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9회]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 <짝코(1983)> - 한국고전영화_05

청량리
2023-05-02 02:22
37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만난 곳이 하필 ‘갱생원’이었다는 점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참고할 만한 영화가 있다.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15년 동안 군만두를 먹게 된 오대수(최민식)가 이우진(유지태)과의 첫 비대면 대화(산낙지를 먹었던 횟집 전화통화)에서 묻는다. “누구냐, 넌? 왜 날 가둔 거냐?” 그러나 우진은 ‘질문’이 잘못됐다며 웃는다. “아니죠. 지금 오대수씨가 물어야 할 것은,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죠.” 과거의 ‘응축’된 시간인 현재는, 동시에 끊임없이 미래로 흘러가는 ‘이완’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다가올 것들에 대해서다. 그러나 송기열의 질문은 여전히 과거의 층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영화 <짝코>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가 아니라, “오갈 데 없이 늙어버린 두 사람이 왜 30년이 지난 시점에 굳이, 다시 만나게 됐을까?”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발걸음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갱생원에 갇혀버린, 늙은 두 사람에게 ‘지금’이란 무엇이며, ‘미래’란 무슨 의미인가?

 

 토벌대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선글라스가 부러진 안경테에 투명알로 바뀐 것 말고는 여전히 달라진 게 없는 송기열. 그가 갱생원에 들어올 때 갖고 있던 물건이라곤 백공산의 행적을 낱낱이 적은 수첩과 그를 잡을 때 사용할 포승줄이 전부였다. 백공산으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못한 송기열은, 그러나 다리가 부러지고 노숙자 신세에도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아이러니하게 백공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백공산, 짝코는 자신의 본적을 영광에서 여수로 바꾸고, 이름도 ‘김삼수’로 개명하여 이미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백공산은 빨치산이 아닌 ‘김삼수’로 죽으려 한다. 그 동안 숨어 살면서 못 본 세상을 보기 위해, 죽은 뒤 눈을 다른 이에게 기증하고 싶다는 김삼수. 백공산이 현재를 살기 위해 자신을 변화하는 인물이라면, 송기열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늘 과거 속을 헤맨다.

 

열혈경사 송기열은 빨치산 백공산을 잡아 특진을 하게 됐다. 그러나 결국 백공산은 도망치고 송기열은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만화영화의 대본을 쓰는 등 변변찮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송길한 작가에게 영화사는 이번에는 ‘반공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제안한다. 그 영화의 감독이 임권택인데, 공교롭게 임 감독과 송 작가 두 사람 모두 이념문제에 엮인 가족사로 연좌제(친족 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3페이지 분량의 단편소설(작가 김중희)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 <짝코>(1980, 대종상영화제 각색상)는 각색과 각본을 맡은 송길한 작가와 연출을 맡은 임권택 감독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며,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그 둘의 인연은 <만다라>(1981, 대종상영화제 각색상, 감독상), <길소뜸>(1986), <씨받이>(1987,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등 굵직한 작품들로 이어진다.

 

왼쪽이 임권택 감독, 오른쪽이 송길한 작가. "그 양반(임권택) 특징 중 하나가 아주 기분 좋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면 아무 말 없이 원고지를 낚아채듯이 확 갖고 없어져버려. 본인도 벅차서 그런 거겠지. <짝코>가 그랬어"

 

 

 영화 <짝코>는 ‘끈질긴 토벌대가 결국은 망실공비를 잡는다’는 얼핏 반공영화의 줄거리로 보인다(실제로 ‘반공영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제목부터 ‘백공산’의 별명인 ‘짝코’인 걸 보면 감독과 작가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반공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가만두면 그럭저럭 살 사람들, 그 두 사람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무화(無化)가 되어버리는 이 허망한 삶을 안 그릴 수가 없었다.” 30년 만에 두 사람, 두 이념은 늙고 병든 상태로 만난다. 그들을 통해 ‘이념’에 사로잡힌 사회를 비판하려는 감독의 의도였을까? 빨치산과 토벌대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프레임’ 너머를 보지 못하는 시각을 비판한다.

 

 “한국전쟁은 여러 강대국들의 대리전에 불과”했으며, 한국사회는 그런 이념대결의 희생양은 아니었는지 영화는 묻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과 대사가 담긴 영화 속 TV토론 장면은 ‘검열’에 의해 삭제된다. 같이 TV를 보던 백공산은 “결국 너나 나나 불쌍한 사람들 아니냐”고 말하지만, 송기열은 끝까지 부정하며 받아들이질 못한다.

 

 서로의 목적은 달랐으나, 결국 두 사람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제발 죽을 때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죽자”는 백공산의 말에 송기열은 “그게 뭔 개소리냐”며 백공산의 멱살을 잡아 자신의 고향 가는 기차에 태운다.

 

 과거, 백공산이 도망치자 공비를 일부러 풀어줬다는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친 송기열. 설상가상으로 백공산을 쫓는 와중에 아내는 죽고 만다. 그럴수록 ‘백공산’만이 자신의 결백함을, 그래서 그의 삶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줄 수 있었다. 한평생 빨치산으로 숨고 도망치며 사랑했던 사람마저 보내야 했던 백공산. “네놈 하나 찾기 위해 온 신경 쓰다가 눈까지 병”든 송기열. 그러나 그들을 편히 쉴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향가면 반겨줄 사람도 많겄지? 나도(백공산) 고향에 가고 싶었는데 면목이 있어야지. 사람은 죄짓고 살면 못 쓰는 법이여.

 

 두 사람은 겨우 서울역에 도착해 간신히 기차에 몸을 실었다. “송 경사, 몇 년 만에 가는 고향이여? 반겨줄 사람도 많겄제?”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백공산, 아니 김삼수의 머리가 툭, 송기열의 다리 위로 맥없이 떨어진다. 허망하다, 허망해. 송기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듯, 얼굴 위로 무언가 스쳐지나간다. 끝내 두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 했을 것이다. 아니, 가야 할 고향조차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 결국 너나 나나 불쌍한 사람들 아니겠냐.

 

 

댓글 2
  • 2023-05-02 21:08

    허망하다. 허망해
    그럼 김삼수가 죽은건가요?

    한번 봐야겠는데요.

  • 2023-05-03 06:56

    앗, 나도 못 본 듯. 나도 보고싶네유~~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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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3.05.28 | 조회 32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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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3.05.25 | 조회 352
한문이예술
#2.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 : 한자의 색色에서 몸짓祭까지     동은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한문이 예술>은 한문으로 예술藝術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미술 활동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런데 정작 수업을 여는 나는 미술, 예술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한자도 주입식으로 암기해왔던 내가 어쩌다가 초등한자-미술수업이라는 퓨전수업을 만들어 냈던 것일까? 그 배경에는 한자를 보며 막연히 갖고 있던 상상을 시각화 한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천자문>의 원문을 읽다가 비슷한 시기에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천자 중에 한자>를 기획하게 되었고 모두 합쳐 7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은 그야말로 ‘재미’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한자를 하고 싶은 대로 옮겨서 그걸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들을 청聽은 한자를 악보기호로 대치하고 인연 연緣은 부수로 사용된 실 사糸를 살려 실로 마구 엮어 형태를 만들고, 즐거울 락樂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춤추듯이 썼다. 이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고, 긍정적인 반응을 수업까지 옮겨보려고 했지만, <한문이 예술> 수업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 수업시연날, 자신감에 차서 친구들 앞에서 시연을 했지만 유치하고(헉!)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강의 내용과 활동이 연계되는 과정에 설득력이 부족했고 맥락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2.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문제에 부닥치니 '미술수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업의 컨셉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술수업도, 한자수업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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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3.05.24 | 조회 30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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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5.24 | 조회 336
지난 연재 읽기 소설을 읽읍시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정군
2023.05.16 | 조회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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