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1회] 주공, 공자의 꿈

진달래
2023-04-2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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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무왕은 나라를 세우고 공을 세운 신하들이나 동생들에게 봉지(封地)를 내려 주었는데 주공은 노(魯)나라를 봉해 받았다. 하지만 주공은 노나라로 가지 않고 계속 무왕 곁에 있었다. 무왕이 즉위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그가 큰 병에 걸렸다. 신하들이 왕을 위해 점을 치고 제사를 드렸다. 이 때 주공이 스스로 나아가 무왕을 대신해 자기가 죽거나 병들겠다고 하자 무왕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다음 해 무왕이 죽었고, 그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즉위했다. 성왕이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은 성왕을 대신하여 7년 동안 섭정(攝政)을 했다. 이 섭정에 대해 사람들은 주공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꾸준히 가졌지만, 주공은 7년의 섭정 기간이 지나자 자리를 성왕에게 돌려주었다.

섭정 기간 중, 주공이 한 일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일은 곳곳에서 일어났던 은나라 유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주공의 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이 찬탈을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은나라의 유민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커서 진압하는데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주공에 대한 의심은 성왕도 가지고 있었다.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주공이 두려워 성왕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주공을 2년 동안이나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성왕의 의심이 풀리자 도성에 돌아온 주공은 섭정을 끝낸 뒤에도 성왕 곁에서 그를 도와 주례(周禮)를 제정하는 등, 주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금등지사(金縢之事)

 

공자가 존숭한 주공은 사실 여러 모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그가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눈초리를 보냈다. 성왕 역시 주공에 대한 의심을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어린 왕 옆에 노회한 삼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관숙과 채숙의 반란을 평정하고 수도로 돌아오려고 한 주공을 성왕이 2년 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성왕은 혹시나 삼촌이 자기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다. 더욱이 주공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동생인 관숙과 채숙을 죽여 버렸다. 아무리 큰 잘못을 지었다고 해도 왕의 친족을 죽이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성왕의 두려움은 더 컸다. 이 때 성왕의 의심을 풀어 준 것이 주공이 무왕이 아팠을 때 대신 죽기를 자처하면 읽었던 축문이었다. 주공은 그 때 제사가 끝나고 축문을 상자에 넣어 봉해두었는데 성왕이 그 상자를 열어 축문을 읽고 나서 주공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금등지사’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는데 여기서 금등(金縢)은 『서경(書經)』의 편명으로 주공이 글을 밀봉할 때 금속 띠를 사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주공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싹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주공 말년에 성왕은 소공에게 낙읍 건설을 지시했다. 하지만 주공이 점을 쳐서 자기가 그 일을 맡아서 했고, 죽을 때가 되자 낙읍에서 장례를 치러 달라고 했다. 그러나 성왕은 이 부탁을 들어 주지 않는다. 성왕은 천자의 예로 주공의 장례를 지내도록 하고, 대신 조상의 묘가 있는 기산 근처에서 장례를 치렀다. 아마도 이는 낙읍에 주공의 묘가 있게 되면 그것을 중심으로 주공에 세력이 계속 이어질까 성왕이 두려워했던 것 같다.

 

주공의 꿈

 

이렇듯 성왕과 그 주변 인물들이 주공에 대해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면, 주공은 찬탈의 뜻을 한 번이라도 가진 적이 없었을까? 뭐 이런 생각이 절로 들지만 관숙과 채숙을 죽이고 난 후 주공이 한 말을 보면 주공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새끼를 잡아갔으니, 내 집을 헐지 말지어다.”(鴟鴞鴟鴞 旣取我子 無毁我室) 『시경』「빈풍」

 

주공은 두 동생을 죽이고 난 후에 이 시를 지어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여기서 ‘이미 내 새끼를 잡아갔다.’는 것은 두 동생을 죽인 일을 말한 것이고 ‘내 집을 헐지 말지어다.’는 내 집, 즉 주나라 왕실은 훼손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자면 주공이 평생에 걸쳐 힘쓴 일은 주나라의 기틀을 잡는 것이다. 섭정을 실시한다고 했을 때 주공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평판이 아니라 주나라 왕실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주공의 이러한 태도는 따져보면 건국 초기에 매우 중요한 일이 것이다. 무왕이 주나라를 세울 때 그의 동생들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모두 건국 후에 땅을 받아서 제후가 되었다. 주공을 비롯한 많은 제후들은 군사력은 물론 백성들에게 신망도 두터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주 왕실, 즉 성왕에게는 모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주공이 섭정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다시 성왕에게 자리를 돌려 준 것 자체가 이후에 하나의 모범이 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성왕 역시 자기가 죽으면서 자기 아들인 강왕(康王)을 삼촌들인 소공(召公), 필공(畢公)에게 맡기고 죽었다.

 

 

공자의 꿈

 

공자는 30대에 제나라에서 경공을 만나 정치(政治)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 그 유명한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이다. 공자는 자기가 맡은 자리에 마땅한 일을 하는 것을 바른 것(正)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군주는 군주의 자리에 맞는 일을 신하는 신하의 자리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각각 맡은 바 일을 행할 때를 질서 잡힌 세계로 보고, 이를 안정된 사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주나라 초기에 세운 봉건질서를 잘 지키는 것을 정치의 기본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살던 때는 봉건질서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던 시기였다. 주 왕실의 권위뿐 아니라 각 제후국 안에서도 힘 있는 대부들이 군주의 권력을 넘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나라만 해도 삼환(三桓)이 국정을 장악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이들을 없애려고 했던 소공이 도리어 노나라에서 쫓겨나는 일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공자가 자신이 정치 이상으로 삼은 정명(正名)은 주공이 그의 뛰어난 자질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성왕에게 지위를 돌려주고 끝까지 신하의 자리를 지킨 것으로부터 본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공자가 이어받으려고 했던 ‘주례(周禮)’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제도라기보다, 주 왕실의 질서를 공고히 함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세우려고 했던 주공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공은 주나라 왕실을 지키기 위해 평생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다. 공자 역시 자기가 이상적으로 여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평생 고군분투했지만 사람들은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고 공자를 평했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

 

단순히 공자가 주공을 흠모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고단했던 주공과 공자의 삶이 이 한 문장에 같이 보이는 듯하다.

 

 

 

 

댓글 4
  • 2023-04-26 15:11

    "꿈 속의 사랑"이란 트로트가 생각나네요~ 탕웨이버전으로 한 번 들어보세요^^

  • 2023-04-26 16:50

    공자님에게 자신의 노쇠함의 표지가 평생의 꿈이었던 주공을 꿈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니!
    공자님의 탄식에서 노년의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 2023-04-26 17:06

    <서경>에 주공의 글이 꽤 많이 있어요.
    당대에도 후대에도 주공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많았었고, 저 역시 처음 <서경>을 읽을 때는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주공을 보았는데, 점점 읽다보니 주공의 진심이 느껴졌었지요.
    공자님이 괜히 주공을 흠모했을까요? 다 이유가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 2023-04-28 21:50

    재밌네요! 주공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는데도 그렇게 칭송되었다니, 케이스바이케이스.. 에 따라 상황과 사람을 해석하는 중국의 사유가 확 더 와닿기도 하고요..(?)
    주공을 뵙지 못했다는 말이 오히려 주공을 끝까지 놓치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데요. 다 늙어서까지 주공과 함께 살았던 공자의 삶이 좀 다르게 보입니다.

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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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3.05.28 | 조회 32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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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3.05.25 | 조회 352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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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3.05.24 | 조회 30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스르륵
2023.05.24 | 조회 335
지난 연재 읽기 소설을 읽읍시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정군
2023.05.16 | 조회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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