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진고응의 『장자』읽기

여울아
2023-09-04 10:37
146

 

 

진고응의 장자읽기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유소감이 장자의 도를 절대 자유로 풀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게 장자의 도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과 별개인 “정신적 자유”이다. 정신적 자유가 절대 자유로 풀이되는 이유는 바깥 현실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의 절대성이란 무조건성, 즉 일개 사물과 달리 도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읽고쓰기 1234> 시즌1에서 저자 정용선의 해체전략이나 시즌2 유소감의 도의 성질에 대한 풀이까지 모두 장자의 도를 “도가철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장자의 도가 어떻게 절대 자유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노장철학의 대가인 진고응의 『노장신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먼저 『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을 알아보자.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태사공은 말한다. 노자가 귀하게 여긴 것은 도로(,) 허무를 추구하였고 변화에 따라 무위로 화하였으므로 지은 책의 말이 미묘하고도 알기 어렵다. 장자는 (유가의) 도덕을 흩어 논조가 방자한데 요점은 또한 자연으로 귀의하였다.” 『사기열전』 연암서가, <노자·한비열전>

 

장자는 어째서 도가철학으로 분류되었을까. 노자와 장자가 함께 묶인 그 기원을 찾아보자.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장자를 노자의 계승자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자와 장자 둘 다 은둔자로 살았다. 노자는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예를 물을 정도로 도덕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은둔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다. 장자 역시 현인이라고 유명세를 떨쳤지만 입신양명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거부했다. 한번은 초위왕이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재상의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장자는 높은 지위는 “제상의 희생 소가 되는 것”일 뿐이라며 “내 차라리 작은 도랑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놀지언정 통치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으며 내 뜻을 즐기겠다.”며, 은둔자의 삶을 자처했다. 둘째 사상적 측면에서 이들은 “무위자연”을 지향했다. 노자는 “내가 함이 없어도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하기를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장자는 이러한 노자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에 유가와 묵가를 공격한 것이라고 사마천은 풀이한다. 그에 따르면 “노자를 배우는 사람은 유학을 내치고, 유학자들은 노자를 내쳤다”고 한다.

진고응은 중국철학의 “도가 중심설”을 주장한 철학자이다. 그는 노자를 중국 최초의 철학자라고 주장하며, 사마천의 기록을 근거로 노자학이 공자학보다 앞선다는 입장이다. 이는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와 상반된 주장이다. 그에게 공자와 노자의 선후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앞선 학문이 후속 학문에 영향을 주었다는 논리를 선취하기 위함이다. 진고응은 공자의 “무위이치”의 관점과 이후 제자들의 천도관이나 순자의 자연관이 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한다. 사마천이 노자와 한비를 같은 열전에 묶은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 시대 직하학궁에서 도가, 유가, 묵가, 법가, 음양가 등 각 학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그중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도가 사상이다. 그는 전국 후기 도가 학파를 장자학파와 직하 도가로 구분함으로써, 도가 사상이 장자뿐 아니라 제자학파 전반에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한다.

 

 

노자의 도와 장자의 도는 어떻게 다른가

 

“도는 진실로 존재하지만, 작위나 형체가 없다. 그것은 전할 수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고, 체득할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다.”『노장신론』 소나무, <대종사>

 

진고응은 노자의 도와 장자의 도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노자의 도에는 본체론과 우주론의 의미가 비교적 강하고, 장자에는 그것을 정신의 경지로 바꾸어놓았다.(325p)”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 본체로서의 도가 장자에 와서는 정신의 경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장자』에는 본체로서의 도, 다시 말해서 만물의 근원이자 자연법칙으로서의 도를 묘사하는 장면이 많다. 다만 노자의 도와 달리, 장자의 도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체득”할 수 있다. 그러나 형체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정의하지도 못하고 체득하는 과정을 명확히 밝힐 수도 없다. 저자는 이러한 체득 과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자가 도의 경지를 획득할 수 있는 “내적 경험”을 중시했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장자의 주요 관심사는 “몸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하고 개체의 정신적인 공간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354p)”이기 때문이다. 비록 신체는 제한적이지만 수양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내면에는 한계가 없다는 의미이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육기의 변화를 파악하여 무궁한 경지에서 노닌다(遊).”

“구름의 기운을 타고, 나는 용을 부리며, 사해의 밖에서 노닌다(遊).” 『노장신론』 <소요유>

 

장자의 사상체계에서 “유(遊)”는 바로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진고응은 도의 경지란 “물질세계의 구속을 벗어나 정신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고 더 높고 더 넓은 정신적 세계로 상승한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최고의 정신적 경지에 오른 사람은 정신 공간을 무한히 확장하여 우주와 일체감을 통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순간 인간은 도와 혼연일체를 경험한다. 그러나 나는 지난 시즌2에서 유소감이 세계 본체로서의 도와 최고 인식으로서의 도를 구별하고 이를 혼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발표했다. 진고응이 도와 만물과의 관계성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데 비해, 유소감은 도의 성질을 세분화하고자 했다. 가령 도의 절대성이란 만물을 낳는 도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유소감은 사람들이 본체로서의 도와 인식론적인 도를 혼동하기 때문에 “도의 경지에 오른 인간(지인)이 땅을 낳고 하늘을 낳는다”는 사이비 주장이 생겨난다고 경고했다. 그가 이러한 혼동을 경고한 이유는 진고응이 본체로서의 도와 정신활동으로서의 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장자의 도는 어떻게 절대 자유가 되었나

 

“아무런 가치 구분도 없는 고요한 마을의 드넓은 들판(무하유지향), 그 주변을 아무런 목적 없이 자족하며 거닌다. 소요하다가, 편안히 나무 아래 몸을 눕힌다. 도끼의 위협이 없으며, 사물의 침해함이 없다. 쓰임이 없으니, 어찌 재앙을 받겠는가?” 『노장신론』 <소요유>

 

진고응은 “장자가 말하는 자유는 모두 정치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주로 정신적인 의미에서”라고 말한다. 시공간의 제한과 예교의 속박이 있는 현실에서 자유라 함은 스스로 자신을 묶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요유>편 “무하유지향”은 광활한 내면세계 혹은 드넓은 정신 공간으로 풀이된다. 현실적인 삶을 살면서도 수양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인 삶의 영역을 열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노장신론』에서 절대자유라는 말 대신 대자유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지만 뜻풀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도와 인간의 관계적 측면에서, 신체는 그 한계성 때문에 도와 합일할 수 없지만, 정신은 무한하게 확충할 수 있기 때문에 도의 자유성, 무한성, 절대성에 이를 수 있다. 그에게 정신적 자유란 도를 체득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셈이다.

 

나는 올 한해 <읽고쓰기 1234>를 통해 “장자가 정치(삶)와 무관한 정신세계를 추종했을까”라고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자 했다. 무엇보다 “절대 자유”라는 말이 내게 불편했던 이유는 장자가 현실세계와 무관한 정신적 자유만을 추구했다는 풀이에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즌1에서는 <소요유>편을 왜 절대 자유라고 읽는가를 질문했고, 시즌2에서는 장자의 도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세 번째 『노장신론』에 이르러서야 도가철학의 기원을 묻게 되었다.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우주 만물을 낳는 노자의 도는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갖는 장자의 도에 영향을 주었고, 이는 실존주의 등 서양철학과 만나면서 절대 자유로 불리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절대 자유란 진고응을 포함한 도가철학자들이 『장자』 <소요유>편을 읽는 하나의 독법이다. 특히 입신양명을 거부하고 은둔자로 살았다는 사마천의 장자에 대한 평가에 힘입어 그의 자유가 정치와 무관하다는 해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가철학과 달리 장자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없었을까? 시즌4에서는 “과연 유학자들은 장자를 어떻게 읽었을까”를 질문하고, 조선시대 유학자 『박세당의 장자읽기』를 중점으로 이들에게 장자의 도란 어떠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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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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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 조회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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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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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9.17 | 조회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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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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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3.09.11 | 조회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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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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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3.09.11 | 조회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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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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