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읽읍시다 1회]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 허무와 의미의 변증법?

정군
2023-05-16 14:13
431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명함에 박혀있는 회사명과 직급,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소 등등, 각자에게 붙어있는 이런 '라벨'들을 모두 떼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는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전장의 그 어떤 장군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싸운다. 그러나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칼비노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는’ 기사 '아질울포'를 통해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장과 유니폼을 벗어버린 후에도, 아무런 소속이 없어도 과연 자신의 '존재'를 붙잡아둘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질울포는 일을 하거나, 전투를 벌이지 않을 때에는 작은 돌을 이용해서 열을 맞추거나, 빵쪼가리를 뭉쳐서 정렬된 도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식이 흩어져 소멸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잠이 들지도 못한다. 의식의 중단은 곧 소멸이기 때문이다. 아질울포의 일과 휴식은 컴퓨터를 통해서 일을 하고, 쉬는 동안에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쇼핑, SNS에 몰두하는 현대인과 몹시 닮았다. '스마트폰을 하면서 쉰다'라고 하지만, 스마트폰을 오래볼수록 일한 것보다 더 피곤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행동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내가 진정 존재하는지 실감할 수가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상태를 견딜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노리고 들어오는 '허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질울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뭐라도 '해야만' 의식을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잠도 잘 수 없다. 잠들면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아질울포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몰아넣은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다. 그에게는 '자아'가 없다. 식량을 배급하는 줄 어느 곳에나 그가 있다. 매번 이름을 바꾸고,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서 거기에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구르둘루'라는 것도 모른다. 단 한순간도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그는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는 아질울포의 거울상에 다름 아니다. 어느 곳에나 존재하나 자기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갖지 못하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으나 매순간 '존재'를 자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쌍을 이루고 있다. '구르둘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나 존재하는 구르둘루, 월급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거리는 구르둘루, 매번 다른 인간이 되는 구르둘루, 단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하는 구르둘루, 구르둘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구르둘루는 늘 '허무'를 피해서 다닌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허무'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이 또한 역설이다. 모든 의미를 집어삼키고 마는 죽음-허무야말로 '의미'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존재 자체가 허무인 아질울포는 생의 모든 것을 '의미'로 채운다. 이 극단의 사이에 랭보와 테오도라 수녀가 있다. 랭보는 '허무'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 증명의 열망에 가득찬 '젊음'을 상징한다. 그에게 인생은 '허무'를 향해 달려가는 행로가 아니다. 여느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얻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가, 그 다음엔 야망이, 그 다음에는 사랑이 그를 움직인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만개시키는 여름날의 나무처럼 그는 생의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전쟁터에서 우연히 만난 여전사 브라다만테에 대한 사랑으로 열병을 앓는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이 열망의 곁에는 어떤 허무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무의미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허무 속에서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혹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이 있다면 그것은 청년 랭보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을 뚫고 올라와 비와 바람을 맞으며 커가는 나무. 나무는 자신의 성장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생도 나무를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모든 이야기는 테오도라 수녀(화자)의 기록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를 통해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기가막힌 형식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쓰지 않겠다. 알고보면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니까. 본문 페이지가 170여쪽 밖에 안 되는 '긴 단편'이니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 짧은 우화 속에 칼비노는 '인생'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근본적인 허무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큰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배울 수 있을까?

 

"그도 배우겠지요…….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168쪽

 

댓글 5
  • 2023-05-16 17:13

    170쪽이라 하니 솔깃해집니다. 허무와 우울이 의미를 위해선 필요한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5-16 20:52

    지난 겨울, 소설 읽고싶다고 할 때 정군님이 빌려줘서 읽은 책입니다. 빌린 책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읽고 싶은 분 있으면 한 바퀴 돌린 다음에 돌려줘도 되겠지요?^^ 아무튼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읽고 나서 인스타에 이런 글을 남겼더라고요.

    칼비노의 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올리게 하는, 오직 규정과 원칙과 질서로만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프와 그 대극에 있는 무질서, 무원칙, 무규정의 화신, 자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존재, 그래서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도 말해도 좋은 구르둘루와 그들 사이에 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일까?
    -------------------

    한차례 싸움이 끝나고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묻으러 가서 의식-아질울프와 사물-구르둘루, 그 둘 사이에 놓인 불안한 현존재 랭보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질울프) 오 죽은 자여, 너는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되지 않을 시체로구나. 다시 말하면 넌 시체로 존재하는 거지. 그러니까 바로 이 때문에 가끔씩 우울한 순간이면 놀랍게도 난 존재하는 인간들을 질투한다. … 난 존재하는 사람들보다 수많은 일들을 훨씬 잘 할 수 있어. 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조잡함이나 부주의함이나 지리멸렬함 같은 결함 없이, 악취를 풍기는 일 없이 말이야.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는 것도 사실이야.

    (구르둘루) 시체야, 네게 부족한 게 뭐 있어? 이젠 네 몸에서 물이 흘러나와 거름이 되어 풀밭의 풀들이 햇볕을 받으며 점점 더 잘 자랄 수 있게 해 줄 거야. 넌 풀이 되고 풀을 먹은 젖소의 우유가 되고 우유를 먹을 어린아이의 피가 될 수 있어. 봐,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시체야?

    (랭보) 망자여, 살아있는 우리들에게나 죽은 당신들에게나 무덤에 가기 전의 이 하루하루가 존재할 뿐입니다. … 어쨌든 당신의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내 주사위는 아직도 요술 주머니 속에서 소용돌이칩니다. 망자여, 난 당신의 평화보다는 나의 불안을 사랑합니다.(70~71)

  • 2023-05-16 21:29

    읽어봐야지~ 감사합니다^^

  • 2023-05-18 19:05

    와 재밌어보여요^^
    근데 첨부된 사진들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 2023-05-22 09:29

    김영민 교수가 소식의 '적벽부'를 모티프로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썼던데 한번 읽어 볼까 하고 생각했더랬는데...
    이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ㅎ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띠우
2023.05.28 | 조회 32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우현
2023.05.25 | 조회 352
한문이예술
#2.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 : 한자의 색色에서 몸짓祭까지     동은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한문이 예술>은 한문으로 예술藝術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미술 활동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런데 정작 수업을 여는 나는 미술, 예술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한자도 주입식으로 암기해왔던 내가 어쩌다가 초등한자-미술수업이라는 퓨전수업을 만들어 냈던 것일까? 그 배경에는 한자를 보며 막연히 갖고 있던 상상을 시각화 한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천자문>의 원문을 읽다가 비슷한 시기에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천자 중에 한자>를 기획하게 되었고 모두 합쳐 7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은 그야말로 ‘재미’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한자를 하고 싶은 대로 옮겨서 그걸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들을 청聽은 한자를 악보기호로 대치하고 인연 연緣은 부수로 사용된 실 사糸를 살려 실로 마구 엮어 형태를 만들고, 즐거울 락樂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춤추듯이 썼다. 이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고, 긍정적인 반응을 수업까지 옮겨보려고 했지만, <한문이 예술> 수업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 수업시연날, 자신감에 차서 친구들 앞에서 시연을 했지만 유치하고(헉!)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강의 내용과 활동이 연계되는 과정에 설득력이 부족했고 맥락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2.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문제에 부닥치니 '미술수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업의 컨셉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술수업도, 한자수업도 아닌...
#2.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 : 한자의 색色에서 몸짓祭까지     동은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한문이 예술>은 한문으로 예술藝術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미술 활동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런데 정작 수업을 여는 나는 미술, 예술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한자도 주입식으로 암기해왔던 내가 어쩌다가 초등한자-미술수업이라는 퓨전수업을 만들어 냈던 것일까? 그 배경에는 한자를 보며 막연히 갖고 있던 상상을 시각화 한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천자문>의 원문을 읽다가 비슷한 시기에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천자 중에 한자>를 기획하게 되었고 모두 합쳐 7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은 그야말로 ‘재미’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한자를 하고 싶은 대로 옮겨서 그걸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들을 청聽은 한자를 악보기호로 대치하고 인연 연緣은 부수로 사용된 실 사糸를 살려 실로 마구 엮어 형태를 만들고, 즐거울 락樂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춤추듯이 썼다. 이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고, 긍정적인 반응을 수업까지 옮겨보려고 했지만, <한문이 예술> 수업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 수업시연날, 자신감에 차서 친구들 앞에서 시연을 했지만 유치하고(헉!)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강의 내용과 활동이 연계되는 과정에 설득력이 부족했고 맥락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2.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문제에 부닥치니 '미술수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업의 컨셉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술수업도, 한자수업도 아닌...
동은
2023.05.24 | 조회 30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스르륵
2023.05.24 | 조회 336
지난 연재 읽기 소설을 읽읍시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정군
2023.05.16 | 조회 431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