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7회] 남자(南子)는 왜 공자를 만났을까

진달래
2022-07-26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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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자(南子)와 공자의 만남

 

공자께서 남자(위영공의 부인)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옹야,26)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부인을 부를 때는 자기 나라의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예를 들어 애강(哀姜)의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으로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남자(南子)의 자(子)는 송나라 성(姓)이다.

위(衛)나라는 『논어』에서 노(魯)나라 만큼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으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의 주유 생활 중 거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공자가 머물렀을 당시 위나라 영공은 나이가 많았다. 영공의 후비였던 남자(南子)는 노쇠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군주만큼 권력을 가진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원하는 공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벼슬을 구하는 사(士)라면 당연히 그 나라에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어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영공을 만난 것과 남자(南子)를 만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자로가 싫어했다고 하고, 거기다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공자 후대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논어』에 남은 이 한 문장은 이후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은 공자 일생에 가장 흥미로운 스캔들이 되었다.

 

영화 <공자> 중에서

 

  1. 자로가 싫어한 첫 번째 이유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주유를 하고 있는 중에 위(衛)나라에 도착하여 거백옥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위 영공에게는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일렀다. “사방의 군자들은 우리 군주와 친하게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그 부인을 만납니다. 우리 부인께서 뵙기를 원합니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부득이 가서 만났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다. 공자가 문에 들어가 북쪽을 향해 절을 하자, 부인도 휘장 안에서 답례했는데 이때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돌아와서 공자가 말했다. “나는 원래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부득이해서 만났으니 예로 답해야겠다.” 자로는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만일 잘못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反乎衛 主蘧伯玉家 靈公夫人有南子者 使人謂孔子曰 「四方之君子不辱欲與寡君為兄弟者 必見寡小君 寡小君願見」孔子辭謝 不得已而見之 夫人在絺帷中 孔子入門 北面稽首 夫人自帷中再拜,環珮玉聲璆然 孔子曰「吾鄉為弗見 見之禮答焉 」子路不說 孔子矢之曰「予所不者 天厭之天厭之」)『사기』「공자세가」

 

자로가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싫어한 이유로 가장 흔히 여기는 것은 ‘남자(南子)가 음란한 여자’였다는 것이다. 「공자세가」에서 사마천은 남자(南子)가 공자에게 만나기를 청했는데 공자가 여러 번 거절하였고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권력자에게 유세를 하기 위한 만남이라면 군주의 부인인 남자가 굳이 이렇게 여러 번 청하지도 않았을 테고, 공자 입장에서도 계속 거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공자와 남자(南子)가 만나는 장면에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環珮玉聲璆然)’는 등의 묘사와 함께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마천이 이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쓴 이유는 아마도 남자(南子)와 송조(宋朝)의  스캔들 때문일 것이다. 송조(宋朝)는 송나라의 공자로 남자(南子)가 영공과 결혼하기 이전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알려졌다. 남자(南子)는 결혼 후 영공에게 졸라서 송조를 위나라로 불러들였고,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공공연한 것이어서 송나라에서는 저잣거리에서 노래로 불려 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당신의 암퇘지로 정했는데 어찌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수퇘지를 돌려보내지 않는가.”(旣定爾婁豬 盍歸吾艾豭)

 

여기에서 암퇘지는 남자(南子)를 아름다운 수퇘지는 송조를 뜻한다. 또 송조는 춘추시대의 잘생긴 남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송나라를 지나 던 위나라 태자 괴외(蒯聵)가 이 노래를 듣고 너무 부끄러워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했다. 남자(南子)는 영공의 부인이므로 괴외에게는 새어머니인 셈이다. 그러니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괴의의 계획은 실패하고 영공에 의해서 괴외는 위나라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스캔들 속에 있던 남자(南子)를 공자가 만나는 일을 자로가 싫어했다는 것이다. 자로만 싫어했을까. 자로처럼 생각한 이후 주석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공자를 비호한다. ‘당시 군주의 부인을 만나는 것이 예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났다.’, ‘남녀가 만나지 않는 것이 예인데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것은 권도(權道)이니,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남자가 공자를 만난 것은 영공에게 도(道)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등등. 심지어 북송때 어느 주석가는 남자(南子)가 영공의 부인이 아니라 남괴라는 사람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노나라 비땅의 읍재인데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키려고 공자를 만났고, 이 때 공자가 그에게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주자(朱子)는 남자(南子)에게 “음란한 행실이 있었다(有淫行)”라고 주를 달았고 이것은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내려왔다.

 

  1. 자로가 싫어한 또 다른 이유

 

그런데 아무리 공자가 당시 유명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공자세가」에 나온 대로 남자(南子)가 굳이 공자와의 만남을 여러 번 청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보니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에 나오는 해석이 눈에 띠었다. 다산은 춘추시대에는 덕(德)을 어지럽힌 여인들이 많은데 유독 남자(南子)만이 음란하다고 칭하면서 공자와 남자의 만남을 비호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다. 다산은 또 사마천이 공자가 위나라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남자(南子)를 만났다고 했으나 그 때는 괴외가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했던 때로 이렇듯 어수선한 때 두 사람이 만났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만남을 영공이 죽고 난 직후라고 보았다.

영공은 태자 괴외를 쫓아낸 후 3년 뒤에 죽었다. 괴외를 내쫓고 영공과 남자(南子)는 영공의 다른 아들인 자영(子郢)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자영은 사양하고 괴외의 아들인 첩(輒)을 추천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영공이 죽고 남자(南子)는 첩(輒)을 즉위시켰으니 그가 출공(出公)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쫓겨나 진(晉)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괴외가 자기가 영공의 자리를 이을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위나라로 돌아오려고 했다. 이 때 『사기』와 『춘추좌전』 등의 기록을 보면 위나라 사람들이 그의 귀국을 막았다고 한다. 다산은 공자와 남자(南子)와의 만남이 이 시기, 어디쯤이라고 보고 두 사람이 만난 목적이 바로 영공이 죽고 난 후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로가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싫어한 이유를 공자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자는 출공이 즉위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공자는 정명(正名)을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자식인 출공이 아버지 괴외를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식답지 않은 일이고, 이미 아들이 군주에 자리에 올랐는데 이를 뺏으려하는 괴외도 아버지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출공이 즉위하면 후에 위나라에 혼란이 닥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로는 이미 아버지에게 쫓겨난 괴외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출공의 즉위를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자로가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싫어한 것은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공자가 남자(南子)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산은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한 말은 뻔히 위나라에 난(亂)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토로한 말이라고 보았다.

 

  1. 남자(南子)는 정말 음란한 여자일까

 

태자 괴외는 정말로 단지 남자(南子)에 대한 소문이 부끄러워서 죽이려고 했을까? 『춘추좌전』을 보면 괴외가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한 사건 바로 전에, 남자(南子)의 일당을 제거하려던 위나라 대부 공숙수(公叔戍)가 영공에게 쫓겨나 노나라로 달아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 사건 이후에 영공은 송조를 위나라로 불러들였고, 이후 괴외는 송조와의 스캔들을 빌미로 남자를 죽이려 하였다. 이 일들은 모두 영공이 죽기 3년 전쯤의 일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남자(南子)와 괴외는 후계 문제로 세력 다툼이 있었고, 결국 괴외가 패하여 쫓겨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딱히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한 것도 아닌 남자(南子)가 굳이 괴외를 물리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는 괴외의 성정(性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출공이 즉위한 지 12년이 되던 해에 괴외는 결국 난을 일으켜 장공(莊公)이 되었다. 그런데 즉위한 지 3년 만에 다시 쫓겨나는 것으로 보아 괴외는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사기』에 의하면 괴외는 즉위한 후에 자기가 나라 밖에 있을 때 대부들이 인사를 오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 또 어느 부락 추장 아내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잘라서 자기 부인의 가발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결국 괴외가 쫓겨났을 때 하필 그 부락으로 도망을 가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괴외의 이런 결말을 보면 남자(南子)의 예측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조와의 스캔들 역시 앞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위나라에서 자기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친정인 송나라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연인인 송조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남자(南子)가 괴외를 물리친 이유도 공자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녀 역시 위나라에 닥쳐올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1. 다시 보는 남자(南子)

 

『춘추좌전』이나 『사기』의 남자(南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음란하다(淫)’는 글자는 볼 수 없다. 남자(南子)에게 ‘음란하다(淫)’는 글자가 처음 보이는 곳은 『열녀전(列女傳)』이 아닌가 싶다. 남자(南子)는 『열녀전』 속 「얼폐전(孼嬖傳)」에 12번째 이야기로 ‘위나라를 어지럽힌 두 여인(衛二亂女)’에 나온다. 길지 않은 글인데 마지막에 남자(南子)에 대한 평을 남기면서 ‘남자가 음란한 성품이 있다.(南子感淫)’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열녀전』은 한나라 때 유향이 지은 것이고, 그 중 「얼폐전」에는 15명의 여자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흔히 ‘나라를 망하게 한 여자들’의 이야기로 본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들은 대체로 음란한 행동(淫行)을 하고, 권력욕으로 당시의 예법이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들의 면모를 잘 살펴보면 똑똑하고 정치적 수완이 있어서 정치권력에 깊게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결혼은 일종의 국가 간의 동맹이었다. 그러니까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위나라에 송나라 세력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괴외가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한 것 역시 위나라 토박이 세력과 송나라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대부분 이렇게 여자 쪽 세력이 커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권력을 가진 여자들은 대체로 음란한 여자, 혹은 패악을 부리는 여자로 기록되었고, 그녀들의 정치적 역량은 지워졌다.

공자와 남자(南子)가 실제 어떻게 만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남자(南子)는 음란한 여인으로 혹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여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남자(南子)를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음란한 여인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남자(南子)를 보다보니 남녀평등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여성의 정치적 역량을 평가하는데 인색한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댓글 8
  • 2022-07-26 08:35

    맨 마지막 문장이 맘에 드네요.

    南子는, 정말 다시 발굴되어야 하는 이야기이고 캐릭터인듯.

    (춘추전국시대에에 南子 말고 역사적 인물인 여성이 또 누가 있을까요?)

    • 2022-08-05 09:52

      뭐, 잘 모르지만 노나라 문강에 대해서는 한 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오빠인 제나라 양공과 바람나 남편인 노나라 환공을 죽게 했다는 부분만 부각되었는데 

      남편이 죽고 문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도 그렇고 노나라에서 쫒겨나지도 않는 것도 그렇고 (제나라와 국경지대로 옮겨가긴 했지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 2022-07-26 13:36

    문득, 한 번만 대강 알 거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편견을 만들 바에야.... 하는 생각이 드네여.  

    공부 안하겠단 변명처럼 들리나요?  

    아니구요..ㅋ

    이리 저리 읽으면서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놔야죠.  인색해지지 않으려면 !!

  • 2022-07-28 09:14

    여성의 정치력 능력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는 구절이 인상적이네요.

  • 2022-07-31 22:31

    와 이렇게 보니 남자도 <열녀전>에 위험을 예측한 현명한 여자 중 한명이 되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2022-08-14 09:53

    저는 에세이 쓸때 남자를 '비선실세 여인' 이라는 표현으로 쉽고 재밌게(?) 퉁~쳐버렸었는데.

    진달래샘의 남자에 대한 복합적 설명을 읽으니 상당히 흥미롭네요.

    암튼 남자가 실세였던건 확실하고,

    혼란한 정계에서 고도의 정치술이든, 권모술수든, 능수능란했구나 싶은데

    '음란한 여자'였다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니 아쉽긴 하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22-08-14 10:00

    그나저나 <논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했기에 글을 이해하며 읽었어요;;;;;

    논어를  전혀 모르던 작년 이었다면 아마 읽지 않고 패스 했을거예요.

    춘추시대 국가, 역사를 전혀 몰랐으니까요.ㅎㅎ

  • 2022-08-14 13:41

    저도 논어 공부 쬐끔했다고... 이 글이 재밌게 읽혔어요.
    우와~  신기하군요! ^^
    잘 읽었습니다.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조회 335
논어 카메오 열전
나루터는 어디 있는가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다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셨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분이 노나라 공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또한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곰방메로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실망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지을 수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논어』「미자,6」   초(楚)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돌아가던 공자 일행은 길을 잃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밭을 갈고 있던 농부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자로가 농부들에게 다가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멀리...
나루터는 어디 있는가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다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셨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분이 노나라 공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또한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곰방메로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실망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지을 수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논어』「미자,6」   초(楚)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돌아가던 공자 일행은 길을 잃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밭을 갈고 있던 농부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자로가 농부들에게 다가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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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8 | 조회 336
논어 카메오 열전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논어』 「자로」18   마지막 유랑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쫓겨난 후 자기를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위(衛)나라에 잠깐 희망을 가졌으나, 곧 후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지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陳)나라와 채(蔡)를 지나며 공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초나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공자는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논어』에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음엔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섭공이 공자와 ‘정직(直)’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이 대화는 이후 『논어(論語)』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섭공과 만난 공자는 그 길로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 소왕이 전투 중에 갑자기 죽었고 이후 초나라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공자의 그의 제자들은 위나라로 가던 중에 노나라에서 돌아와도 좋다는 명을 받고, 14년의 긴 유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공자는 긴 유랑 생활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논어』 「자로」18   마지막 유랑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쫓겨난 후 자기를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위(衛)나라에 잠깐 희망을 가졌으나, 곧 후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지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陳)나라와 채(蔡)를 지나며 공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초나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공자는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논어』에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음엔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섭공이 공자와 ‘정직(直)’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이 대화는 이후 『논어(論語)』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섭공과 만난 공자는 그 길로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 소왕이 전투 중에 갑자기 죽었고 이후 초나라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공자의 그의 제자들은 위나라로 가던 중에 노나라에서 돌아와도 좋다는 명을 받고, 14년의 긴 유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공자는 긴 유랑 생활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다....
진달래
2022.09.18 | 조회 743
논어 카메오 열전
남자(南子)와 공자의 만남   공자께서 남자(위영공의 부인)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옹야,26)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부인을 부를 때는 자기 나라의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예를 들어 애강(哀姜)의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으로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남자(南子)의 자(子)는 송나라 성(姓)이다. 위(衛)나라는 『논어』에서 노(魯)나라 만큼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으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의 주유 생활 중 거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공자가 머물렀을 당시 위나라 영공은 나이가 많았다. 영공의 후비였던 남자(南子)는 노쇠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군주만큼 권력을 가진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원하는 공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벼슬을 구하는 사(士)라면 당연히 그 나라에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어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영공을 만난 것과 남자(南子)를 만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자로가 싫어했다고 하고, 거기다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공자 후대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논어』에 남은 이 한 문장은 이후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은 공자 일생에 가장 흥미로운 스캔들이 되었다.   영화 <공자> 중에서   자로가...
남자(南子)와 공자의 만남   공자께서 남자(위영공의 부인)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옹야,26)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부인을 부를 때는 자기 나라의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예를 들어 애강(哀姜)의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으로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남자(南子)의 자(子)는 송나라 성(姓)이다. 위(衛)나라는 『논어』에서 노(魯)나라 만큼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으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의 주유 생활 중 거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공자가 머물렀을 당시 위나라 영공은 나이가 많았다. 영공의 후비였던 남자(南子)는 노쇠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군주만큼 권력을 가진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원하는 공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벼슬을 구하는 사(士)라면 당연히 그 나라에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어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영공을 만난 것과 남자(南子)를 만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자로가 싫어했다고 하고, 거기다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공자 후대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논어』에 남은 이 한 문장은 이후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은 공자 일생에 가장 흥미로운 스캔들이 되었다.   영화 <공자> 중에서   자로가...
진달래
2022.07.26 | 조회 549
논어 카메오 열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는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알려 주었다. 번지는 다시 안다는 것(知)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知人)’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번지의 얼굴을 얼핏 보니, 자기가 해 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감을 못 잡은 듯하였다. 공자는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사람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번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고 있던 자하를 불러 물어보았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물었더니 스승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군요!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고요를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탕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이윤을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논어』 「안연,22」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사람을 안다는 것(知人)’은 『논어』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1편인 「학이(學而)」에는 첫 장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라는 문장이, 마지막 장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는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알려 주었다. 번지는 다시 안다는 것(知)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知人)’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번지의 얼굴을 얼핏 보니, 자기가 해 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감을 못 잡은 듯하였다. 공자는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사람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번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고 있던 자하를 불러 물어보았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물었더니 스승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군요!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고요를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탕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이윤을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논어』 「안연,22」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사람을 안다는 것(知人)’은 『논어』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1편인 「학이(學而)」에는 첫 장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라는 문장이, 마지막 장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진달래
2022.05.29 | 조회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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