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양생이다> (3회) - 도전, 백만 원 벌기

기린
2020-09-12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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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기롭게 무모한 도전을

 

공동체로 출근하는 일상에서도 일주일에 이틀 오후와 토요일에는 학원 일을 계속했다. 당시 학원 일로 백이십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걸로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지만 두 가지 일을 병행하려니 차츰 몸이 힘들어졌다. 학이당에서 하는 공부의 양은 점점 늘어나는데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학원이 인천에 있어서 일주일에 이틀을 120키로씩 운전 하는 일도 부담스러웠다. 학원 일을 그만둘 핑계는 점점 늘어났지만 공동체 안에서 먹고 살만한 일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도 난 일단 학원 일을 접고 문탁 안에서 백만 원을 벌어 보겠다고 선언했다. 친구들은 나의 선언에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새로운 실험이 공동체에 주는 활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선언을 하게 된 데는 매달 이십만 원 정도의 임대비용으로 국민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주거 상황도 한 몫을 했다. 2년마다 오르는 집세를 감당해야하는 형편이었다면 아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문탁네트워크 홈피 대문에 달려있던 ‘자본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삶’ 같은 문구도 내 마음을 들썩였다.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 삶이 고달픈 것은 다 그 탓이라고 핑계만 대다가 뭔가 ‘도전’해 볼만한 거리가 생긴 설렘이었달까.

 

당시 마을 경제 세미나를 했던 친구들이 마을 작업장을 만들었다. 화장품도 만들고 정기적으로 반찬을 생산하는 찬방도 있었다. 세미나를 통해 익힌 것들을 실제로 실천해보자는 활기찬 분위기에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자누리 화장품에 일꾼을 신청했다. 더치커피 사업단을 꾸렸던 친구가 개인 사정으로 못하게 되자, 날더러 더치커피를 생산해보라는 제안도 받았다. 커피에 대해 일도 모르는 내가? 다 알고 시작하는 일이 어디 있냐고 밀어 붙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커피 사업단까지 맡게 되었다.

 

2. 욕망과 능력의 간극에서

 

나는 공동체에 오기 전에도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이십대에는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전화를 해서 위생용품을 파는 판촉사원 일을 했다. 친구의 소개로 알루미늄 현관문을 영업 설치하는 영업소의 경리일도 했고, 육 개월 정도 반도체를 생산하는 외국 기업의 생산직 일도 했었다. 삼십 대에 학원 강사를 하면서도 언젠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드라마 작가가 되면 이런 경험들이 맛깔스런 대사를 쓰는 밑천이 될 거라고 나를 다독이곤 했다. 기승전 ‘드라마 작가’ 꿈만 먹고 살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게 철학의 첫 번째 질문이에요.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 솟아납니다. 거의 동시적으로.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지?(중략)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중략)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즉 윤리학이에요. 윤리의 기준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요. 전자를 욕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능력이죠. 욕망과 능력이 딱 맞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어긋나죠.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정반대인 경우도 있고요.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갈등과 괴로움, 번뇌를 겪습니다.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243쪽 /북드라망』

 

공동체에 접속하기 전 나의 상태가 꼭 저랬다.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는 아주 오래된 질문인데 그게 철학하는 질문이었던 셈이다. 욕망과 능력의 간극,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좀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끊어낼 수 없어서 삶의 바닥을 긁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욕망이나 능력을 운운할 틈도 없이 ‘백일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도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어쩌면 공동체에서 백만 원을 벌어보겠다는 뜻은 그 가능성이 일으킨 욕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도 간극은 발생했다.

 

커피에 대해 일도 모르면서 커피 생산자가 되고 보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우선 더치커피를 생산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이것도 엄연한 마을 작업장의 사업이었기 때문에 수입과 지출로 수지타산을 맞추는 일도 포함되었다. 커피 몇 병을 팔아야 적자가 나지 않는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자니, 한 잔 천 원인 커피를 정량보다 많이 따르는 걸 보노라면 저절로 그의 뒤통수를 째려보게 되었다. 커피를 생산하는 일은 점차 익숙해졌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공동체에서의 생산이란 원두 구입부터 포장 용기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다른’ 가치를 모색해야 했다. 시중에서 파는 커피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의 무능이 도마 위에 오르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동양 고전을 원문으로 읽는 공부를 했으니 그걸로 밥도 벌어보자는 활동에도 합류했다. 고전을 원문으로 읽기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기획안을 검토한 친구들의 첫 반응은 너무 ‘올드하다’였다. 학부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원문을 주로해서는 아이들에게 재미를 어필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디서나 그 놈의 재미가 문제였다. 기획을 수정하면서 어쨌든 <중등고전학교>를 열었다. 『논어』 『맹자』 『사기』 『장자』 등을 청소년들과 함께 읽고 쓰고 연극도 하고 방학 때는 암송 캠프도 열었다. 첫 해에 신청했던 중1 녀석들 중 셋은 고1이 될 때까지 함께 공부하면서 지지고 볶았다. 시즌이 바뀔 때마다 녀석들은 ‘의리’를 지켰다고 큰 소리를 쳤다.

 

 시간이 흐르면서 커피사업단은 적자가 쌓여갔고 고전을 읽으러 오는 청소년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매달 운영회의에서 사업단 활동보고 등을 통해 그 과정이 공유되었다. 어느 때는 내가 무능해서 인 것 같아 주눅이 들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내 탓이 아니라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일의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리를 두고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자 예전처럼 나의 욕망과 능력 사이의 간극에서 허우적댈 핑계가 없어졌다. 동시에 내가 놓친 것을 점검하면서 다음 활동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곧 내가 하는 일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3. 친구들의 충고를 곱씹으며

 

일을 하면서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당장 백만 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벌이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자누리 사업단의 일꾼으로 품삯을 받고 웹진 활동 등의 활동비로도 백만 원을 버는 일은 요원했다. 매달 들어가는 돈을 충당하느라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점점 불안해졌고 다시 학원 일을 알아봐야 하나 망설이게 되었다.

 

그 즈음 문탁샘이 공동체밥상을 운영하는 주방지기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공동밥상이 차려지도록 밥당번을 조직하고 밥상의 식재료 등을 챙기는 일 등을 주로 하는 활동이었다. 식구들 밥상 차리는 일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엄두조차 내 본적이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공동밥상이라니 이건 집에서 차리는 밥상과 차원이 달랐다. 주방에 필요한 어떤 것들은 선물로 해결하고 또 어떤 것들은 장을 봐야 했다. 공부를 하러 오는 회원들에게 밥당번의 의미를 알리고 당번을 하도록 권하는 일도 중요했다. 공동체의 일상을 유지하는 동력으로 활약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일은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 맡아야 하는 일이지 나 같은 초심자는 못하는 일이라고 사양했다. 공동체에서 벌어먹고 살겠다면서 이렇게 가리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드디어 자본주의 생산관계로부터 독립과 도주를 선언한 게으르니의 첫 작업날입니다.' -자누리의 후기에 오른 글중에서 찾음>

 

  친구들은 내가 너무 잘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처음에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왜 문제인지 납득이 잘 안됐다. 하지만 계속 상황이 꼬이자 내가 반복하고 있는 행동이 보였다. 공동체 안에서 해 볼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우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부터 따지고 있었다. 그건 곧 잘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겪는 것이 아니라, 잘 하고 싶다는 자의식이 먼저 발동해서 나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냥 시작해 볼 수도 있을 텐데 그게 잘 안 됐다. 분별을 허무는 공부를 한다면서 막상 일 앞에서는 분별이 작렬했다. 그러는 사이 무모하게 도전했던 기운도 사그라지고 불안이 되살아났다.

 

 사실 공동체에 오기 전에 내 삶이 한심한 것은 이 세상 탓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내세울만한 학력도 빽이 될 만한 집안도 볼만한 외모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루저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게 된다면 나도 제 몫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그러다 공동체에 와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음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며 일에 나아가는 데는 여전히 한심했다. 머리는 새로운 앎으로 채워질지언정 몸은 좀처럼 민첩해지지 못하고 버퍼링이 걸렸다. 설령 일을 하더라도 잘 해야 한다는 자의식 때문에 몸에 힘까지 들어가서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계속 추동했다. 공부의 밀도를 더 높이라는 피드백을 서슴지 않았고, 외부에서 강의 의뢰가 들어오면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나도 일단 부딪쳐 보자고 마음을 바꾸었다. 외부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맹자』를 처음 강의하던 날은 거의 ‘원맨쇼’였다. 시선은 불안하게 공중을 떠돌면서 목소리는 공간에 쩌렁쩌렁 울렸고 말은 너무 빨라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한 시간 강의가 끝났을 때 정신이 멍해졌던 순간이 아직도 선하다. 그런 시간을 경험하면서 차츰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명확해졌고 무엇을 더 채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냥 시작해 보는 마음으로 나서기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한 번 두 번 시도를 거듭하면서 잘하고 못하고의 전제부터 따지는 습에서도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친구들의 충고나 추동이 없었다면 이나마 라도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4. 나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

 

 그렇게 친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내가 마주치는 일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었다. 결국 <중등고전학교>도 문을 닫았고 도서관 등의 외부 강의가 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원 수업을 하면서 마련했던 경차도 팔았다. 5년을 납입했던 보험을 해약해서 마이너스 통장을 정리했다. 늘 간당간당하는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그렇다고 내 삶 전체가 빠듯했냐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동양 고전 공부를 내 전공으로 삼겠다는 뜻을 가상하게 여긴 우응순(나의 고전공부 싸부님)샘과 문탁샘이 매달 장학금을 챙겨 주셨다. 학교 다닐 때도 못 받아본 장학금이었다. 검증할 성적도 공부의 결과를 따지지도 않는 장학금이었다. 그 장학금은 때로는 생활비로 충당되었고, 또 어느 해는 중국으로 떠났던 수학여행 경비가 되기도 했다. 2017년에는 그리스로 수학여행을 떠날 기회가 있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선뜻 마음을 내지 못했다. 어느 날 문탁샘이 부르더니 그리스 가서 많이 보고 배우고 오라며 여행 경비를 챙겨 주셨다. 너무 뜻밖이라 어쩔 줄을 몰랐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난생 처음 친구들과 보름 동안이나 그리스를 싸돌아다닐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덕분에 오래 오래 추억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알음알음으로 나의 살림살이를 보살피는 친구들 덕에 다달이 백만 원을 못 버는 빠듯한 벌이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나의 도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올해 나는 처음으로 매달 백만 원을 따박따박 벌게 되었다. 공동체 밥상의 매니저 활동으로 오십 만원, 인문약방 활동으로 오십 만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변수 때문에 외부 강의가 전무해진 상황이라 이 결과가 더 소중하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나의 도전은 백만 원으로 소박하게 살기나 자본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험 뿐 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이었고 끊임없이 ‘나’라는 자의식이 ‘시련’을 겪는 시간이었다. 그로 인해 점점 변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시련을 감당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나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댓글 7
  • 2020-09-12 08:51

    시련의 여주인공이라! 드라마네^^

  • 2020-09-13 11:43

    드라마보다 더 잼있고 감동까지 있는...
    기린샘표 드라마
    화이팅^^

    • 2020-09-14 23:21

      기린과 '샘표'로 보이네요. ㅋ
      추석 특집으로 은방울 키친에서 맛간장 한다던데 한 병 사야겠어요~
      인문약방에서는 쌍화탕을 전담하고 계시죠.
      기린샘표 쌍화탕도 많이 사주세요~~

  • 2020-09-13 13:33

    잼있다 ~!!ㅎㅎㅎ

  • 2020-09-13 21:06

    올~~~~ 성공!!!
    기린샘의 도전에 항상 화이팅! 응원합니다^^

  • 2020-09-13 21:40

    ㅎㅎ 재밌어요~
    기린샘의 도전과 변화 응원할게요~~

  • 2020-09-15 09:41

    기린샘이 은방을키친 매니저를 하고 있을때부터 뵈어서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새삼 놀라요~~
    현재진행형, 도전~ 늘 응원합니다.
    그리고 기린샘표 쌍화탕~ 아주 맛나요~저의 잇템입니다^^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    문탁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문탁샘이 청소년인 악어떼들을 데리고 직업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프로그램 전 시간이 비는 틈에 악어떼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음 프로그램으로 뭘 하고 싶은지 묻는데 녀석들이 도통 대답을 안 했다. 답답해진 나의 음성이 커졌던지 지나가던 문탁샘은 “애들이랑 얘기 좀 해 보랬더니 싸우고 있냐?”고 했다. 싸우기까지야 싶었지만 여튼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다 어린이 서당에서 수업을 맡은 후, 문탁의 청소년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 운영하는 ‘주권없는 학교’(이하 주학) 활동까지 겸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공동체에 있다 보면 적성운운 할 수 없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주학은 문탁에서 “학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유익한 배움의 장을 함께 만드는 실험”을 하려는 활동 단위였다. 당시 청소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친구들로 구성되었다. 현재 학교에서 연령별로 나누는 제도를 넘고, 청소년은 공부 어른은 일이라는 분할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일을 함께 경험하는 활동을 비전으로 삼았다. 동시에 흔히 좋은 교육이라는 표상에 맞서 “사심 가득하고 당파성이 분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공부”를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 주학 프로그램은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학생기록부에 쓸 수 있는 이력을 원하는 학생들이 주로 신청했다. 매년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데 그들은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주중에 그들이 모여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친구도 만들고 자기 삶의...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    문탁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문탁샘이 청소년인 악어떼들을 데리고 직업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프로그램 전 시간이 비는 틈에 악어떼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음 프로그램으로 뭘 하고 싶은지 묻는데 녀석들이 도통 대답을 안 했다. 답답해진 나의 음성이 커졌던지 지나가던 문탁샘은 “애들이랑 얘기 좀 해 보랬더니 싸우고 있냐?”고 했다. 싸우기까지야 싶었지만 여튼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다 어린이 서당에서 수업을 맡은 후, 문탁의 청소년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 운영하는 ‘주권없는 학교’(이하 주학) 활동까지 겸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공동체에 있다 보면 적성운운 할 수 없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주학은 문탁에서 “학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유익한 배움의 장을 함께 만드는 실험”을 하려는 활동 단위였다. 당시 청소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친구들로 구성되었다. 현재 학교에서 연령별로 나누는 제도를 넘고, 청소년은 공부 어른은 일이라는 분할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일을 함께 경험하는 활동을 비전으로 삼았다. 동시에 흔히 좋은 교육이라는 표상에 맞서 “사심 가득하고 당파성이 분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공부”를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 주학 프로그램은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학생기록부에 쓸 수 있는 이력을 원하는 학생들이 주로 신청했다. 매년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데 그들은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주중에 그들이 모여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친구도 만들고 자기 삶의...
기린
2020.10.31 | 조회 576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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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0.09.12 | 조회 37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공부 좀 했다    나는 공부 ‘좀’ 하는 학생이었다. 우리 집에서 사남매 중에 내가 상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조회시간에 교단 앞에 불려 나가 상도 받아서 동네에서도 소문 좀 났었다. 그래서인가 살면서 내가 공부를 좀 한다는 자신감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성적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고 당시에 학력고사 점수로 응시한 대학은 모두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1년짜리 기획 세미나 ‘내공프로젝트’ 모집 공지가 올라왔을 때 은근 두근거렸다. 기왕 공동체로 출근까지 하게 된 마당에 강도 높은 공부로 내공을 키울 수 있다니 출근길이 새삼 보람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공 프로젝트는 이문서당과 학이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문서당에서는 원문강독으로 『논어』를 읽고 학이당은 중국고대사상사 세미나와 글쓰기였다. 일주일에 이틀을 꼬박 공부하는데 활용해야 했다. 『논어』를 원전으로 강독해주시는 우샘의 음성은 무거운 경전의 말씀도 편안하게 들리는 힘이 있었다. 강독을 하시다 “우리 아들 키울 때” 라시며 교육에 유용한 꿀팁이라도 전수해주시면 동학들의 호응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전을 강독하시면서 우리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주석을 짚어 주실 때는 오랜 경륜의 내공이 느껴졌다.   학이당은 1년 동안 고대의 중국 사상 중 유학을 중심으로 천 년 간의 사유를 다루는 커리큘럼으로 짜져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없어서인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첫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읽는다고 읽는데 안 읽혔다. 우리가 너무 난감해하자 문탁샘은 배경지식을 부족한가 싶어서 『십팔사략』을 봐라, 『사기』를 읽자며 계속 참고 도서를 제시했다....
공부 좀 했다    나는 공부 ‘좀’ 하는 학생이었다. 우리 집에서 사남매 중에 내가 상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조회시간에 교단 앞에 불려 나가 상도 받아서 동네에서도 소문 좀 났었다. 그래서인가 살면서 내가 공부를 좀 한다는 자신감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성적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고 당시에 학력고사 점수로 응시한 대학은 모두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1년짜리 기획 세미나 ‘내공프로젝트’ 모집 공지가 올라왔을 때 은근 두근거렸다. 기왕 공동체로 출근까지 하게 된 마당에 강도 높은 공부로 내공을 키울 수 있다니 출근길이 새삼 보람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공 프로젝트는 이문서당과 학이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문서당에서는 원문강독으로 『논어』를 읽고 학이당은 중국고대사상사 세미나와 글쓰기였다. 일주일에 이틀을 꼬박 공부하는데 활용해야 했다. 『논어』를 원전으로 강독해주시는 우샘의 음성은 무거운 경전의 말씀도 편안하게 들리는 힘이 있었다. 강독을 하시다 “우리 아들 키울 때” 라시며 교육에 유용한 꿀팁이라도 전수해주시면 동학들의 호응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전을 강독하시면서 우리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주석을 짚어 주실 때는 오랜 경륜의 내공이 느껴졌다.   학이당은 1년 동안 고대의 중국 사상 중 유학을 중심으로 천 년 간의 사유를 다루는 커리큘럼으로 짜져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없어서인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첫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읽는다고 읽는데 안 읽혔다. 우리가 너무 난감해하자 문탁샘은 배경지식을 부족한가 싶어서 『십팔사략』을 봐라, 『사기』를 읽자며 계속 참고 도서를 제시했다....
기린
2020.06.24 | 조회 640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설명하기엔 애매한     나는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나이는 오십이 넘었는데 시집도 못 갔지 안정된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문탁에서 학생들과 수업도 한다는 얘기로 미루어 예전에 다녔던 학원 같은데 이겠거니 생각하신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을 때 어머니는 학원에서 월급은 주냐고 걱정하는 전화를 하셨다. 학원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는 뭐래니 라는 표정이다.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족은 물론 주변 친구들에게도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공동체 관련 기사도 열심히 읽었고 그와 관련한 책도 꾸준히 사서 읽었다. 새해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때 소개된 공동체 방문해보기가 빠지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살자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럴 때 떠올린 공동체의 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간다는 정도였다. 책을 통해 문탁네트워크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런’ 공동체를 실제로 경험해 본다는 생각에 좀 설렜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와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맞닥뜨리는 상황들도 낯설어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처음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해서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렸던 ‘그런’ 공동체의 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뜻이 맞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래서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살아갈수록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설명하기엔 애매한     나는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나이는 오십이 넘었는데 시집도 못 갔지 안정된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문탁에서 학생들과 수업도 한다는 얘기로 미루어 예전에 다녔던 학원 같은데 이겠거니 생각하신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을 때 어머니는 학원에서 월급은 주냐고 걱정하는 전화를 하셨다. 학원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는 뭐래니 라는 표정이다.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족은 물론 주변 친구들에게도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공동체 관련 기사도 열심히 읽었고 그와 관련한 책도 꾸준히 사서 읽었다. 새해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때 소개된 공동체 방문해보기가 빠지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살자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럴 때 떠올린 공동체의 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간다는 정도였다. 책을 통해 문탁네트워크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런’ 공동체를 실제로 경험해 본다는 생각에 좀 설렜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와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맞닥뜨리는 상황들도 낯설어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처음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해서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렸던 ‘그런’ 공동체의 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뜻이 맞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래서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살아갈수록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기린
2020.05.13 | 조회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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