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아?

봄날
2023-09-0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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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의미이다. 호적은 그의 사상이 변화를 인식하되 그것을 그대로 긍정하면서 사회변화의 능동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방관자의 입장, 달관주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정치혁명의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출세주의이며, 극단적인 ‘수구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 또 한 명의 중국 근대 철학자 풍우란의 해석은 달랐다. 호적이 달관주의라고 말한 바로 그 부분에 대해 풍우란은 신비주의적 관점을 제시한다. 신비주의란 궁극의 실재 즉 신이나 자연과 합일하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렇게 나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개체성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경험을 풍우란은 ‘순수경험의 세계’라고 해석한 것이다.

신비주의가 거론되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애초에 나는 두 번째 장자 텍스트를 토머스 머튼의 『장자의 도(道』)로 정했었다. 그런데 바로 위의 부분을 그가 해석한 것을 보고 텍스트를 바꿨다. 영국의 신부였던 그는 장자 텍스트를 읽으며 장자에게서 기독교의 정수를 느꼈다고 한다. 윗 부분의 물화(物化)를 주도한 ‘조물자’를 바로 ‘그분’이라고 규정했고, 모든 변화의 주체 역시 ‘그분’이라고 해석했다. 창조주가 물들의 변화 또한 주재한다는 방식의 해석은, 잘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장자의 진정한 해석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비주의적 해석 자체가 가진 수동적인 면을 보면, 풍우란의 신비주의적 해석도 맘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풍우란은, 장자의 신비주의는 세계를 마음으로 환원시키는 유심론적인 ‘만물일체’가 아니라, 순수경험을 통해 세계를 마주친 자아가 소멸해 버리는, 말하자면 ‘역방향의 신비주의’라고 저자는 규정했다. 이런 종류의 신비주의라면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추동하는 어떤 능동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과도 공명한다는 저자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스피노자는 수동적인 슬픔의 정서를 이성의 인도에 따라 능동적 정서인 기쁨으로 이행하려 한다는 점에서, ‘(지식을 통해) 이치를 알게 되면 슬픔과 기쁨 같은 감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장자하고는 정서에 있어서 일종의 위계적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을 가지고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오가고,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엇갈리는 독해가 여전한 것은 장자의 텍스트가 가진 표현의 난해함, 은유의 거침없음, 폭력적인 축약에 기인할 것이다. 저자의 이 책 1부를 통해 위의 사례 말고도 동서양의 해석서들의 갈래를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다.

 

만물제동(萬物齊同)과 물화(物化)

그러나 이 책을 만난 소중한 소득은 2부에 있었다. 이전에 읽었던 왕보의 책에서 <소요유>편의 일화가 관심거리였다면, 이번에 내 눈을 이끈 것은 <제물론>이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문장도 <대종사>편에 들어있기는 하나, ‘변화’를 주제로 삼은 점에서 <제물론>의 다른 문장처럼 눈길이 갔다.

일단 나카지마 다카히로는 2부를 ‘물화(物化)의 핵심을 둘러싸고’ 장자를 읽어보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2부를 읽으면서 나는 장자가 말한 물화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장자의 물화는 ‘변화’에 초점을 맞춘 사유방식이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는 ‘생성변화’의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다.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나비의 꿈(胡蝶夢)’이다.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습니다. 마음 내키는대로 날아다니다 보니 자기가 장자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퍼뜩 깨어 보니 놀랍게도 다시 장자였습니다.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만물의 변화(물화)’라 합니다.(『낭송장자』<제물론>)

 

많은 해석자들이 이 부분을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즉 모든 것은 평등하며 그런 점에서 나와 타자의 구별은 없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가령 모리 미키사부로 같은 학자는 “구별이 있다면 단지 상대적으로 표현한 것, 즉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할 때, 거기에는 일방과 타방의 구별이 있다. 그거나 그것은 (인간의)상식적인 입장이고, 모든 것은 평등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자기와 타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나비는 그대로 장주”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모든 구별을 뛰어넘는 초월적 사유가 작동한다. 그러나 장자의 ‘물화’를 즉시 ‘제동’에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나카지마는 ‘장자는 물화를 그런 의미에서 쓰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장자의 물화가 뭇 해석자들이 말하는 ‘만물제동’과 다른 함의라는 근거를, 나카지마는 위 일화의 뒷부분에 있는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는 대목에서 찾는다. 제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꿈도 현실도 사실은 같은 것이고 장자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자라면 구태여 반드시 구별이 있다고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카지마는 이 부분이 장자의 ‘물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즉 장자의 물화는 자타의 구별을 절대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물화’를 통해 자타의 구별이 없고 자타가 융합된 만물일체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물화’라는 변화는 본래부터 쓸데가 없다”(198p)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물화에 한정해서 곽상과 견해를 같이 한다. 곽상은 이렇게 말한다. “각몽(覺夢)의 구분은 사생(死生)의 구분과 다르지 않다. 지금 스스로 즐겁고 유쾌한 것은 그 구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구분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그러니까 그 구분이 있음으로 해서 장주는 나비로, 나비는 장주로 변화되면서 즐거움과 유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물화라는 역동이 없고서는 장자는 끝내 나비를 알 수 없고, 꿈과 깸도 서로 알 수 없으며 죽음과 삶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물화의 즐거움은 마치 전지적 관점처럼 멀리 떨어져 ‘무차별하게’ 조망하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장자는 장자로서, 나비는 나비로서 각각 절대적인 자기충족의 존재로 있다가 기꺼이 변화에 참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이때 세계도 함께 변용한다. 여기에서 ‘물화’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사물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세계 자체의 변화까지 추동한다.(203p)

 

장자와 혜시

그렇다면 장자의 주요 사상인 ‘만물제동’과 ‘물화’는 서로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혜시를 불러낸다.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혜시의 제동(齊同)론에서는 모든 구별, 심지어 시공간적인 구별도 없다. 말장난 같은 혜시의 “오늘 월나라로 떠나서 어제 도착했다”는 말도 그의 논리라면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장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제물론」에서 가장 어려운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도의 지도리(道樞)’편을 읽어보면 장자가 말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것에서 보면 저것이 저것인 줄 모르고, 이것에서 봐야 저것이 저것인 줄 알게 됩니다. 저것은 이것에 의해, 이것은 저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에 의해 성립한다는 세상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좋은 것이 있기에 싫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기에 좋은 것이 있다는 주장은 옳고 그름의 근거를 상대에게서 찾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러한 주장에 따르지 않고, 자연의 이치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모두 긍정(因是)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에서는 저것은 이것이고 이것이 저것입니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是非)이고 이것도 하나의 시비입니다. 과연 이것과 저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이렇게 옳고 그름의 상대적 구별을 넘어서는 것을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합니다. 지도리가 원의 중심이 되면 끝없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옳은 것도 끝없는 변화의 하나요, 그른 것도 끝없는 변화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장자』내편, <제물론(齊物論)>)

 

“장자는 ‘이것’이라는 가깝고 곁에 있는 것 혹은 이 세계에 뿌리내리는 것을 우선 중시한다. 그 다음에 ‘이것’이 ‘저것’으로 변용되고, ‘저것’이 또 하나의 ‘이것’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태를 보려 한다.”(211p) 그것은 마치 회전축이 원의 중심에 놓일 때 무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이것’은 ‘저것’과 짝을 이루지 않고 무한하게 된다. “요컨대 장자의 제동은 ‘이것’과 ‘저것’이 절대적으로 구별된 뒤에, ‘이것’이 ‘저것’으로 변용되는 사태(물화)를 기술하기 위한 개념이다.” 혜시의 제동이 초월의 관점이라면, 장자는 이것을 변용시켜 저것으로 향하는 ‘물화’에 집중하며 제동을 그 연장선 위에 놓는, 하나의 사태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까

장자가 말하는 ‘타자성’에 대한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앞에서 인용한 ‘도의 지도리’편에는 이것과 저것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카지마는 물화에서 ‘이것’이라는 가깝고 곁에 있는 이 세계에 충실한 것을 우선시한 다음, 이것이 저것으로 변용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용된 ‘나’와 ‘이 세계’는 타자와 만날 수 있을까. 저자는 『장자』 「추수」편의 ‘물고기의 즐거움’을 말한 부분을 들어 설명한다.

 

장자와 혜시가 호수의 다리 위에서 노닐고 있었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피라미가 유유히 헤엄치고 다니는군.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구만!”

혜시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아는가?”

혜시가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를 알지 못하네. 그렇다면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습니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물은 것 아니겠나? 나는 그것을 호수의 다리 위에서 알았다네.”(『장자』 외편, <추수(秋水)>)

 

혜시는 타자의 경험을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의 고유한 경험뿐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한 장자의 말은 틀렸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혜시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나아가 혜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험의 공유도 불가능한데, 사람과 물고기라는, 이종(異種)간의 경험이 공유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고 말한다. 장자는 경험구조의 일반적 차이(이종간의 경험의 차이)와 개체간 경험 내용의 차이(장자와 혜시의 차이) 모두를 해명해야 하는 지경에 빠졌다. 여기까지로 보면 일단 장자의 ‘의문의 일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장자가 이 토톨로지(tautoloty)의 덫을 ‘가까움의 논리’와 ‘지각의 명증성’으로 벗어났다고 해석했다. 문장의 끝부분에 그 논리가 숨어있다. 장자는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한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물은 것’이라고 말한다. 경험이란 원리상으로 이미 장자와 혜시 사이에 어느 정도는 공유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이 경험인 것은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혜시는 정말로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형식상으로는 이해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장자는 ‘나는 그것을 호수의 다리위에서 알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호수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물고기와 가깝게 있음으로써 의심할 여지없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남는다.

나카지마는 쿠와코 도시오의 논의를 인용해 ‘신체 배치의 체험’이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쿠와코는 모든 인간과 모든 물고기 사이에 서로의 기분을 알지 못한다는 혜시의 논박에는 관심이 없다. ‘장주의 인식이 특정한 시간 속에 놓인 특수한 신체, 그 신체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 물고기와의 배치 관계’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수 다리 위에서 알았다’는 말이 그래서 중요하다. 즉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신체 배치를 가진 체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 호수 다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는 못한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매우 특수한 사태이다. 장자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호수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났고,‘물고기의 즐거움’에 수동적으로 촉발되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장자’로 변용된 것이다. 장자와 물고기가 단지 물리적으로 가까워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체험은 환경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장자와 물고기는 환경을 공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스피노자식로 말하면 물고기라는 외부 원인의 관념에 생겨나는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타자(물고기)로부터 선행하는 것이지, 주체가 지각하는 행위를 통해 능동적으로 획득하는 경험이 아니다. 수동성의 경험으로부터 내가 변용되는 것이다. 이때 이미 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된다.

많은 해석자들이 ‘물화’를 말하지만 그들은 ‘나’와 ‘이 세계’가 새롭게 편성되더라도 끝내 개방되지 않고 자기동일화의 문제를 넘지 못한다. 나카지마 다카히로는 장자의 타자성이 이들과의 변별점이 된다고 말한다. 나와 세계의 변용은 타자와의 가까움에서 성립하고, 그것은 타자에 열려 있다. 그것은 자기 동일성의 해방, 현해(懸解)로 가는 길을 동시에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여기에서 장자가 정말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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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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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 조회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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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스르륵
2023.09.17 | 조회 37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동은
2023.09.11 | 조회 30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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