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7회]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 <오발탄(1961)> - 한국고전영화_03

청량리
2023-04-09 20:00
411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오발탄>(1961) | 감독 : 유현목 , 주연 : 김진규, 최무룡 | 107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영화 <오발탄>(1961)은 어느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암울함이 지속됐던 당시의 사회모습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수작이다. 영화 <오발탄>이 한국 고전영화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건, 동명의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유현목 감독의 진지하고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잘 드러난 영상미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1948)에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허나 대부분 멜로드라마와 스릴러, 액션영화 등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발탄>은 촬영기법이나 내용, 장르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제작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 간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는 이유다. 제작비가 없어서 당시 조명감독이었던 김성춘이 사비를 털어 겨우겨우 필름을 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당시 전후 한국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서민들의 삶은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살던 고향은 더 이상 '꽃 피는 산골'이 아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넋 놓고 있었고, 기반시설이 전부 무너져 일자리도 없었다. 월남한 실향민과 집 없는 피난민이 뒤엉켜 값싼 노동력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던 시절이었다.

시내에는 ‘짚차’가 돌아다니고 회계사를 둘 정도로 재산관리를 해야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판자로 지붕을 얹고 거적으로 대문을 대신한 집에 사는 이들이 도시 속에 공존했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에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커져가는 상대적 빈곤 속에 돈 없는 설움은 극에 달했다. 그 시절, 가난에서 자국민을 구한 이가 ‘박정희’라 평가받으니, 5.16 군사쿠데타가 누군가에게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다.

 

 

가자, 어떻게?

어두운 골목길 ‘스탠드빠 서라벌’의 간판 아래로 오늘도 군복 입은 사내들이 휘청거린다. 그들은 ‘육이오 때 쓰고 남은 잔재’인 상이군인들이다. 영호(최무룡)의 옆구리에는 총상이 남아있고, 그의 친구 경식은 절름발이가 되었다. 정부는 그들을 국가영웅으로 칭송했으나, 현실은 전쟁에서 손상을 입은 피해자, 장애인이라는 인식과 차별이 존재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서, 더군다나 불구가 된 그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해 지난 군가나 부를 따름이다.

비틀거리는 영호는 집 앞에서 그의 형, 철호(김진규)와 마주친다. 충치를 뽑으러 갈 여유도, 돈도 없이 언제나 일그러진 얼굴로 ‘남의 재산이나 계산해주는 일’을 하는 철호. 영호는 그의 형이 못마땅하지만, 철호의 손에 딸린 식구가 자신을 포함해 여섯이다. 실성한 어머니, 만삭인 아내, 영호, 여동생 명숙, 막내 동생 민호와 딸아이. 그러니 꼬질꼬질한 잠자리에 몸을 구겨 넣는 수밖에 영호도 달리 방법이 없다.

제대 후 안 해 본 게 없는 영호, 그러나 곰은 커녕 아직 ‘토끼 한 마리’도 손에 넣질 못했다. 영호는 괜히 은행 앞을 서성거린다. 그는 “허수아비를 비웃는 까마귀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 즈음, 우연히 만난 간호장교 오중위의 집에서 권총 한 자루를 발견한다.

 

우물물로 타는 목을 축이던 영호(좌측, 최무룡)는 형 철호(우측, 김진규)와 마주한다. 영호는 형을 존경하지만, 그의 삶을 따라하고 싶진 않다.

 

 

가자, 누구와?

한편, 영호의 친구인 경식은 동생 명숙(서애자)과는 연인 사이였다. 경식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명숙은 그에게 결혼을 재촉한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벌써 2년이 지났으나, 경식은 명숙을 향해 제대로 걷질 못한다. 그를 향한 사랑의 미련도 있겠으나, 명숙은 서둘러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미칠 수 있어요?”

그러나 경식은 불구가 된 자신을 용납할 수도, 기다리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명숙에 대한 사랑보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키운 ‘자폐’에 가까웠다. 전쟁으로 불구가 된 건 그의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명숙은 결국 스스로 돈을 벌어서 이 집에서 나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가진 유일한 밑천은 자신의 몸, 뿐이었다.

어느 날, 철호가 일하는 계리사(회계사) 사무실로 전화가 한통 온다. 그의 누이동생 명숙이 서울중부경찰서에 있단다.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던 명숙은 경찰서에서 그의 오빠 철호와 마주한다. 그러나 무능력한 철호는 동생에게도 특별히 해 줄 말이 없다. 훈방조치 된 명숙은 철호와 함께 경찰서를 나와 서로 멀찍이 떨어진 채로 길을 걷는다.

카메라는 철호를 앞에 두고 길 건너편의 명숙을 함께 보여주며 그들의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 움직인다(트래킹샷). 이도저도 아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대사 없이 눈빛과 표정만으로 연기하는 김진규 배우와 유현목 감독의 절제된 연출력 역시 돋보이는 이 장면은 한국고전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철호에겐 자신을 희생해 돈을 버는 명숙에게도, 사회구조 속의 희생양이 된 영호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여유가 없다. 가족이 해체되고 공동체가 무너진 그런 세상에서 철호가 지켜야한다던 ‘양심과 윤리’란 무슨 소용이냐고 영호는 묻는다. 그렇다. 그건 어쩌면 공동체의 ‘신뢰’ 안에서만 작동하는 원리인지도 모른다.

 

“형님 어금니만 해도 그래요. 푹푹 쑤시고 아픈 걸 견딘다고 절약이 되나요? 지긋지긋하게 살아야 하니까 문제죠. 왜 우리라고 좀 더 넓은 테두리까지 못 나가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왜 우리만 이 좁은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경찰서를 나와 명숙(좌측, 서애자)과 철호는 나란히, 그러나 따로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다. 카메라는 그 둘을 말없이 따라간다. 

 

 

가자, 어디로?

영호의 질문을 “마음 한 구석이 비틀려서 하는 억지”같은 말이라고 철호는 외면한다. 그러나 어차피 현실은 오중위와 함께 투신자살한 시인의 말마따나 “열편의 시마저 채워 줄” 여지조차 없는 메마른 세상이 아닌가. 오히려 철호야말로 ‘양심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피폐하고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건 아닐까?

영호의 은행강도는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붙잡힌 동생을 만나러 철호는 또다시 경찰서로 찾아간다. 그러나 영호 앞에서 역시 아무것도 해줄게 없는 철호는 얼굴만 바라보다 말없이 뒤돌아 나간다. 설상가상으로 만삭인 아내는 둘째를 낳다가 그만 죽게 된다. 허망하게 죽은 아내도 차마 볼 수가 없는 그는 영안실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병원 밖으로 나온다.

먹고 살기 위해 여동생은 ‘양공주’가 되고, 또 다른 동생은 ‘은행강도’가 되어 버린 세상. 더는 못 참겠다. 차라리 나에게 더 많은 고통을 다오!! 철호는 지긋지긋한 충치 두 개를 뽑아내고 과다출혈로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는다. 어디로 가냐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그의 어머니처럼 ‘가자’는 말만 되풀이 한다.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철호의 죽은 아내가 낳은 둘째아이 앞에서 명숙은 다시 일어서길, 다시 웃으며 살길 다짐하지만 어쩐지 되풀이되는 영호의 거짓말 같아 씁쓸해진다. 저들의 형편이 절대로 풀리지 않을 답답함에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딘지 가긴 가야 하는데...”

 

죽은 아내와 경찰에 잡힌 동생을 뒤로 하고 택시에서 정신을 잃은 철호. 가긴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1960~70년대 기록필름들은 많다. 너무나 생경한 모습에 그저 멀리 떨어져 ‘관객’이 될 뿐이다. <오발탄>은 그 판자지붕을 걷어내고 그 안에 ‘리얼한 삶’의 모습을 담았다. 그러자 카메라가 안으로 훅 밀고 들어온다. 그래서 송철호 가족의 삶을 떨어져서 바라만 보긴 어렵다. 감각의 확장과 생각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에게 그런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영화 <오발탄>도 그러하다.

 

댓글 6
  • 2023-04-10 14:21

    소설 <오발탄>도 짧지만 강렬했고, 영화도 예전의 흑백영화지만 그러했다. 상황이 강렬해서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이 강렬함은 옅어지지도 않는다.

  • 2023-04-11 10:22

    문탁에 처음 온 2009년?
    이 영화를 보았지...

    아ㅡㅡ 세상 갑갑한 이 영화를...

    요요.문탁.인디안.파랑. 아마 새털(지금 겸목)과 같이

    그 시절 서울시내를 보여주던 영상도 새로웠는데 ㅋㅋ

    • 2023-04-12 09:20

      옹기종기 모여 앉아 60년대 영화보던 시간이 떠오르는군요.^^
      OTT 없던 시절, 디비디 가져와 틀었겠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격세지감을 느낍니다.ㅎ
      그런데 60년도 더 된 이 영화 <오발탄>은 지금 청량리에게 너는 가는 곳이 어니냐고 묻나 봅니다.

      • 2023-04-23 18:27

        디비디...아닐 거에요. 제 기억엔 영상자료원인가에 회원가입해서 돈주고 스트리밍 한 것 같은디...

    • 2023-04-23 18:30

      미경이도 있었시유^^
      https://moontaknet.com/?page_id=228&mod=document&pageid=1&keyword=60%EB%85%84%EB%8C%80+%EC%98%81%ED%99%94&ddd=da&uid=1571

  • 2023-04-17 16:56

    오발탄, 김진규의 절제된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최무룡이 내뱉던 말들에 깊은 숨을 쉴 수밖에 없기도 했고..
    충치를 빨리 뽑기라도 하지ㅠㅠ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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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3.05.02 | 조회 374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7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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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3.04.23 | 조회 37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澤)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澤)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봄날
2023.04.22 | 조회 385
한문이예술
    # 1. 가랑비에 옷 젖듯 한자를, 雨   동은       1. 연필을 부러뜨리고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든 한자      17살 여름, 한자능력검정시험 4급을 땄다. 8급부터 4급까지 누적되는 시험 출제범위가 딱 1000자였에 나는 그 날부터 한자 1000자를 외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국가공인으로 인정되는 급수는 아니었지만 1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그 무게를 들어 올린 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지금까지 한자를 통해 겪었던 고통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언제부터 한자를 배웠는지 기억을 거슬러 가보면, 미취학 아동 시절 때부터 외우느라 끙끙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한자 공부를 시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어느 학원에서는 영어발음을 위해 혀뿌리를 자르게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정도로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대세를 거스르고 나를 서예학원에 보냈던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아무래도 나의 산만함이 원인이었다. 먹냄새라도 맡으면서 사자소학이라도 읽고 내가 제발 조금이라도 차분한 애가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서예학원에 가면 한자를 급수 순서로 빼곡하게 채워 코팅한 책받침을 줬다. 갈 때마다 그 책받침에 표시를 해 가면서 그 날 외워야 하는 한자를 할당해줬다. 오늘은 쇠 금金까지, 내일은 군사 군軍까지... 피아노 학원 원장님, 태권도 학원 사범님, 가리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었던 나였지만, 서예학원의 할아버지 선생님은 제발 입 좀 다물라고 꿀밤을 때리셨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빨리 한자를 외워서 학원을 탈출해야 했다. 어쨌든 몇 번의 이사를...
    # 1. 가랑비에 옷 젖듯 한자를, 雨   동은       1. 연필을 부러뜨리고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든 한자      17살 여름, 한자능력검정시험 4급을 땄다. 8급부터 4급까지 누적되는 시험 출제범위가 딱 1000자였에 나는 그 날부터 한자 1000자를 외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국가공인으로 인정되는 급수는 아니었지만 1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그 무게를 들어 올린 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지금까지 한자를 통해 겪었던 고통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언제부터 한자를 배웠는지 기억을 거슬러 가보면, 미취학 아동 시절 때부터 외우느라 끙끙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한자 공부를 시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어느 학원에서는 영어발음을 위해 혀뿌리를 자르게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정도로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대세를 거스르고 나를 서예학원에 보냈던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아무래도 나의 산만함이 원인이었다. 먹냄새라도 맡으면서 사자소학이라도 읽고 내가 제발 조금이라도 차분한 애가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서예학원에 가면 한자를 급수 순서로 빼곡하게 채워 코팅한 책받침을 줬다. 갈 때마다 그 책받침에 표시를 해 가면서 그 날 외워야 하는 한자를 할당해줬다. 오늘은 쇠 금金까지, 내일은 군사 군軍까지... 피아노 학원 원장님, 태권도 학원 사범님, 가리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었던 나였지만, 서예학원의 할아버지 선생님은 제발 입 좀 다물라고 꿀밤을 때리셨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빨리 한자를 외워서 학원을 탈출해야 했다. 어쨌든 몇 번의 이사를...
동은
2023.04.21 | 조회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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