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➃] '진짜' 군인은 없다.

musa
2021-07-12 21:10
261

'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피해자, 남편과 자식을 전장에서 잃은 미망인과 어머니 이미지만이 간간이 예술작품의 소재로 다뤄졌다. 전쟁을 겪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승리의 찬란함(또는 패배의 비극성)은 참전자의 몫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목소리만이 역사가 되었다. 페미니즘은 그 역사의 진위를 의심하며 태동했고, 그 역사를 누가 썼는지, 왜 그런 역사가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페미니즘 공부는 내 삶의 현장에 혼란을 주지만, 현실을 살아갈 용기와 에너지도 주고 있다. 

 

한손 팔굽혀펴기는 한때 로망이었다.

 

   2003년 입대를 앞두고 훈련에 ‘적합'한 몸을 만들던 나는 롤 모델이 필요했다. 여성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보호자나 피해자로 재현되는 것이라면 전투에 참전해 통쾌하게 승리한 여성 서사는 없을까? 영화 <지.아이.제인>은 ‘여성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일 뿐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인 줄 알았)다. 남성들도 60%가 탈락한다는 네이비 씰 특전 훈련을 온갖 고생 끝에 마친 오닐 중위는 우연히 실전에 투입되고 평소 ‘여성은 전장에서 짐일 뿐’이라던 교관의 생명을 살린다. 영화에서는 지옥 훈련 수료보다 교관(남성 주체)의 인정과 무공훈장을 받는 순간이 더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남성화’된 조직에 진출한 소수 여성이 겪는 각종 차별과 폭력, 신체적 열세 극복, 전우애, 전장에서의 승리, 조직의 인정 등 뻔한 클리셰가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오닐 중위는 결국 ‘남성적’ 기준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직 내 지배적인 ‘남성’ 가치를 강화하는 ‘명예 남성’이 되었지만, 나는 오닐 중위에게 푹 빠져 버렸다. 강인한 체력은 군인의 기본 덕목이라고 여겼던 나는 3개월 동안의 몸 만들기를 거쳐 드디어 한손 팔굽혀펴기를 성공한 순간 ‘진짜’ 군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진짜군인은 누구일까?

 

“버틀러는 모방이라는 행위 자체가 원전의 진본성이나 권위를 손상시켜 더이상 원전/모방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치 않다는 근거로 설명한다.”(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25)

 

   막상 군에 입대해보니 직접 전투 참전 경험이 있는 현역 군인은 극소수였고, 섹스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투 ‘지원’ 업무에 복무하고 있었다. ‘진짜’, ’원본’은 없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한 군인만이 ‘진짜’ 군인이라는 관념은 허상이었다. 그 관념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다고 여겨져 온 가치나 지배질서, 성차별적 조직 문화, 기회의 불평등에 대한 언급은 뒤로한 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전투에 적합하지 않으며, 보호의 대상일 뿐이라는 편견과 폄하만을 반복적으로 덧씌워 만든 구성물이었다. 또한 그 관념은 시대와 가치의 변화, 첨단기술과 정보력이 중심이 된 현대전의 성격, 전장의 전 지역화, 징병제 사회의 특수성, 군 복무를 특권이 아닌 박탈로 여기는 인식 변화 역시 담지 못한다. 오닐 중위가 특전 훈련을 무사히 수료하면 해군 내 성차별 규정을 철폐하겠다는 정치권의 밀약은 여성 개인에게 집단 여성 범주를 대표시킨 후 실패하게 만드는 전략의 민낯을 드러내고 과학이라는 진리 외피를 뒤집어 쓰고 견고하게 주장되어온 차별의 허구성과 규정의 인위성을 방증한다. <지.아이.제인>이라는 제목은 한국어로 <군인 영희> 정도로 번역된다. 이는 여성 군인 일반에 ‘너도 오닐 중위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부추기고 ‘‘진짜’ 군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네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구조적 차별의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 돌리는 전통적 재현방식을 반복한다. 모든 여성 군인이 오닐 중위가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다. 

 

   여성 군인들은 군인화 양성 단계에서 ‘여성성'을 버리고 ‘군인’으로 거듭나기를 강요받지만, 막상 일선 부대에 배치되고 나서는 ‘여성’으로서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을 요구받는다. ‘어머니’처럼 병사들을 케어하는 돌봄 인력으로서, 경직된 분위기를 가족같이 부드럽게 조율하는 성차화된 존재로서 재호명된다. 직책과 직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여성 군인들은 ‘군인’답게 훈련을 받다가 행사 때는 ‘여성’스럽게 꽃다발을 건네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여군특집>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다. ‘톰보이(Tomboy)** 아이돌 엠버는 기초 훈련을 우수하게 받음으로써 ‘남성’ 교관들을 놀라게 하지만 곧이어 ‘유격 교관의 눈빛에 반한 엠버’라든지 ‘바느질하는 천상 여자 엠버’로 소비되면서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 동맹에 충실한 방식으로 재현될 뿐이다. ‘남성화’된 삶의 현장에 적응하기 위한 여성 군인들의 고군분투는 섹스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임을 어쩔 수 없이 용인하고 상명하복과 성별 위계적 조직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여성 군인들은 각기 다른 경험과 계급의 층위 속에서 여성성을 버리고 ‘진짜 사나이’(남성군인 모델)가 되려 하거나 성별 분업을 받아들여 여성성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혹은 성차를 드러내지 않는 다소 중립적인 전략이나 더 나아가 자신만의 수행으로 현실적 딜레마를 돌파해보려 하지만 구조적 차별과 일상적인 젠더 폭력에 노출되며 지금도 여전히 ‘죽어 나가는 피해자’로 재현되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규범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규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규범에 비판적이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로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14)

 

   다시 <지.아이.제인>으로 돌아가보자. 정치권은 예상과는 달리 선전하는 오닐 중위에게 여성 동성애자(정확히는 ‘남성적 여성’을 의미하는 부치) 프레임을 씌워 훈련을 포기하게 하지만 실패한다. “이미 여성이 여성적 여성/남성적 여성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남녀의 이분법적 구도를 허무는 것이며 젠더 교차적 동일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버틀러에 기대어 희망을 가져 보지만, 영화에서는 남자 친구와의 이성애를 등장시켜 ‘동성애자 아님’을 보증해 주면서 동성애 이슈는 가볍게 소비되고 흩어진다.

 

 

해러웨이의사이보그 버틀러의주체 출구가 있을까?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외계의 적에 대항하는 지구연합군을 다룬 SF 영화다. 전투가 싫어 공보장교에 지원한 케이지 소령과 전투에 참전한 현역 군인 중 유일하게 승리하여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브라타스키 하사가 등장한다. 첨단 워리어 플랫폼 장비인 ‘엑소 수트’와 한 ‘몸’이 된 두 군인은 공통 경험(타임루프에 갇힌다.)을 토대로 소통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전쟁영화와는 달리 성차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두 군인 간의 감정은 이성애인듯 전우애인듯 모호하게 묘사되며 그것이 무엇이든 ‘전쟁 승리’와 극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의 승리가 나에게는 ‘이분법의 미로’에서 출구를 찾은 서사로 읽히기도 하는 이유다. 

 

   오늘도 여성 군인들은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가 출산한 지정학적 안보 불안과 젠더 폭력이라는 이중의 전쟁 경제 속에서, 그 견고한 동맹이 호명 또는 재현한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삶의 현장 속에서 버틀러의 ‘주체’가 되는 꿈, 그리하여 ‘법의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물을 남겨 완전한 총체적 일원체계를 위협하는 전복력’을 갖는 꿈을 꾼다.

 

“버틀러의 주체는 그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 부분을 남김으로써 완전한 복종도, 완전한 저항도 아닌 복종을 하는 것이다. 즉 승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주체의 몸은 잔여물로서 구성적 상실 속에 살며 몸의 틀을 잡고 규제하는 동시에 규제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27)

 

* 베티 리어든,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13쪽

** Tomboy is a girl who exhibits characteristics or behaviours considered typical of a boy.(네이버 영어사전) 

 

http://moontaknet.com/?page_id=5254&mod=document&uid=33691

댓글 3
  • 2021-07-16 07:47

    오늘 아침 오랜만에 선선한 대기를 느끼면서 맑은 정신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쓰여진 글에서 뿐만 아니라 쓰이지 않은 행간에서 무사님의 실존적 고민이 느껴집니다.

    한편의 글로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사님을 조금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글로 만나니 좋네요.

    *언젠가 필름이다에서 무사님과 영화를 같이 보고 싶군요.^^

  • 2021-07-17 12:34

    나와는 별로 연결점이 없다고 생각되던 군인, 그것도 여자 군인ᆢ

    그리고 그것에 연결되는 또 다른 세상을 줌해서 보여주시는 무사님과 무사님의 고민과 사유가 잘 드러나는 멋진 글ᆢ.

    너무 잘읽었어요^^

  • 2021-07-17 18:53

    수행으로 전복력을! 건승을 빕니다!!

    내삶을 돌아보며 진심^^

    한손 팔굽혀펴기도 진심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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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와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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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a
2021.07.12 |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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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었다   나는 60세.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딸로 태어나, 남녀차별의 한복판에서 자랐다. 나는 공교육에서, 더 빈번하게는 혈연관계 아버지로부터 순결교육을 받았다.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 이후 독박육아가 시작되면서 나는 남/녀, 가부장의 모순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우울하지 않으면 늘 화가 나 있었다.   90년대 초. 남편의 구타와 학대로 죽게된 아내들의 사건이 연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을 때, 나는 여성의전화에서 상담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같이 살던 남자에게 향하는 화를 사회적으로 풀고 싶었다. 전화 상담은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과 폭력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화기 속의 수많은 그녀들과 나는 똑같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희생자라는 생각으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절반의 여성이라는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왜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지는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페미니즘 운동으로 뛰어들게 만들 수 있는 이론적 무기가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남성혐오자가 되어 갔고, 남/녀 대립으로 치닫기만 하는 감정적 언어와 화법밖에 쓰지 못하는 현실이, 나의 한계가 지겨웠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곤란함과 낯섬   해러웨이의 선언문을 읽은 후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곤란한 감정에 휩싸였다. 단순히 오랫동안 모호한 채로 방치된 과거의 경험이 다시 소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과거의 내가 왜 지쳐 나자빠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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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불빛
2021.07.09 | 조회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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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구하라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서 다닌 첫 직장은 성폭력상담소 부설 청소녀 쉼터였다. 성폭력 피해 10대,20대 청소녀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쉼터의 간사로 활동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모두 해 먹고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를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90%가 친부에 의한 성폭력이었고, 유산 경험이 있으며, 어릴 때부터 정서적 학대로 인해서 지능이 발달하지 못해 지적발달장애를 가졌고,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받는 딸아이를 외면하는 친모를 가진, 청소녀들이, 거기 있었다. 그 때부터 성(性)에 관심이 높아졌다. 성폭력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이 무엇인지, 성차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 즘 레즈비언과 게이를 알게 되었고 트랜스젠더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페미니즘을 배웠다. 양성평등을 위해서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정책을 만들어내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성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남성보다 차별받는 여성이 좀 더 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친구, 레즈비언   ‘여성’이 좀 더 잘 사는 세상이 궁금했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여성단체에서 실시한 아카데미에 참여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화예술분야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많은 레즈비언을 만났다. 울퉁불퉁하게 생겼을 줄 알았던 그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화가 잘 되었고 유쾌했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벽장 속에 갇혀 있어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으며 아웃팅 당할까봐 전전긍긍한다고 말하는 그들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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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
2021.07.09 | 조회 24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1. 정체화된 페미니즘의 현장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고, 내가 조금 더 나에 가깝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지 못했다. 공공장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의식적으로 작게 소리 냈고,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로 번역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와 메갈을 동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인 메갈로 오해받기 싫었다. 또, 페미니스트라면 PC(Political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하거나, 탈코르셋을 한 외관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PC하기엔 너무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매일 화장을 하며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그렇게 생각했다. PC하고, 모두가 숏컷하고 바지 입는, 혹은 메갈인 것.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온 친구가 나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한 날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자신의 발언이 언피씨하다고 바로 정정했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런 게 있었다. 페미니스트다운 것, ‘진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 말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됐을 때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는 책을 보게 된 적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낙인의 의미로 페미니스트 되기는 밥 먹듯이 쉽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너무도 숭고하여 셀수 없이 많은 판관들의 인증을 거쳐야 한다.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이라영,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들어가는...
1. 정체화된 페미니즘의 현장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고, 내가 조금 더 나에 가깝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지 못했다. 공공장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의식적으로 작게 소리 냈고,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로 번역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와 메갈을 동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인 메갈로 오해받기 싫었다. 또, 페미니스트라면 PC(Political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하거나, 탈코르셋을 한 외관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PC하기엔 너무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매일 화장을 하며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그렇게 생각했다. PC하고, 모두가 숏컷하고 바지 입는, 혹은 메갈인 것.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온 친구가 나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한 날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자신의 발언이 언피씨하다고 바로 정정했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런 게 있었다. 페미니스트다운 것, ‘진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 말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됐을 때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는 책을 보게 된 적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낙인의 의미로 페미니스트 되기는 밥 먹듯이 쉽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너무도 숭고하여 셀수 없이 많은 판관들의 인증을 거쳐야 한다.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이라영,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들어가는...
현민
2021.07.09 | 조회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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