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도라지
2023-09-04 08:48
149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2009년 『기후위기에 대한 불교적 응답(A Buddhist Reponse to the Clomate Emergency)』이라는 책을 저자가 공동 편집했는데 무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비구 보디, 조애너 메이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기고한 좋은 글들이 실렸음에도 이 책은 불교계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최근 몇 년 ‘에코다르마’에 대한 관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강연은 참가자 수가 너무 적어 취소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저자는 일부 다른 불교기관들은 재정적으로 번창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주로 개인들이 쉬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인기 높은 명상센터들이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예를 사회적 참여불교의 실패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현재 미국 불교의 양상일 뿐,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점은 교도소 활동, 호스피스 케어, 노숙자 식당 운영 등, 불교인들의 사회적 봉사다. 우리는 고통받는 노숙자를 만났을 때 자비롭게 대응하지만 이 많은 노숙자를 양산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해서도 너무 자비롭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할 개인적 행동은 많다. 하이브리드나 전기 자동차를 구입한다든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채식을 하는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 말이다. 이러한 ‘녹색소비’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변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저자는 이제 이렇게 노력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실천 후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2500년의 불교 역사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를 취하면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됐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진화한 불교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각각 강조하는 가르침과 수행 전통이 다름은 피해 갈 수 없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서로 가장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물을 때, 불교적 전통에서 생태위기를 극복할 최상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통적인 아시아 불교, 특히 테라바다(상좌부)의 가르침과 수행의 목적은 고통스러운 윤회를 벗어나는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불교, 특히 불교 심리치료와 대다수의 마음챙김(mindfulness) 운동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세계와 조화롭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개인의 마음이 문제이지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생을 벗어나는 데 목표를 둔 내세적 불교와 우리를 이 세계에 적응하여 더 잘 살도록 돕는 현대 불교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 다 현세의 문제에 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현세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불교의 ‘해결책’을 찾는다. 내면(명상)과 외형(행동주의)의 두 가지 수행이 조화롭게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두 불교의 전통에서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명상은 자아의식을 해체하여 자아를 구성하는 생각, 느낌, 행위 등 습관적인 패턴에 변화를 주고 일상을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최종적으로 육체가 소멸할 때의 ‘반열반’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열반’의 토대가 되는 ‘연기법’을 가져올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게 하여 지구와 관계 맺는 행동 방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저자의 고민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 전통, 그리고 대승의 ‘보살(보디사트바)’이라는 말로 불교 역사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 아닐까? ‘보살’이란 ‘보리(보디)’와 ‘살타(사트바)’의 합성어. 이때 ‘보리’란 연기적 존재(空)를 이해하는 관점 곧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을 뜻한다. ‘보살’이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보리’ 즉 깨달음에 근거한 행동양식을 실천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저자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미국 불교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해결하고 현시점에서 참여불교가 가져야 할 생태위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명상수행과 테라바다 전통에서, ‘에코다르마’와 ‘생태 보살’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저자는 보살의 길에 대한 현대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며 사회제도나 구조로 인해 쌓여버린 집단적 고통에 적합한 21세기형 보살을 질문한 것이다.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제 새로운 보살도로 확장되어 사회적으로 참여적인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연기법의 상호의존성과 비폭력을 강조하는 불교는 분노가 아닌 사랑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기에,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는 부유하고 힘있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할 집단적인 탐욕과 분노와 무지로 제도화된 구조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껏 많은 진보적 운동을 약화시킨 이념적 다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방편을 만들어온 대승의 지혜는 지속가능한 사회운동에 필요한 창의적 상상력의 필요성을 추동할 수 있다. 

 

 

 

 

 

생태보살의 길

 

사회참여의 시대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 자기 마음의 평화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불교인들에게는 큰 진전일 것이다. 한편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따른 좌절, 분노, 우울, 피로감 등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 참여적 보살, 생태보살의 길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명상은 평정심을 지탱하는 내적 통찰을 길러주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사회적 활동가들이 자신의 심리상황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제 세상의 문제에 관한 참여는 개인의 영적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에서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통찰력과 평정심을 기르는 것으로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보살의 길을 갈수 있게 된다.

 

 

대승의 보살은 네 가지 큰 서원을 한다. 사홍서원이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중생의 수가 셀 수 없이 많더라도 나는 그들을 모두 해탈시키기를 서원합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가 있다.  서원에 필요한 실천과 성취가 실제 가능한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서원의 스케일에 먼저 압도당한다. 대체 이러한 서원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성취하기 불가능한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원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핵심이기도 하다.

 

 

어떠한 보살도 자신의 서원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그의 임무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 성취될 수 없기에 서원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새롭게 조정하는 것이다. 자아에 집착하던 일상이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관심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 그래서 더욱 명상을 통해 영적인 바탕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요구된다.

 

 

깨달음으로 인한 사회적 참여와 명상 수행을 통한 영적인 변모, 이 두 가지 수행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다. 현세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생태적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제도적인 구조의 문제까지 해결하려 노력하는 생태 보살! 크게 새롭게 느껴지는 보살의 정의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지금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영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에코다르마’나 ‘생태 보살’이 어떤 특별한 개념에 한정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반드시 불교적 언어만으로 표현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도래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예견된 미래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 아닐까.  최근에 나는 그들을 전장연에서 보았고, 영화 ‘수라’에서 보았다. 그리고 종종 문탁 안에서도 본다.

 

 

문득 친구들과 함께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는 기회도 종종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어느 길 위에서 함께 손잡을 친구들이 많아질 것만 같다.

댓글 2
  • 2023-09-04 17:51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지구를 위한 일을 하기, 결국 지구를 위한 일도 꼭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없이 할 수 있는 만큼 기쁘게 하기~ 왠지 마음 가볍게 만드는 도라지님의 보살글이네요.

  • 2023-09-29 11:50

    뒤늦게 잘 읽고 갑니다.
    불알못이라 다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무슨 메세지를 전하는지는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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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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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3.09.18 | 조회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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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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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9.17 | 조회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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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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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3.09.11 | 조회 30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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