽 경제의 성공모델로 꼽혔던 독일 경제의 가장 긍정적인 점으로 평가되었던 높은 고용율은 이와 같은 ‘미니잡’에 힘입은 바가 크다.

6) 이 시스템의 기만적인 성격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최악』에서 잘 묘사되는데, 주인공 중 하나인 철공소 사장 가와타니 신지로는 자신의 트럭에 납품할 부품을 싣고 도요타 공장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도요타 담장자에게 전화과 걸려오면 즉시 공장으로 들어가 납품을 한다. 다시 말해 도요타에겐 부품 재고가 0%이지만 그것은 신지로의 대기비용 덕에 상쇄된 비용이라 할 수 있다.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최악』, 북스토리.

 

사회운동과 필요 노동의 평등한 분배
베나바브는 ‘사회적 운동’만이 이와 같이 끔찍하게 구성될 미래로 향하는 경로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동화주의자들 주장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 ‘기술발달’이 자동으로 ‘특이점’을 불러올 것까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자본의 사회적 통제력, 다른 말로 ‘권력’을 회수하는 것은 자동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베나바브의 주장은 맑스가 오래 전에 시도한 자본주의 분석과 그에 대한 대안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은 현대적으로 번안된 맑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쨌든 문제는 다시 ‘정치’다. 따라서 질문도 정치적인 수준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자본이 틀어쥐고 있는 사회적 투자권력을 해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노동을 사회적인 것으로 재조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술발달을, 기술적 대상을 자본주의적 사용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화폐적이지 않은 보상체계를 구성할 수 있을까 등등. 베나바브는 자본의 독점권 회수 이후의 사회조직에 관한 흥미로운 것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베나바브의 답은 ‘모두’이다. 요컨대 그것은 ‘필요노동의 평등한 분배’다. 자본주의가 이미 인류 전체의 생활상태를 지탱할 수 있는 생산력을 확보한 이상, ‘필요노동’에 필요한 시간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 모두에게 균등한 4시간의 필요노동이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노동에 할당된 시간이 4시간이라면, 하수도 청소는 2시간만 하면 되는 식이다. 또 의사나 간호사 같이 특수한 전문직 노동에 할당된 사람에 대해 전사회적 칭찬으로 그의 전문성을 보상하자고 제안하다. 이 주장의 실현가능성이나 허점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딱히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통해 베나바브가 하고 싶은 말은 설사 우리가 ‘노동’에서 벗어날 역량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일’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탈희소성 사회’에서라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일하지 않을 수 있을 테지만, 현실의 우리는 한가함에 지쳐서 뭐라도 하려고 하는 동물들이다. 우리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따라서 ‘노동’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노동’의 성질이 바뀔 뿐이다.(이 마저도 맑스의 주장과 동일하다.)

 

 

베나바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중적이다.
첫째, 나는 분석의 치밀함과 대조되는 이러한 대안의 몽상적 성격이 마음에 든다. 맑스 조차도 항상 ‘대안’에 이르러서는 늘 시인이 되곤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분석과 대안의 이러한 격차는 현실에 펼쳐진 그물이 얼마나 촘촘한지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몽상을 더 멀리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보편적 인간의 자유’를 주장했던 18세기의 계몽주의나 ‘생산수단의 독점 해체, 계급의 철폐’를 주장한 19세기의 사회주의의 주장이 당대에는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렸을지 생각해 보자. 어쩌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는지에 따라 100년 후의 세계의 풍경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투쟁’이 다음 세계에 도달하는 거의 유일한 경로라는 점에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나는 이른바 ‘투쟁’은 ‘투쟁 이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싸우는 동안은 ‘싸움’ 자체가 중요할 뿐, 싸움이 끝난 후의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린다. 맑스가 혁명 이후를 이야기할 때면 불현 듯 시인이 되었던 것이나, ‘보편적 인간의 자유’를 외쳐대던 레닌과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 체제라는 사실상의 전체주의를 재도입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투쟁’과 ‘승리’는 자동으로 ‘진보’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계급적 질서는 바로 그 공백을 파고든다. ‘일단은 하던 대로 하자. 그 다음은 알아서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갖지 않은 피지배계급의 혁명이 계급을 철폐할 것이라는 도식도, 역사의 진보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하게, ‘사회적 투쟁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투쟁’의 형상은 다양할 수 있을테고, 그래서 다양한 형상을 발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에게 그 이야기는 ‘대의제 민주주의도 잘만 작동하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당장은 대안이 없으니 그나마 나은 당에 투표하자’는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게 들린다. 그래서 여전히 여기가 나의 아포리아다. 우리는 주체와 모델 없이 싸울 수 있을까? 무수한 형상들 중에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려낼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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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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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 조회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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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스르륵
2023.09.17 | 조회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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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동은
2023.09.11 | 조회 30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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