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도라지
2023-11-05 22:15
366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문선희,「이름보다 오래된」을 읽고
알지도 못하면서
반촌(半村) 생활을 하면서 관계 맺게 된 비인간 동물들은 도처에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양이, 쥐, 멧돼지, 고라니, 뱀, 계곡의 물살이, 그리고 각종 곤충들. 그들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편하고 두려운 어떤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잘 지내보자는 화해의 마음을 내어본 적은 없다. 내가 시도하고 궁금했던 것은 그들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없애는 방법. 그나마 피하는 정도면 평화롭다. 가끔은 생포하거나 죽이는 방법들도 궁리했다. 이들은 나의 건강을 위협하며 농사를 어렵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뱀을 쫓기 위해 떠돌이 산속 고양이들을 사료로 유인하여 우리 집 근처에 살도록 하고, 집 둘레는 백반으로 결계를 쳤다. 불청객들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살충제는 언제든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이 녀석들은 번갈아 가며 우리 살림과 밭작물과 과실수들에 큰 해를 끼쳤다. 특히 올해는 고라니가 그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라니는 해마다 빌런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잔잔하게 우리의 농사를 방해해왔다. 나보다 더 콩잎에 환장하는 고라니 때문에 콩 농사는 반촌 첫해부터 포기했다. 녀석들은 녹즙 해먹을 기대로 사다 심은 비싼 와송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버리기도 했다. 고라니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쳐도 허술한 구석을 용케 찾아내고 들어와 연한 순들을 다 잘라먹었다. 덕분에 올해 고구마는 한 개도 캐지 못했고 고구마 울타리만 휑하게 남았다.
이 책은 주간지의 신간안내를 통해 접했다. 고라니의 사진과 그에 대한 에세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왜 하필 고라니지? 작가가 도시인의 시선으로 고라니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작업을 한 건 아닐까?’ 올해 고라니가 우리 밭에 끼친 영향력이 워낙 컸기에 그런 의심이 제일 먼저 들었다. 반면 내가 고라니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지 있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고라니에 대해 알아본 것이 하나 있었다면 깊은 밤 산속에서 나는 이상한 울음소리를 듣고 그것이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맞는지 검색해 본 것이 다였다.
고라니의 얼굴에 눈, 코, 입, 귀가 생겼다.
내가 고라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책의 표지를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표지에는 고라니의 얼굴이 아주 크게 있었는데 송곳니를 가진 고라니의 얼굴이었다. 수컷 고라니는 송곳니가 발달했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페이지를 넘기면 몸통은 생략하고 얼굴만 커다랗게 강조한 고라니의 초상들이 이어진다. 고라니에게도 당연히 눈,코,입,귀가 있었을 터인데 나는 그들의 눈,코,입,귀를 보고 놀랐다.
자연에서 고라니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있을까? 인간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라니는 달아났을 것이며, 무기가 없는 인간이라면 그 자리에 얼어붙었을 것이다. 관찰하기 힘든 것은 그렇다 치고 고라니의 얼굴이 궁금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인간이 안면 근육을 통해 시각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 익숙한 동물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어떤 존재의 얼굴을 모른다는 건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며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과 같다. 반면 얼굴을 알면 이제 그를 외면하기 힘들어진다. 오직 언어로만 명명된 존재는 없다. 실체가 없는 대상과 단 한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한 대상은 그 전과 같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그런 마음의 기저로 고라니의 얼굴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닭과 돼지와 소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듯.
저자인 사진작가 문선희는 10년간 200여 마리의 고라니를 만나 50여 점의 고라니 초상 사진을 완성했다. 사진을 통해 고라니라는 종의 보편성과 각 개체들의 특수성이 전달된다. 어떤 고라니의 눈은 웃고 있었다. 코가 반질반질한 고라니, 호기심이 가득한 입모양을 한 고라니, 귀는 저마다 다 다른 모양으로 활짝 펼쳐져 있다. 저자는 보는 사람들이 오직 고라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경과 컬러를 지웠고 몸통도 과감히 생략했다. 홀로서기를 할 준비가 되기 전에 어미와 헤어져야 했던 새끼 고라니들의 초상은 졸업 앨범 형식으로 구성했다. 획일적인 타원형의 틀은 새끼 고라니들의 고유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가 되어주었다.
책 속의 고라니들은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었다. 모두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인 귀한 생명들. 고라니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나에겐 큰 정신적 환기이고 각성이며 충격이었다. 이제 고라니는 더 이상 ‘고라니’라는 이름 석 자로 뭉뚱그려진 존재가 아니게 된 것 같았다.
유해 야생동물이라는 주홍글씨
사슴과의 고라니는 몸 전체 길이가 80~100센티미터, 몸높이는 약 55센티미터, 몸무게는 15~20 킬로그램 정도이다. 고라니는 먼 섬을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에 고루 살고 있다. 흔히 노루와 고라니를 헷갈려 하는데 수컷 노루에게는 뿔이 수컷 고라니에게는 송곳니가 있다. 수컷의 송곳니는 약 6cm나 되는데 번식기에 수컷끼리 싸울 때 쓰인다. 암컷 노루와 고라니의 구별은 그들의 엉덩이를 보면 쉽게 할 수 있다. ‘노루궁뎅이 버섯’처럼 하얗고 둥글고 보송보송한 엉덩이가 노루 엉덩이. 고라니는 잎이 넓은 풀은 대체로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길고양이처럼 자기 구역이 있는 영역동물인 고라니는 짝짓기 시즌을 제외하고는 자기 영역에서 홀로 살아간다. 어미 고라니는 새끼를 낳으면 1년간 돌보고 독립시킨다.
국제적으로 고라니는 ‘멸종 위기종’이다. 고라니가 서식하고 있는 곳은 중국 일부 지역과 우리나라. 세계 자연보전연맹은 고라니를 ‘멸종 위기종’ 적색목록 ‘취약’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고라니는 ‘유해 야생동물’이다. 야생동물이 유해하다는 것은 인명과 농작물, 가축 그리고 시설에 위해를 주어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는 뜻이다.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면 총기를 통한 포획이 가능하며 피해는 기준에 따라 보상받을 수 있다. 최근 기사를 보니 탄천에서 종종 우리 눈에 띄던 민물가마우지도 어족 고갈과 나무 고사 등을 이유로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민물가마우지 개체수 조절에 빈 둥지를 재사용하지 못하게 헐거나 공포탄을 발사해 쫓아내는 등 ‘비살생적인 방법’을 썼다면 이제는 알을 제거하거나 사살하는 등 ‘살생적인 방법’도 쓸 수 있다. 민물가마우지는 기후변화로 철새에서 텃새가 된 경우다.
‘유해 야생동물’이라는 해괴한 조합의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계속 쓰고 수용해야 하는 건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고라니 사이의 평온과 안전을 해치는 이 ‘유해한’ 일은 과연 누가 누구에게 먼저 저지른 것일까? 생명을 가진 존재에 이 말을 사용하는 순간 생명을 향한 비극적 부조리가 시작된다.
죽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흔해 ‘유해 야생동물’로 분류되어 있는 고라니가 사자, 하마, 치타, 코알라처럼 ‘멸종 위기종’이란 말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왜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라는 고라니가 우리나라에만 이토록 흔해서 천덕꾸러기가 된 것일까?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던 사슴류의 공통 조상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서 한반도로 넘어왔는데, 한반도와 중국 일부 지역의 경우 이 사슴류의 공통 조상이 진화 과정에서 분화되어 새롭게 고라니가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신생대에 매우 번성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간 포유류는 빙하기를 지나며 많이 사라졌지만 아시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빙하기의 영향이 덜하여 멸종한 생물종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당시 한반도 및 중국 남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따뜻해서 많은 동물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빙하기 때의 고라니도 굳이 다른 지역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계속 살아온 고라니는 학술적으로 한국의 토착종이다.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고라니는 농작물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고라니를 잡으면 현상금까지 준다. ‘유해 야생동물 구제사업’은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된 개체들은 포획하여 그 개체수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한다는 취지의 사업이다. 지자체들은 ‘피해 방지단’, ‘대리포획단’ 등의 이름으로 사냥꾼을 조직하기도 한다.
초식동물인 고라니가 농민의 적이 된 배경에는 인간에 의한 육식동물의 멸종이 먼저 있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의 상위 포식자가 사라진 것은 오래. 산림의 황폐화와 무분별한 포획이 주된 원인으로 모두 인간의 욕망과 안전을 위한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그 결과 초식동물은 증가했다. 또한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초식동물들과 인간 사이의 밀도가 높아지고, 거리가 좁혀지면서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 되고 말았다.
고라니를 포획하기 위한 사냥은 정주형 동물인 고라니의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또한 고라니가 좋아하는 배산임수 지형에는 리조트, 요양 시설, 골프장, 펜션, 전원주택 등이 어김없이 들어섰으며 남은 땅들은 거미줄 같은 도로들로 인해 단절되었다. 고라니들은 서식지에서 내몰려 서식하지 않던 지역까지 퍼져 나갔고 그 과정에서 로드킬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매년 발간하는 ‘야생동물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서식하는 고라니는 약 45만 마리. 공식적인 통계치로 어림잡아도 그중 절반 이상이 매년 포획과 허가된 수렵장 그리고 밀렵과 로드킬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한다.
야생동물과 생태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야생동물의 개체수, 서식과 번식의 습성에 대해 연구하고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존을 위한 해결책을 찾자고 주장한다. 또한 생태학자들은 사냥을 통한 개체수 조절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야생동물은 우리가 제거하려는 만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정 종의 개체군의 크기가 어떤 수준 이하로 줄면 유전적 다양성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매우 빠른 속도로 멸종에 이를 수 있다. 단 하나의 질병으로도 한 종이 멸종 위기까지 내몰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고라니가 절멸한다면 고라니 종은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인위적인 개체수 조절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멸종이 불러올 불가역적인 피해는 지구의 모든 생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공존의 비용
고라니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거나, 로드킬을 많이 당하는 동물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고라니를 좋아한다거나 다른 사슴과의 동물처럼 귀엽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고라니의 이웃인 나 또한 본 적도 없는 북극곰과 알바트로스가 처한 멸종 위기에는 마음이 아련했으면서 우리의 ‘고유종’이자 ‘희귀 동물’인 고라니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라니의 영역과 나의 터전이 겹친 것도 소중한 인연인데 그동안 나는 인간의 허영으로 고라니가 내가 씨 뿌린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기를 바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적당히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며칠 전 월동 시금치 밭을 고라니들이 짓밟고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 아직은 따뜻한 가을 햇볕을 받고 떡잎을 막 올리기 시작한 시금치라서 고라니의 존재에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이미 이번 1234를 위해 고라니에 대한 책을 읽은 뒤라 고라니 탓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막 작업을 끝낸 양파와 마늘 모종이었다. 땅속에 활착을 잘 해야 하는데 고라니가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리 없으니 밟고 가거나 양파 순을 먹어버리면 내년 농사도 끝장이다. 결국 나와 남편은 여느 때보다 울타리를 아주 공들여 튼튼하게 쳤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모든 음식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내가 뿌린 시금치가 다 내 것일 수 없다. 울타리로 당장 고라니는 막았겠지만 그 안에는 숱하게 많은 시금치의 포식자가 공존한다. 산과 물을 끼고 함께 살게 된 많은 생명들과 나 사이에는 앞으로도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어려운 교섭이 끝없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시선으로 보면 나는 자신의 서식지에 들어와 훌륭한 먹이를 제공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과 초식동물의 공존에는 비용이 든다. 하지만 그들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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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도라지샘과 같은 책을 만나서 반가워요!^^ 유해 동물, 생태 교란종, 익충 등으로 '자연에 이름 붙이는' 맥락을 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라니, 파리, 모기, 노린재.... 돼지.... 많은 종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가고 싶어요!
공존에는 비용이 든다!! 이걸 기억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벌레를 마주하면 익충인지 해충인지부터 검색부터 하고보는데... 고민해보아야겠네요ㅜ
고라니의 '송곳니'가 개인적으로는 '깜놀'이었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